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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189화 (190/497)

Chapter 189 - 189. 군포역 (5)

체감상 시간이 10분 정도 지났을 때.

"끝···났나?"

한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붉은 단발은 잠깐 사이에 완전히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세아씨. 지수야, 눈 좀 떠 봐. 다 끝났어."

나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인 지수를 흔들었다.

"괜찮아괜찮아괜찮아괜찮아괜찮을거야."

얼핏 기절한 것처럼 보이나, 작게 들리는 웅얼거림에 지수의 정신이 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걸 깨어 있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말은 하고 있지 않은가.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되뇌이는 걸 보니 자기 세뇌 주문이라도 외는 모양이다.

"예린이는 어떻습니까?"

"···기절했어요."

"······."

어쩐지 비명 소리 하나가 들리지 않더라니 예린이 정신을 잃어서 그랬던 것이다.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둘 다 다친 곳은 없죠?"

"네···. 예린이는 무사하고, 저는 그냥 좀 멍만 들었어요."

다행히 심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는 한세아의 말.

"현우씨는요? 괜찮죠?"

"네네, 지수도 멀쩡하고 저도 여기저기 긁힌 것 빼면 이상 없습니다. 나중에 약이나 바르면 금방 낫겠죠."

"하아아···."

한세아는 예린을 품에 한층 더 집어넣고 긴 숨을 내뱉었다.

"하아···."

나도 한세아처럼 한숨을 내뱉으면서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차를 칠한 흙먼지, 살짝 기울어진 바닥, 끊어진 선로, 굳건하게 버틴 군용 로프, 허리춤을 묶고 있는 밧줄.

그리고 열차 주위를 지나가고 있는 거대한 나무뿌리.

마치 떨어지려는 지각을 붙잡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무뿌리가 하나가 아닌 적어도 수십 개에 달하는 것들이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니 더욱 그렇게 보였다.

만약 나무뿌리가 화물 열차를 스치지 않고, 직접 건드렸을 때 벌어졌었을 일을 상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야말로 정말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세아씨,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요. 아니, 일어날 수 있어요."

한세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품에는 축 늘어진 예린이 안겨 있었다.

"제가 예린이 들까요?"

나는 가뜩이나 무거운 짐 가방도 들고 있는 한세아가 걱정되어 물었다.

"아뇨, 현우씨는 지수씨 업어야 할 것 같아요."

"지수요? 지수는 곧 일어날 수 있을걸요?"

한세아의 말에 지수를 바라보자, 그녀는 눈물 범벅인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못 걸어.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알았어. 내가 업어 주면 되지?"

"······응. 부탁할게, 아저씨."

나는 지수를 업기에 앞서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한차례 지나간 나무뿌리의 움직임 탓인지 열차 다리는 살짝 기울어지기만 했을 뿐, 전보다 더 단단하게 고정된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아마도 다리 밑에 선로가 빠진 빈 공간을 나무뿌리가 채우고 있는 모양이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괜찮아지니 곧장 반발 심리가 고개를 들었다. 다리가 한층 안전하게 고정되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열불이 치솟았다.

바닥에 통통 튀기면서 느꼈던 고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까.

"현우씨, 그래도 줄이 진짜 튼튼해서 다행이네요. 덕분에 저희가 살았잖아요."

"그러게요. 마지막에 몸이 붕 떴을 때 주마등 스쳐 지나가길래 다 끝인 줄 알았는데···."

저승 문턱을 넘기 직전이던 우리를 이승으로 끌어내린 것은 허리춤에 연결되어 있던 군용 로프였다.

성인 셋과 아이 하나의 체중이, 그것도 한쪽으로 확 쏠린 체중을 로프가 버텨 내주어서 우리가 살 수 있었다. 중간에 매듭이 풀리거나 줄이 끊어졌더라면 오늘이 숨을 쉴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겠지.

"읏차-, 전 준비 끝났어요. 현우씨도 어서 지수씨 업어요. 빨리 흔들거리는 다리가 아니라 단단한 땅을 밟고 싶다구요."

한세아는 짐 가방을 앞으로 매고, 예린을 포대기에 감싸 업었다. 나는 그녀의 짐에 담긴 내용물을 일부 빼내 내 가방에 옮겨 담았다. 한세아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함이었다.

"자, 지수야. 내 어깨 위로 팔 올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나는 지수가 올라타기 쉽게끔 그녀 앞에서 자세를 최대한 낮추었다.

"응, 근데···."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지수는 업히는 것을 망설였다. 허벅지를 비비적거리면서.

"왜? 어디 아파?"

문득 묘한 냄새가 맡아져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지수의 얼굴은 한층 더 붉게 변했다. 그녀의 귀가 경련하듯 움찔움찔 떨었다.

"그건 아닌데···."

"그럼 다행이고. 빨리 업혀. 뿌리가 언제 또 움직일지 모르니까."

내 재촉에 지수는 눈을 질끈 감고 내 등에 업혔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왜 망설였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수야."

나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로 지수를 부르자,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제발···. 흑, 진짜 짜증 나···. 흐윽."

그녀는 두 팔을 내 목에 두르며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

나는 지수의 치부를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그녀의 인권을 지켜 주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 등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은 지수가 훌쩍거리는 탓일 것이다.

"···갑시다, 세아씨."

"네!"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각자 한 사람씩 업은 상태로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200m 중에서 이제 남은 거리는 불과 70m 정도.

본래 80m 정도 남았었건만, 잠깐 몸이 위로 떴을 때 10m나 날아갔었나 보다.

더 날아갔으면 거리는 순식간에 좁힐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가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 중간에 제동이 걸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었다.

나와 한세아는 군용 로프를 잡고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우리가 다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경사는 점점 완만해지다가 이내 평지와 비슷하게 바뀌어갔다. 경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다리의 끝에 다다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벅- 저벅-

···툭 ···툭

다시 잠잠해진 크레바스에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 친다. 멀리 퍼지는 소리는 암벽에 달라붙은 흙알맹이들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휘이이이···

한바탕 난리가 끝나자 기세가 확연하게 줄은 바람. 하지만 땀과 다른 액체로 푹 젖은 옷을 통해서 체온을 앗아가는 것은 여전했다.

따끔!

로프를 쓸면서 손을 이동시키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레 느껴지는 고통.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보니 피부가 일부 까져 있었다. 다행히 목장갑을 껴서 이 정도에 그친 것이다.

"···현우씨? 왜 그래요?"

한세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손이 좀 까져서요. 세아씨 손은 어때요?"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문제없음을 피력했다. 아무래도 바깥에 외출했던 혼이 돌아옴에 따라 몸의 고통이 더 잘 느껴지게 되었을 뿐이었으니까.

"저도 보니까 손이 좀 까졌네요. 그래도 목장갑이라도 낀 덕분에 심하지는 않아요."

나뿐만이 아닌 한세아도 손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니, 불과 몇 분전의 상황에서는 로프를 놓치면 죽는다라는 생각이 나만 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그녀 또한 로프를 필사적으로 붙잡았을 테니까.

손이 아작나는 걸로 살 수만 있다면 값싼 대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가 잡은 군용 로프가 와이어가 내장된 것이 아닌 전부 쇠 와이어로 이루어져 있는 제품이었다면, 단순히 손이 아작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이야기도 달라졌겠지.

그래도 지금 살아 있기에 정신을 일깨워주는 고통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손도 무사하다.

나는 되도록 긍정적으로 사고했다.

'그렇다고 방심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덧 남은 거리는 50m.

지상까지의 거리는 느리지만 꾸준히 좁혀지고 있었다.

나와 한세아는 말없이 건너편 지상을 바라보며 걸었다.

몸이 무겁다.

옷이 무겁다.

짐이 무겁다.

다리 하나 건너겠다고 이게 무슨 고생인지, 체력이란 체력은 전부 끌어다 쓴 듯했다.

40m.

손의 쓰라림이 한층 강해졌다.

바닥에 부딪힌 팔꿈치가 욱신거린다.

목에서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진다.

우리가 고작 200m 다리를 건너면서 속절없이 흐른 시간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건너기 시작했고, 지금 해는 멀리 보이는 산과 고도를 맞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20m.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쇠맛이 느껴졌다.

"···아저씨, 나 이제 내려 줘도 되는데.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얌전히 업혀 있어. 거의 다 왔으니까."

"······미안해."

나는 대답 대신 지수를 고쳐 업었다.

그녀가 미안해할 것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미안했다. 지수는 순전히 화물 열차 다리를 건너고 말겠다는 내 고집을 따른 것뿐이니까.

10m.

코앞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지상. 그러나 결코 방심하지는 않았다.

위험은 언제나 우리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방심하는 상황에 불쑥 튀어나오니 말이다. 다만 점점 느려지고 있던 발걸음에 속도가 붙은 건 막을 수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저벅-

뒤따라 오던 한세아의 발걸음 소리도 간격이 짧아졌다.

마침내.

···0m.

나, 지수, 한세아, 예린은 건너편 지상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걸 '무사히'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심각한 부상을 입지도 않고 흔들 다리를 넘어선 출렁 다리를 건넌 것이다.

"흐아···!"

"아흐으······."

가쁜 숨을 쉬던 나와 한세아는 단단한 땅을 밟자마자 지수와 예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곧장 뒤로 발라당 드러누웠다. 흔들리지 않는 바닥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역시 사람은 당연하고 익숙한 것의 소중함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 어리석은 존재였다.

따라서 지금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몸을 지배한 안도감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충분히 만끽하기로 했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내가 예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200m는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니 뭐니 하면서 200m를 무시했던 기억.

'아오···, 200m가 짧긴 뭐가 짧아···.'

그러니 정정한다.

200m라는 거리는 매우 긴 거리다.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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