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0화 (191/497)

Chapter 190 - 190. 금정역 (1)

긴장감이 한 번에 풀린 반동으로 온몸에 탈력감이 돌고 있는 나와 한세아는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언니, 저 가방에서 옷 좀 꺼내 갈게요···."

그런 우리 옆으로 지수가 엉금엉금 기어 왔다.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지수씨."

"네?!"

한세아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는 지수.

"···왜 그렇게 놀라요? 꺼내는 김에 물티슈랑 물 좀 같이 꺼내 줘요. 아, 초코바도 같이요."

"넵···."

그녀는 이내 남모를 한숨을 쉬며 비닐팩에 들어 있는 여분의 옷가지와 한세아가 부탁한 물건들을 꺼냈다.

부스럭- 툭

흙바닥에 놓이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량들.

"읏차···. 예린아? 다리 다 건넜어. 일어나 봐."

한세아는 기절한 예린을 살살 흔들어서 깨웠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린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아악!"

아이는 몸을 확 일으키더니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하악질을 사방으로 날렸다. 힘껏 부풀어 오른 꼬리털에 의해 꼬리는 본래 크기의 3배 정도로 늘어난 모습이었다.

"하악······?"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예린은 나, 지수, 한세아 그리고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한세아에게 몸을 던졌다.

"흐으으응···."

한세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훌쩍거리는 예린의 행동은 아이가 많이 놀랐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당장 우리도 심장이 철렁하다못해 쿵 떨어질 뻔했건만, 아이는 오죽할까.

"쉬이···, 괜찮아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한세아는 놀란 아이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규칙적인 박자로 톡톡 두드릴 때마다 부푼 꼬리털이 가라앉는 걸 보니 다행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크응··· 네에···."

"자, 물 한 모금 마시고··· 옳지! 초코바도 하나 먹을래?"

"먹을래요······."

예린은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무섭고 서러운 와중에도 식탐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때.

"아, 아저씨···."

옆에 바싹 다가온 지수가 나를 작게 불렀다.

"어? 왜?"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지수는 수건과 바지를 들고 서 있었다. 돌돌 말린 바지 사이로 얇은 천 조각 하나가 얼핏 보인다.

"그,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알고 있어. 저 차 뒤쪽까지만 갈 거야."

그녀가 가리킨 것은 고가도로 그림자에 잠겨 있던 경차였다. 뒤집어진 차량의 모습은 위에서 추락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내가 서 있는 곳과 차량까지의 거리는 대략 5m. 그 정도면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듯했다.

"얼른 갔다 와. 주변에 이상한 소리 들리는 건 없지?"

"응, 조용해."

지수는 그 말을 끝으로 호다닥 차량으로 뛰어갔다. 나는 갈고리 모양으로 말린 그녀의 꼬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중에 놀릴 거리가 하나 늘었지만, 눈치 없이 놀린다면 나는 죽기 직전까지 맞고 말겠지.

목숨의 온전한 보전을 위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겠다.

지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현우씨! 가만히 있어요. 얼굴 닦아줄게요. 지금 완전 엉망이거든요."

한세아가 물티슈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옅은 물기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세아의 손을 꼭 붙잡은 에린도 마찬가지였다. 지친 와중에도 재빠르게 본인과 아이의 얼굴을 깔끔하게 닦은 걸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부탁하겠습니다."

나는 한세아가 닦기 쉽게끔 몸을 숙였다. 아무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 그녀가 해주는 것이 꼼꼼하게 닦아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스윽- 스윽-

피부를 스치는 티슈는 갈수록 황색으로 물들어갔다. 검댕이도 묻어나는 걸 보니 지금 내 꼴이 얼마나 엉망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얼굴은 점점 개운한 느낌이 들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탓인지 몸쪽에서 느껴지는 찝찝함이 한층 더 심해졌다.

옷도 갈아입고, 샤워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자원을 함부로 낭비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급한 대로 얼굴이라도 닦아내는 것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나마 이 정도라도 하는 것이 어디인가.

"됐다! 훨씬 보기 좋네요. 현우씨도 초코바랑 물 좀 마셔요. 입맛은 없겠지만 배는 채워 둬야죠."

한세아의 말대로 뭔가를 먹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목구멍에 초코바를 밀어 넣었다. 그래도 달달한 것과 열량이 공급되니 머리와 몸에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함도 약간 가셨다.

우물우물-

캬라멜 과자 사이에 숨어 있는 아몬드를 꼭꼭 씹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대한 경계는 아무리해도 모자라지 않으니까.

선로 위를 뒤덮은 콘크리트 덩어리들, 납작해진 철제 담벼락, 붕괴된 건물, 삐죽 튀어나온 건물 골조, 조각조각 깨져 박살 난 유리창.

그리고 어김없이 철도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탈선한 화물 열차들.

말 그대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이었다.

단순히 분리된 지각 근처에 있는 건물들뿐만이 아닌 우리가 앞으로 향해야 하는 길목에 있는 건물들도 옆으로 누워 있는 것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지진 혹은 거대한 나무뿌리에 의해 지상이 둘로 나뉘어지면서 생긴 충격이 멀리, 아주 멀리까지 퍼진 모양이다.

가까이서 보니 군포시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체감이 확실하게 되었다. 멀리서 쌍안경으로 볼 때랑은 전해지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이런 도시에서 버티고 있는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낮겠지. 하지만 나무 인간들이나 변종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

그것들이 살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숨을 곳도 많고.'

트럭 밑, 담벼락 사이, 도로 옆 수풀, 건물 파편의 틈, 깨진 유리창 너머 등등···.

나무 인간들이 기습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은 많다 못해 차고 넘쳤다. 그러니 주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개방된 장소를 통해 이동해야 하리라.

언제나 그랬듯 적막한 도시는 우리의 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적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다면, 차라리 위험에 대처하기 용이한 곳을 고른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의 위치가 훤히 드러나는 길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그런 까닭이었다.

이윽고.

"아저씨, 언니. 이제 움직이자."

푹 젖은 바지를 갈아입은 지수가 나, 한세아, 예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귀와 꼬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조금씩 쫑긋거리거나 살랑거리고 있었다.

"예린아, 걸을 수 있겠어?"

나는 눈가가 퉁퉁 부은 아이의 눈가를 쓸어 주며 물었다. 미처 닦지 못한 눈물방울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네···! 뛸 수도 있어요!"

예린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입에 한가득 들어 있는 초코바는 아이를 순식간에 기운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예린이 또래에 비해 의젓한 덕도 있을 것이고.

"세아씨는요?"

"저도 괜찮아요."

"좋아, 그럼 다시 힘내서 출발합시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짐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발목이 뻐근하고, 온몸이 쑤셨지만 몸이 풀릴 때까지 쉴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숨을 돌릴 수 있을 만큼만 휴식을 취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해가 져서 밤이 되기 전에 금정역이나 명학역에 도착한다는 목표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쉬고 싶어도 근처에 하루를 보낼 만한 곳이 없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절그럭- 절그럭-

"세아씨, 거기 옆에 조심해요. 철골이 날카롭습니다. 지수 너도 조심-."

"넵."

"으앗!"

"조심하라니까, 지수야."

"주변 냄새 좀 맡느라···. 미안."

우리는 철도길 곳곳에 자리 잡은 장애물들을 다치지 않게 피하면서 지나갔다.

자갈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인 투명한 유리 조각들.

날카롭게 찢긴 철근과 그것이 박혀 있는 콘크리트들.

고층 아파트가 붕괴되면서 철도를 덮친 여파의 흔적이 셀 수도 없이 남아 있었다. 한눈을 팔았다가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을 정도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휘이이이이···

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흙먼지를 일으킨다. 바람이 부는 대로 소소소 일어난 흙먼지는 이내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움직이다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올곧게 직선으로 뻗어 있던 선로가 좌측으로 살며시 틀어지며 완만한 곡선을 이루었다. 여전히 눈에 띄는 나무 인간들은 보이지 않았다.

변함없이 주변은 매우 고요했다.

마치 폐허가 된 도시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우리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킁킁-

쫑긋!

지수는 청각과 후각에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있는 나무 인간이나 변종을 먼저 포착하기 위함이었지만, 감각에 잡히는 것은 없는 듯했다.

"···이상하네."

지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위험한 존재들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당장은 안전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우리는 서서히 잠식하는 묘한 위화감에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동안 이동할 때마다 위험이 연신 닥친 탓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 우리가 버젓이 존재하는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적지 않은 소음이 도시를 울렸건만, 이토록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커져가는 불안감을 품고, 금정역에 도착하기 전의 마지막 문턱인 금정고가차도 아래에 도착했다.

그리고 보았다.

거대한 포자 덩어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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