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1화 (192/497)

Chapter 191 - 191. 금정역 (2)

금정고가차도 아래.

"아저씨. ···소화제 포자···맞지, 저거?"

"······맞는 것 같은데."

"저렇게 큰 건 처음 봐요···."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부식된 차량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화물 열차들과 차량들, 각종 장애물들을 넘어 마침내 금정역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역이 사라진 것이 아닌 형체가 남아 있다는 것에 크나큰 안도감을 느꼈었다. 눈에 띄는 지형 변화가 보이지도 않았고.

군포역과 마찬가지로 갈라진 지각이나 크게 형성된 싱크홀 따위에 의해 200m에 달하는 흔들 다리가 또다시 있었다면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로프 하나에 의지해 위험천만한 다리를 건너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이번에 어찌어찌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천운에 가까운 요행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라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양측으로 철도와 도로를 나누는 철제 담벼락. 그것들이 넘어진 공간 너머로 도시 곳곳에 피어 있는 거대한 포자 덩어리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폭발한 흔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화제 덩어리.

아파트 중간층, 아스팔트 도로 위, 방치된 차량들 주변 등등 특정한 장소에 한정된 것이 아닌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무차별 포격을 당한 것처럼.

역은 무사했다.

아니, 역만 무사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아저씨, 저기 봐봐. 승강장 보여? 거기 뭐가 막 굴러다니는데."

지수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내 내게 쌍안경을 건네주면서 앞을 가리켰다.

"······!"

나는 지수가 가리킨 장소를 찬찬히 훑었고, 지수가 말한 것의 정체를 곧장 볼 수 있었다.

옆으로 넘어진 컨테이너 화물차와 활짝 열린 컨테이너 문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은, 총알을 크게 늘린 것처럼 보이는 포탄이었다.

그리고 지붕이 사라진 승강장 위에는 박격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박격포 주위에는 뒷부분에 작은 날개가 달린 박격포탄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관리하고 운용할 군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흔적조차도.

"뭔데요? 역에 뭐가 있길래요?"

한세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포탄들이 엄청 많습니다. 웬만하면 여기서 하루 보내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지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무 인간들은 보이지 않고요."

나는 쌍안경에서 눈을 떼며 답했다.

다리를 건너느라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어지간해서는 금정역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한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역과 그 주변에 널린 포탄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상 걸음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포탄들의 밭에서 잠을 청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비록 그것들이 단순히 건드리는 것만으로는 터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나무 인간들이 근처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 혹은 조용한 이유는 거대한 포자 덩어리들이 그것들을 유인하고 있는 까닭이겠지.

역 주변에 포자 덩어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곳에 비하면 현저히 적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용히 지나가기만 한다면 나무 인간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있으리라.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도 안전하지 않네요. 어서 위로 이동합시다."

군인들이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를 챙기지 못한 채 황급히 떠나야만 했던 원인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원인이.

그들이 무엇을 보고 포격을 가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으나, 위험한 것들을 저지하거나 죽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단지···.

'저지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처리하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지만.'

무언가를 처리했더라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급하게 떠난 광경이 아니지 않았겠는가.

휘이이이이-

타닥- 타닥-

고가도로 아래로 축 늘어진 넝쿨 줄기들이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이윽고.

"일단 알았어요. 예린아, 가자. 언니 손 놓지 말구."

"네!"

"지수는 좀 더 수고해 줘야겠다. 미안."

"아냐,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뭘."

우리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는 금정역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흩뿌려진 기름보다 더욱 위험한 흩뿌려진 포탄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상 우리의 움직임은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잘그락- 잘그락

자갈 밟는 소리와 함께 전철주들이 지나쳐진다.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지수가 냄새를 맡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재개하기를 수차례.

[ⓜ IMPERIAL 임페리얼]

[고기능 골프웨어 SUPERIOR]

건물 옥상에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인 간판을 보는 것과 동시에.

"지수야, 포탄 최대한 건드리지 마."

"나도 그 정도는 알 거든?"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금정역에 진입했다.

***

금정역.

이 역은 선로를 승강장의 양옆으로 두고 노선 진행별로 나뉘어 타는 3면 5선식의 섬식 승강장을 가지고 있었다.

역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거쳐 온 역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잔뜩 벗겨진 건물 외벽에 의해 드러난 골조가 좀 더 흉하게 보였을 뿐이었다.

텅 빈 자판기, 승강장 위에 놓여 나무 상자들, 부서진 나무 조각, 찢겨진 철판, 깨진 스크린 도어, 넘어진 박격포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포탄들.

"현우씨! 이거 하나 챙겨 갈까요?"

한세아가 나무 상자에 가득 담긴 포탄 하나를 가리켰다.

[60mm COMP B 고폭탄]

국방색 배경에 노란 글씨가 쓰여 있는 건 60mm 박격포탄. 고폭탄이라는 글자를 보니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세아씨."

"이거 작은 거 하나 가져가면 좋을 것 같은데···."

단호한 내 말에 아쉬움을 표하는 한세아.

"아니, 포탄을 들고 간다고 쳐도 저거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손이랑 비슷한 크기지만 비교가 안 된다고요. 게다가 지금 들고 있는 짐 무게도 상당하잖아요."

"그렇게 무거워요?"

"그렇다니까요. 또 괜히 가져가다가 중간에 잘못해서 터지기라도 하면···."

나는 오소소 돋는 소름에 뒷말을 흐렸다.

정상적인 발사 방식이 아니면 불발이 날 확률이 높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확률. 터지지 않을 확률이 있다면 무조건 터질 확률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손바닥만 한 포탄이라도 우리를 산산조각내는 건 충분하니 그저 피하는 것만이 상책이었다.

[명학←금정←군포]

나는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적재함과 바닥에 널린 각종 포탄들로부터.

명학역은 금정역보다 상황이 낫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말이다.

바로 그때.

"어?! 오빠! 하늘!"

돌연 예린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우리는 아이가 무언가를 가리킨 즉시 몸을 숙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햇빛에 절로 감기려는 눈을 애써 뜨자, 푸른 하늘에 이질적으로 떠 있는 아니, 빙빙 돌아다니는 검은 점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뭐야?"

"새···인가? 새겠죠? 하늘 나는 건 새밖에 없잖아요. 이제 비행기가 뜨는 세상도 아니구."

한세아가 가방을 고쳐 매며 말했다.

그러다가.

"어어? 아저씨! 저거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새라고 추정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지수가 작게 외쳤다. 그녀의 말에 시선을 집중하니 하늘에 떠 있던 검은 점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머리 숙여!"

"으아앗!"

후우우웅!

검은 형체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고, 빠른 속도로 우리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까아악! 까악!]

바짝 엎드린 우리들의 귓가에 들리는 것은 생각보다 낯익은 소리였다.

"···까마귀?"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검은 깃털, 검은 부리, 검은 눈동자, 검은 발톱 그리고 그것의 울음소리.

크기는 예전과 비할 바가 되지 못 하지만 분명 까마귀였다.

지수, 예린, 한세아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모습을 드러낸 거대 까마귀에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뒤에 벌어지는 일에 우리는 서둘러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콰장창! 쿵!

[그아아아아악!]

군복을 입은 나무 인간 하나가 2층 역사 대합실의 유리창을 깨고 승강장으로 떨어져 내렸으니까.

"지수야!"

"응!"

"세아씨는 예린이랑 여기 있으십쇼!"

"알았어요!"

나와 지수는 도끼를 꽉 쥔 채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 여기에는 숨을 수 있는 공간도 없었고, 나무 인간은 이미 우리를 눈에 담고 노려보는 중이었다.

까마귀 소리에 반응한 나무 인간이 입고 있는 군복은 그가 군인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현 상황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점은 아니었다.

그건 처리하고 나서 알아봐도 충분했다.

그러니 나무 인간이 더 큰 소음을 내기 전에 서둘러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쿵쿵쿵쿵쿵- 까각! 까가각-

나무 인간은 껍질 비틀리는 소리를 내면서 승강장 위를 맹렬하게 질주했다. 뿌옇게 뜬 동공에는 오직 살의만이 담겨 있었다.

일견 무시무시한 기세와 광경이었지만 나와 지수에게 소수의 나무 인간 정도는 이제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겨우 하나에 불과하다면야 더욱 그렇다.

다만 문제는.

"먼저 가! 포탄 밟기 전에 죽여야 해!"

장소가 여의치 않다는 것이었다.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던 포탄들이 놈의 발길에 치이거나 구겨지기라도 하는 순간, 뒤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었으니까.

[기에에에에엑!]

빠르게 거리를 좁히고 있는 와중에도 나무 인간은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달리기만 했다.

콰직! 콰작! 까가각!

퍼석-!

놈이 내딛는 발걸음에 의해 썩은 나무 판자들이 형편없이 부서진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만 믿어!"

호기롭게 외친 지수는,

파직!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섬전처럼 몸을 쏘아 보냈다.

쐐애액! 서걱!

[그아아아-칵!]

재빠르게 휘둘러진 소방 도끼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나무 인간의 목을 단번에 쳐 냈다. 놈이 내뱉는 소리는 중간에 탁 끊기게 되었다.

-쿵!

촤악-

머리를 잃은 몸통이 나자빠지며 바닥에 등을 찧었다. 뜯겨진 목의 단면에서 검붉은 체액이 팍 튀며 승강장을 장식했다.

툭- 투둑-

통통 튀며 승강장 바닥 위를 굴러가는 머리.

그리고.

······포탄.

"이런 씹! 지수야! 엎드려!"

"으꺅?!"

나는 곧장 지수를 뒤에서 덮쳐 눌렀다.

살짝 경사진 승강장 바닥을 타고 포탄 하나가 아래에 있는 선로를 향해 굴러가고 있던 까닭이었다.

포탄은 거리도 거리지만 이미 속도가 붙은 탓에 멈춰 세울 수도 없었다.

데굴데굴···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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