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4화 (195/497)

Chapter 194 - 194. 금정역 (5)

시야를 가리고 있는 방수포 너머에서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

"······."

"······."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무심코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너머의 하늘에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까악- 까악!]

"······지금 우리 위를 맴돌고 있어."

신중하게 귀를 쫑긋거리던 지수가 말했다. 그녀의 금안은 소리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천천히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니 지수의 말처럼 까마귀가 화물 열차 위를 빙빙 돌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끄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엑!]

[으어어어어억!]

살아 있는 생명체의 소리에 지상의 나무 인간들이 격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놈들의 기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활로를 찾아 빠져나가려던 우리의 계획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무 인간들이 진정되기는커녕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쾅! 쾅! 콰앙-!

기기기긱- 까가각-

무엇이 부서지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파괴음들이 서로 겹쳐 들린다. 대강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대체로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였다는 것이다.

간혹 우리가 숨어 있는 객차가 좌우로 흔들리기도 하는 걸 보니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나무 인간들이 눈앞에 있는 열차들을 괴롭히고 있는 듯했다.

끼이이이익━!

칠판 긁는 소리가 들릴 때면 지수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귀를 잠시 막았다.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는 나, 예린, 한세아도 듣기 힘들었건만, 지수는 오죽할까.

바로 그때.

푸드더덕!

거친 날갯짓 소리가 방수포 위를 스쳐 지나가서 멀어지더니.

[키에에에엑!]

쿵쿵쿵쿵쿵!

절그럭절그럭절그럭!

난동을 부리고 있던 나무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괴성과 함께 멀어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하늘에서 약을 오르게 했던 까마귀를 따라 이동했나 보다.

"···뭐예요? 뭐가 대체 어떻게━. 흐윽!"

한세아는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지만, 이내 황급히 입을 다물고 몸을 바짝 숙여야만 했다. 엎드리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 나, 지수, 예린도 동일했다.

퍼-엉! 콰아아앙!

꾸드드드드득!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음이 객차 내부를 진탕시킨 까닭이었다. 폭음을 뒤따라오는 것은 소화제가 열기를 진압하는 소리겠지.

계속해서 급변하는 상황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까마귀가 나타나더니 역사에 숨어 있던 나무 인간이 뛰쳐나왔고, 나무 인간을 어찌어찌 처리하고 나서 기껏 역사에서 벗어났더니 돌연 포탄이 터지질 않나, 포탄 터지는 소리에 몰려든 나무 인간들을 피하고자 화물 열차에 숨었더니 이제는 다시 까마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현재는 까마귀 소리에 이어 포탄이 연이어 터지는 소리까지.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까마귀였다.

모든 상황은 까마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놈만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숨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체 저 까마귀가 우리에게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사냥을 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방식이 너무 번잡하고, 단순히 죽이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처럼 나무 인간들을 유인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숨어있는 화물 열차 근처의 나무 인간들을 가만히 두기만 해도 죽인다는 목적에 가까워지니까.

지금 까마귀의 행동은 마치 우리를 살리려는 듯한 움직임이지 않은가.

퍼엉-! ···퍼어엉···! ······펑-!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의 간격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한층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무 인간들의 존재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수야, 없지?"

나는 지수에게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지수.

바스락!

그녀는 손을 들어 일행의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내 방수포를 살짝 들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지수의 꼬리는 눈치 있게 바싹 굳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경계하는데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함이리라.

휘이이···

환한 태양 빛과 옅은 한 줄기 바람이 답답한 무개차 내부를 환기시킨다.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니 머리가 한층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어. 응, 확실해. 그 이상한 진동도 까마귀 따라서 완전히 멀어졌어."

한동안 바깥을 살피던 지수가 한 말이었다.

"나갑시다. 여기에 계속 있어 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확답에 한세아와 예린을 일으켰다. 그녀들의 낯빛에는 다시금 긴장감이 어렸다.

그래, 우리는 까마귀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절대로.

주변을 점거하고 있었던 나무 인간들의 무리가 전부 사라진 현재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텅··· 텅··· 터텅···

절그락!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무개차 턱을 밟고, 자갈밭으로 내려왔다. 순간 자갈들의 숨이 확 죽으면서 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외부로 나오자마자 우리는 나무 인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뒤로 넘어진 전철주, 팽팽하게 당겨진 고압선, 무너진 벽돌 담벼락, 짓밟힌 넝쿨, 화물 열차에 길게 남은 스크래치, 반으로 꺾인 하얀 가로등들.

그리고 사방으로 흩뿌려진 나무 껍질 조각들과 높게 솟은 포자 덩어리들.

잠깐 사이에 더욱 엉망이 되어 버린 광경이 몸소 알려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이래서야 모른 척 외면할 수도 없었다.

"지체할 시간 없어. 빨리 가자,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내가 바로 알려줄 테니까."

지수가 도끼를 꽉 쥔 채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알았어."

"넵, 바싹 붙어서 따라갈게요."

우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황에서는 지수의 감각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믿음직스럽기도 했고.

이윽고, 우리는 지친 다리를 재촉하며 명학역으로 향했다.

"······."

그러다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나무 인간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후방에 있는 금정역을 따라 이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한 방향으로 향했다는 것은 까마귀가 일정하게 유도했다는 걸 의미했다.

'···지능이 있나?'

무심코 든 생각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폭음은 아까부터 들리지 않았다. 까마귀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또 까마귀가 난리 치기 전에 도착해야 할 텐데···."

"그러니까요···. 지금이야 보이지 않지만 갑자기 나무 인간들 끌고 돌아오면 이제 숨을 곳도 없어요."

그런 생각은 지수와 한세아도 한 모양이다. 그녀들은 쉬지 않고 걸으면서 걱정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수와 한세아의 말마따나 더 이상 몸을 숨길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았다. 전부 어딘가 심한 하자가 있는 건물이었던 까닭이다.

콘크리트 더미나 불탄 차량들 틈에 기껏 숨는다고 해도 결국은 들키게 될 뿐이다.

주변이 전부 시가지이건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숨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

예린은 기력이 다한 듯 지친 기색이었다. 회색 꼬리도 축 늘어져 있었다. 이동한 거리는 저번보다 짧았지만 출렁 다리를 건너면서 기절했던 반동이 큰 듯했다.

"예린아, 힘들면 업힐래?"

"···아니요! 아직 괜찮아요···!"

나는 아이가 걱정되었으나, 예린은 애써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그럭- 절그럭-

우리 위로 고가 도로 하나가 지나간다. 정확히는 우리가 고가 도로 밑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지만.

지도상으로는 앞으로 고가도로를 2개 정도 지나가면 명학역이었다. 거리는 대략 1km 정도 남았을까.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으니 명학역 도착과 동시에 오늘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어떻게든 찾아야 할 듯 싶었다. 더 걷기에는 체력적으로 무리이기도 했고, 심리적인 피로감도 컸으니까.

바로 그때.

"아저씨! 위!"

지수가 도끼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녀가 도끼로 가리킨 것은 하늘에서 급속도로 하강하는 검은 점 아니, 까마귀였다.

···탁!

푸드드덕!

까마귀는 곧장 우리 앞에 내려앉았다. 놈의 거친 날갯짓에 바닥에 깔려 있던 흙먼지들이 위로 피었다.

"콜록! 이런 씹···!"

나는 팔을 거칠게 휘저으며 먼지를 밀어냈다. 말릴 새도 없이 접근한 까마귀를 노려보면서.

"예린아, 이리 와!"

한세아는 온통 검은색만 있는 새를 경계하면서 예린을 뒤로 숨겼다.

하지만.

"······?"

우리가 잔뜩 경계한 것이 무색하게 까마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부리로 깃털을 고르는 행위를 할 뿐. 가끔은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그게 끝이었다.

"···뭐야. 지수야, 나무 인간들 소리 나만 안 들리는 거 아니지?"

"안 들리는 게 맞아. 이 자식 혼자만 온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놈이 나무 인간들을 이곳으로 다시 끌고 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까만 동공으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를 차례대로 주시하는 까마귀가 무엇을 원하는지 여전히 전혀 모르겠다.

그러다가.

톡- 토도독-

까마귀가 통통 튀듯 앞으로 움직였다. 지레 겁먹은 우리는 까마귀가 접근한 만큼 뒤로 물러났다.

[···까악]

처음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어디 가고 작은 울음소리로 의사 표명을 하는 녀석.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건데······. 미치겠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은 이 까마귀가 우리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순순히 보내줄 생각인 것도 아닌 것 같은 녀석의 행동에 답답함은 늘어만 갔다.

[깍··· 까악···]

답답한 것은 녀석도 마찬가지인지 몇 차례 울음소리를 내었다. 까마귀는 이내 부리로 물고 있던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뒤로 걸었다.

"···어이가 없네."

지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지켜보고 있던 한세아와 예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사람을 바라보면서 뒤로 걷는 거대한 까마귀 라니. 마치 순간 괴물 서커스에 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넋이 나가는 광경이었다.

톡- 톡- 찌직-

자기가 가져온 것을 봐달라는 것처럼 부리로 낡은 천 조각을 툭툭 건드리는 녀석의 행동에,

"다들 가만히 있어요. 저게 뭔지 보고 올 테니까."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뭐?! 아니, 저게 뭘 할지 알고?"

"모르지. 근데 이렇게 안 하면 우릴 보내줄 것 같지도 않잖아. 그럼 어쩌겠어? 일단 저게 바라는 대로 움직여야지."

지금 당장 저 까마귀를 죽이려면 죽일 수는 있다. 허나 문제는 죽이는 것이 아닌 그 과정이었다. 한 방에 처리하지 못한다면 죽음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의 숨통을 조여올 테니까.

까마귀는 하늘을 날 수 있고, 우리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는 점도 섣불리 도끼를 휘두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하아···, 조심해. 뭔 일 생기면 바로 도끼 던져 버릴 거야."

"저도 그냥 총 쏴 버릴 거예요. 포탄들이 있는 곳도 벗어났으니 이제 쏠 수 있다구요. 나무 인간들이 다시 몰려오겠지만, 더는 못 참아요."

"그건 제발 참아주세요, 세아씨···.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나는 까마귀가 두고 간 천 조각이 있는 위치로 걸었다. 녀석은 일견 기대감이 서린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S--.'

들어 올린 천에는 알파벳이 쓰여 있었다. 구멍이 뚫린 천 너머로 기대감을 가지고 나를 보는 까마귀가 보인다.

[······]

"······."

영문을 알 수 없는 내용에 나와 까마귀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내가 별반응을 보이지 않자 까마귀의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새가 당황하는 모습도 보다니 세상이 참 말세였다.

[······깍]

녀석 또한 제 맘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 답답한지 고개를 푹 숙이며 외마디 울음을 내뱉었다.

그 순간.

[까아아악!]

후웅-!

까마귀가 머리를 쳐들어 울음을 길게 내뱉었고, 기묘한 파장이 주위로 퍼졌다.

털썩!

"으앗! ···꺅?!"

"으앙!"

그리고 그 파장은 지수의 목걸이와 예린의 목에 걸린 반지를 확 잡아당겨 그녀들을 넘어지게 만들었다. 지수의 초커는 목에 고정된 상태라 단순히 넘어진 것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예린의 반지는 목걸이 줄이 툭 끊어지며 녀석에게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푸드더덕!

한 쌍의 반지를 입에 문 까마귀가.

"어?! 엄마 아빠 반지가···!"

예린의 보물인 반지를 들고 날랐다.

'S--'라는 영어가 적힌 낡은 천 쪼가리 하나만 남긴 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