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5화 (196/497)

Chapter 195 - 195. 금정역 (6)

"지수야! 예린아! 괜찮아?!"

나와 한세아는 넘어진 그녀들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까마귀는 순식간에 하늘의 점으로 변해 사라졌으니 자갈밭에 쓸린 지수와 예린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아야··· 목 아파···. 나는 괜찮은데··· 예린이가."

지수가 뒷목을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날카로운 자갈에 긁힌 상처는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것이 불만족스러운 듯 꼬리를 거칠게 붕붕 휘둘렀다.

"······."

흙먼지투성이가 된 것은 예린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이는 도통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저 가슴팍을 더듬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 쌍의 반지가 걸려 있던 자리였다.

"그, 예린아···?"

한세아가 조심스럽게 예린을 부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여전히 묵묵부답인 예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의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푸른 눈망울에 가득 차오른 물기는 이내 볼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어, 엄마랑 아빠 건데··· 이, 잃어 버리면 안 되는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우는 예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머리가 서서히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조차 잘 보여 주지 않았던 반지를 까마귀가 들고 도망갔다는 사실에 매우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지수에게 듣기로 그 한 쌍의 반지는 부모님의 유품이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예린아! 걱정 하지마! 오빠가 그 까마귀 잡아서 꼭 찾아 줄게!"

나는 황급히 예린을 안아 들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는 일이 나도 단단히 나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만큼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 언니도 약속할게! 응?"

"그러니까 괜찮아, 예린아! 쉬이, 괜찮아 괜찮아."

지수와 한세아도 옆으로 다가와 예린을 조금이나마 안심 시켜 주기 위해 다독여 주었다.

"흑···. 오빠아아···, 언니이이···. 내, 내 반지···. 까마귀가 가, 가져갔어······. 흐에에에엥!"

그제야 예린은 두 팔로 내 목을 껴안으면서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소리가 작았다. 소리 죽여 조용히 우는 법을 배운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까마귀 새끼.'

나는 점점 축축해지는 옷을 느끼며 까마귀를 원망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까마귀는 우리를 죽이지도, 공격하지도 않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도 그럴게, 거대한 새가 이능을 사용해 반지를 훔쳐 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까마귀가 기묘한 파장을 퍼트려 반지를 훔쳐 가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쉽게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것 하나 아니, 둘.

까마귀는 반짝거리는 물체를 모으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까마귀는 새 중에서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흔히들 이야기가 나왔었다는 것까지.

'처음부터 예린이 반지나 지수의 목걸이를 노렸다?'

그러나 마냥 그렇다고 하기에는 처음에 까마귀의 태도나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로 단순히 반짝거리는 금붙이가 목적이었다면 우리와 소통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무 인간들을 끊임없이 유인해 괴롭혔겠지.

그러다가 우리가 목숨을 잃은 순간에 유유히 반지를 챙겨 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아니면 중간에 반지를 보고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이 생각도 아닌 것 같았다. 까마귀는 지수, 한세아, 예린을 스치듯 바라보았을 뿐, 마지막까지 눈동자를 내게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까마귀가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알파벳이 적힌 천 쪼가리. 거기에 실마리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훌쩍···, 오빠. 정말 제 반지 찾아줄 거예요···?"

예린이 딸꾹질을 하며 간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럼! 언제 오빠가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없어요···."

"이번에도 약속 꼭 지킬 테니까 뚝 그치고 움직이자. 까마귀 따라가야지."

그래, 내가 예린에게 반지를 찾으러 가자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다소 빙 돌아가겠지만, 아이 하나 달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렇게 된 이상 까마귀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알아내야 했다. 변종이 된 까마귀가 아무리 지능이 높다고 해도 인간의 언어를 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단순히 반지 도둑이냐.

혹은.

···메시지를 전해주려던 전령이냐.

"감사합니다···크응···."

내 확답에 예린의 퉁퉁 부운 눈가에 일말의 안도감이 스쳤다.

바로 그때.

"현우씨! 지수씨! 이거 봐요!"

한세아가 깃털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웬만한 사람 팔뚝 길이를 넘어선 검은 깃털. 거대 까마귀가 남긴 흔적이었다.

"···킁킁."

지수는 그 깃털을 낚아채더니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확 쳐들면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이 깃털 하나가 아니야. 여기서도 잘 보면 보일 텐데···. 저기 보이네, 깃털이 군데군데 놓여 있잖아."

지수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소중한 동생이 울음을 터트리자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그녀의 귀도 전례없이 바싹 서 있는 상태였으니 지수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일단 깃털 한번 따라가 보자. 세아씨도 동의하시죠?"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의 깃털이 떨어져 있다는 지수의 말에 나는 확신이 점차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새가 탈모도 아니고 움직일 때마다 깃털이 빠지지는 않을 테니까.

만약 탈모가 걸린 새였다면, 우리가 처음 마주한 새는 까마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털 빠진 오골계였겠지.

"네,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예린아, 이제 언니한테 와."

한세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도 지수처럼 만만치 않은 화가 서려 있었다.

절그럭- 절그럭-

이윽고,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깃털을 따라 선로 위를 걸었다.

"···이런 말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꼭 냄새 맡기 좋으라고 깃털 두고 간 것 같네. 기분 탓인가?"

어김없이 바닥 위에 놓인 깃털을 하나 주운 지수가 한 말이었다. 까마귀는 보이지 않았지만 깃털은 남아 있는 모습은 '자신을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봐라'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였다.

"기분 탓이 아닐 수도 있어. 그 까마귀 지능이 있어 보였거든. 우리에게 남기고 간 천에도 알파벳이 적혀 있었고. ···물론, 그 녀석이 영어를 쓴 건 아니겠지만."

"머리 아프다. 까마귀 때문에 위험해지고, 까마귀 때문에 살고, 그놈이 반지 훔쳐 가고. 차라리 그냥 처음부터 콱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지수는 도끼날을 살벌하게 튕기면서 중얼거렸다. 나와 한세아는 말없이 전방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담벼락을 대신하는 수풀, e편한세상 아파트, 그 위에 솟은 거목, 흔들리는 전선줄, 주홍빛을 반사시키는 깨진 유리창.

그리고 커튼처럼 길게 내려앉은 고가도로의 넝쿨 다발.

"···여기를 올라가야 하는 것 같아요. 깃털이 저기 중간 부분에 박혀 있어요."

"하아···."

우리는 고개를 높게 들어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깃털을 바라보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초록색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앞으로 지나갈 예정이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까마귀를 쫓아가기 위해서는 넝쿨을 타고 고가 도로 위로 올라가야만 했으니까.

10m는 가뿐히 넘을 정도로 높은 높이에 있는 안양 고가교.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넘어야 할 다음 고비였다.

"죄, 죄송해요···."

쉴 새 없이 눈치를 살피던 예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를 전했다. 아이는 기가 잔뜩 죽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냐, 넌 잘못 없어.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중에서 예린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적으로 까마귀 잘못이지 않은가.

"세아씨, 밧줄 길이는 충분합니까? 넝쿨 타고 올라가는 건 둘째 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할 수 있게 몸을 묶어두려고요. 그거랑 같이 저기 위로 로프를 걸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길이는 충분할 거예요! 예비 등산용 로프가 한 묶음 더 있거든요. 하나 더 받아두기를 잘했네요. 괜히 무겁다고만 생각했는데."

한세아는 가방을 뒤적거린 후 밧줄이란 밧줄은 전부 꺼냈다. 로프의 길이를 가늠해 보니 밧줄 중간중간에 고리를 만들어 발판 삼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고가 도로 위로 거는 것은 가능해 보였다.

"다들 뒤로 물러나십쇼."

나는 이내 등산 갈고리를 로프에 연결시켰다.

"넵!"

"아저씨, 그거 막 휘두르다가 다치지 마."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지수 너도 뒤로 가 있어."

단단하게 매듭이 져 있는 등산용 갈고리.

붕붕붕붕붕!

츠츠츠츠츠!

나는 그것을 힘차게 돌리며 고가교 위로 있는 힘껏 던졌다.

내가 노리는 것은 고가교 외부에 툭 튀어나와 있는 표지판 파이프. 갈고리가 여러 번 휘감겨 고정된다면 어느 정도의 안전성은 확보 되리라.

다행히 가해진 힘은 충분한지 갈고리는 기둥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그러나.

···테엥!

찌르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에 맞고 튕겨 나온 갈고리.

"어어?! 피해!"

"꺅!"

곧장 지상으로 매섭게 떨어지는 금속 갈고리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기겁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파악!

잘그락!

떨어지면서 가속도가 붙은 갈고리는 살벌하게 자갈을 사방으로 밀어내며 다시 한번 주변으로 튕겼다.

팅구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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