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6화 (197/497)

Chapter 196 - 196. 금정역 (7)

"···아저씨."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나지막하게 부르는 지수.

"아아, 쉿! 처음인데 실수할 수도 있지! 다음엔 확실하게 성공한다 진짜. 이제 감 잡았어."

나는 서둘러 그녀의 입을 막았다. 옆을 보니 한세아와 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들의 말이 머릿속으로 들리는 듯했다.

억울했다.

물론, 처음부터 성공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첫 시도 첫 실패는 조용히 넘어가 주어야 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 아니던가.

"진짜 이번에는 성공한다."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그것들을 억누르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붕붕붕붕-!

재차 휘둘러진 갈고리는,

휘리릭!

타악━!

다행히 성공적으로 쇠 파이프 하나를 휘감아 고정되었다. 아래로 수차례 잡아당겨 보니 단단하게 고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 넷 정도는 거뜬할 듯했다.

"봤지? 내가 성공한다고 했잖아."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잘했어. 어서 올라가기나 하자."

"나 성공했다니까···?"

"알았다고. 잘했다니까? 잔말 말고 남은 밧줄로 몸이나 묶어.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올라가야 할 거 아니야."

"······응."

그녀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몸을 로프로 연결되게 묶었다.

"세아씨, 가방 이리 주세요. 예린이는 오빠한테 안기자."

"네? 하지만···."

한세아는 멈칫하며 망설였다.

"가방 엄청 무겁잖습니까. 적어도 고가교 위로 올라갈 때까지만 제가 들겠습니다. 예린이는 아직 어리니 혼자서 밧줄 타는 것도 무리고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현우씨."

"오빠, 죄송해요."

미안한 눈치인 한세아와 예린을 보며 손사래 쳤다.

"미안할 것 없다니까. 자, 어서 업혀. 아니다, 앞으로 안기는 게 낫겠다."

나는 뒤로는 짐 가방을, 앞으로는 예린을 들었다. 둘 다 밧줄로 나와 꽁꽁 묶어둔 상태. 가방 하나와 사람 하나가 몸에 주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지수 너는 혼자 올라갈 수 있지?"

"당연하지, 나를 뭘로 보고! 그리고 아저씨 혼자 다 부담하게 둘 생각도 없거든? 가방 짐 좀 옮겨 담자. 나도 같이 들어 줄게."

지수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짐 가방에서 내용물을 빼갔다.

부스럭- 부스럭!

그녀가 짐을 빼는 만큼 내가 가해지는 무게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지수가 들고 있는 가방만 하더라도 무게가 상당할 터인데, 불만 없이 부담을 덜어 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고마워."

"서로 돕는 거지, 뭘."

이윽고, 우리는 고가교에서부터 늘어져 출렁거리고 있는 넝쿨망 앞에 섰다. 자기들끼리 서로 뒤엉켜 있는 넝쿨들은 얼핏 유격 훈련에서 보았던 안전 네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진짜 최소한 그것만큼이라도 튼튼해서 안전 했으면 좋겠네.'

나는 일말의 바람을 담아 넝쿨로 된 그물에 한쪽 발을 디뎠다.

출렁··· 꾸욱-

넝쿨 줄기는 살짝 흐느적거리는 감이 있었지만, 표지판 파이프에 고정되어 흔들리는 등산 로프와 함께 붙잡자 목장갑 너머와 신발 밑창 아래로 단단함이 전해져 왔다.

넝쿨 하나로는 모자랐으나 그 사이에 로프를 끼우니 한층 안정감이 더해진 것이다. 밧줄이 엄청나게 굵지는 않았어도 내구성 하나만큼은 좋았다.

꽉- 꽈아악-

가방과 예린에 의해 증가한 체중을 잔뜩 실어도 로프와 넝쿨은 단단하게 고정된 채 버텨주었다. 혹여 중간에 넝쿨이 끊어지는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입자 아끼지 말고 쓰시고, 천천히 따라오십쇼. 속도 맞춰서 올라가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수랑 세아씨가 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어차피 저희 하나로 묶여 있으니까 속도 조절은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거예요. 아마 자연스럽게 뭉쳐서 움직여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속도보다는 안전에 신경 써 주세요, 현우씨."

"알겠습니다."

이윽고, 선두에선 나는 밧줄을 잡고 한 칸 올라갔다.

꾸득··· 꾸드드득······

체중을 완전히 실으니 밧줄과 넝쿨이 조금 더 팽팽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버텨주었다.

···턱! 꽈악-

나는 신중하게 손을 위로 뻗고 밧줄을 잡았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꾸욱- 꾸득··· 꾸욱- 꾹-

몸이 반 정도 올라갔을 때 다시 손을 위로 뻗어 밧줄을 잡고, 넝쿨을 딛고 있는 발을 아래로 밀어 몸을 위로 올리는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내가 위로 올라갈수록 지상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슬쩍 밑을 보니 지수와 한세아도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느새 3m가 넘는 높이에 도달한 탓에 아찔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등산은 나름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가장 큰 복병이라고 생각되었던 돌풍도 불지 않고 있고.

"···힉!"

예린이 숨을 들이키며 나를 한층 더 강하게 안았다. 불안에 떠는 아이의 낮아진 체온이 느껴졌다.

내내 눈을 감고 있다가 방금 살짝 눈을 뜨더라니, 순간 보인 광경에 놀란 모양이다.

"무서우면 계속 눈 감고 있어. 오빠만 잡고 있으면 금방 도착할 거야."

"네에···."

점차 거리가 벌려지며 높이 차에 따른 내 두려움도 커져 갔지만 그것은 내색해서는 안 된다. 나는 힘없이 흔들리는 풀이 아닌 일행을 지지해주는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야 하니까.

바로 그때.

뜨두두둑!

"꺄악!"

넝쿨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세아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크으윽!"

몸을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강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제일 선두에 있던 나였으니 내게 하중이 전부 집중된 것이다. 폐부를 조이는 압박감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휘청-

꾸득··· 꾸득··· 꾸드드득······

순간 가해진 힘에 따라 로프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세아가 다시 몸을 고정시키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도 없고, 밧줄이 중심을 잡는 것도 기다려야 하니 나는 그저 로프만 꽉 움켜잡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버틸 만하다.'

그렇게 고통을 힘겹게 견디고 있을 때.

"혀, 현우씨! 죄송해요! 갑자기 넝쿨이 끊어져서···!"

밑에서 들린 한세아의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전 괜찮습니다···! 세아씨야말로 어디 다치진 않았죠?"

"네, 네!"

"언니는 내가 챙길게, 아저씨! 그러니까 밑에 너무 보지 마!"

나는 지수의 말에 곧장 아래로 항하려던 시선을 재빨리 원위치 시켰다. 이제 절반 넘게 올라온 탓에 밑에 보이는 풍경이 한층 어지럽게 보였던 까닭이었다.

잠깐 사이에 보였던 것은 끊어진 넝쿨에서 뿜어진 체액들이 추락하면서 이리저리 흩어져 분쇄되는 모습이었다.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은 한세아는 덤이었다.

휘이···

큼지막한 액체 덩어리가 허공에서 잘게 나뉘어 찢기는 광경은 나를 한껏 소름 돋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지금 이 순간, 한세아의 옆에 지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그녀이니 다른 사람을 돕기에는 제격이었으니 말이다.

"됐어, 아저씨! 출발해도 돼!"

지수의 신호를 받은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밧줄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중간중간에 심하게 엉켜 풀리지 않는 넝쿨은 우리가 발을 밀어 넣어 숨을 돌릴 수 있게 해주는 튼튼한 발판이었다.

고가교에 다다름에 따라 주변에 보이는 풍경 또한 한차례 달라지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시야가 높아졌다는 표현이 옳았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는 석양, 건물 사이에 높게 솟은 포자 덩어리들, 안양시를 둘러싼 산등성이가 지평선을 채우다가 서서히 머리 위로 다가 오고 있는 콘크리트 다리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윽고.

터억···!

나는 고가교 외벽에 손을 걸칠 수 있었고, 곧장 있는 힘껏 쥔 손아귀로 몸을 강하게 끌어 올렸다.

"끄윽!"

"오빠, 힘내요···! 다 왔어요!"

예린의 응원에 힘입어 마침내 나는 아이 하나, 짐 가방 한 개와 함께 완전히 고가교 도로 위로 몸을 넘길 수 있었다.

탁-

흔들리는 발판이 아닌 단단한 아스팔트가 느껴진다. 힘이 풀린 다리에 의해 몸이 순간 비틀거려 주저앉을 뻔했지만, 아직 마음 놓고 쉴 타이밍은 아니었다.

뒤따라오던 지수와 한세아의 몸도 끌어 올려야 했으니까.

"후우···. 예린아, 기다리고 있어. 지수랑 세아씨 데려올게."

그래도 내가 위로 올라온 이상 여자 두 명이 매달린 밧줄을 잡아당기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지수야! 세아씨! 밧줄 잡아당겨 줄 테니까 조심해서 올라오십쇼!"

"네-헥! 헤엑···."

나는 한껏 팽팽해진 밧줄을 서서히 잡아당겼다.

꾹- 꾸득-

마찰로 인해 목장갑에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지수와 한세아의 올라오는 속도에 힘이 붙는 것이 보였다. 위에서 당겨 주는 사람이 있기에 등반이 수월해진 것이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으아! 올라왔다!"

"오, 헤엑, 올라-헥-왔다···헤엑···."

지수와 한세아도 나처럼 도로 위로 몸을 올릴 수 있었다. 그녀들은 아스팔트 도로를 밟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예린은 잽싸게 물티슈를 꺼내 언니들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푸른 입자를 떠올렸고, 고마움을 느꼈다.

현 사태의 원흉이라고 할 수도 있는 입자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목숨을 이어 나가는 데에 크나큰 도움을 주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내가 푸른 입자를 다룰 수 없었다고 해도 여기를 올라올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강해진 근력이 아니었다면 도중에 힘이 풀려 떨어졌겠지.

넝쿨 발판이 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헤윽···, 현우씨···. 오늘 더 이동하는 건 무리예요···."

기진맥진한 한세아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다.

체력도 한계에 달했고, 어느덧 해가 저문 탓에 주위가 어둠으로 채워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까마귀의 흔적이 산으로 이어져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산의 어둠은 특히나 빨리 찾아오니까.

손전등이 있다고 해도 칠흑같이 어두운 산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이동을 멈추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리라.

"저도 여기서 쉬려고 했습니다. 마침 주변에 위험한 것들은 안 보이고 하니 하룻밤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일 것 같거든요. 예린아, 그 정도는 괜찮지? 까마귀는 내일 해 뜨면 찾아보자."

"네, 괜찮아요···! 어두워지면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까마귀도 어두운 색이니까 밤에는 더 못 찾을 거예요···."

"그래그래."

똑같이 검은색이라 찾기 힘들다, 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름 귀여운 이유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흣차! 아저씨! 이 차 열린다! 여기서 자면 될 것 같은데? 주변에 이상한 소리도 안 들려."

어느새 주변에 방치된 차량을 뒤적거린 지수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눈만큼은 생기가 차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SUV.

나, 예린, 한세아는 지수가 말한 차량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곰팡이 냄새가 폴폴 나는 시트였지만, 시트가 가진 푹신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아···."

피로에 잔뜩 굳은 몸이 눈 깜빡할 새에 노곤노곤하게 변했다. 그래도 딱딱하게 굳은 핏자국들이 언뜻언뜻 보였으니 마음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지만.

언제 어느 때나 마지막에 푸는 방심이 제일 위험한 법이지 않은가.

"지수야, 세아씨. 주변이 너무 탁 트여 있기도 하니 불침번 섭시다. 제가 중간 하겠습니다. 둘이서 초번하고 말번만 정하십쇼."

나는 제일 힘든 중간 번을 자처했다.

"왜? 싫어! 내가 중간번 설 테니까 아저씨랑 세아 언니 둘이 초번, 말번 정해요."

"저도 불···! 불···, 불···?"

예린이 손을 번쩍 들고 입을 열다가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지 입술만 달싹거렸다.

"불침번이라고 해, 예린아."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 웃은 한세아가 예린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맞아요, 불침번! 저도 그거 할 수 있어요!"

"안 돼. 예린이 너는 푹 자야지. 성장기 때 많이 안 자면 키 안 큰다?"

"······! 그, 그건 안 되는데···."

숨을 크게 들이킨 아이의 꼬리가 불쑥 섰다. 불침번은 못 섰으나 대신 꼬리가 섰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아이에게는 아이만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한동안 불침번 순서를 정하느라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초번은 한세아가, 중간은 내가, 말번은 지수가 하기로 정해졌다. 다들 어찌나 고집이 세던지, 의견 굽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으면 좋았지.

그 이후로,

우리는 참치와 닭가슴살 캔으로 저녁을 때웠고.

"잘 자, 아저씨."

"오냐, 너도 잘 자라. 세아씨는 조금만 더 수고해주십쇼."

"저만 믿고 푹 자요. 때가 되면 깨워 드릴게요."

"오빠, 언니들. 안녕히 주무세요!"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나서 곧장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달 또한 우리처럼 눈을 비스듬히 감은 모습이었다.

······.

······.

······.

···사각 ···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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