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7화 (198/497)

Chapter 197 - 197. 수리산 (1)

고요한 안양 고가교.

아스팔트 도로 위에는 산안개가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방치된 차량을 타고 흐르는,

가로등과 표지판의 기둥을 타고 흐르는,

희미하고 뿌연 연기는 일견 드라이 아이스의 무거운 연기가 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잠시, 서서히 산등성이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 탓에 산안개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스르륵 제 존재감을 감추기 시작했다.

물기에 젖어 반짝거리는 유리와 금속 차체 사이에서.

"아저씨, 새벽에 불침번 설 때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그렇다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고, 뭐가 보였으면 진작에 너랑 세아씨 깨웠겠지."

"언니도 못 들었다고 했죠?"

"네···.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정말이에요."

나와 한세아는 지수에게 추궁당하고 있었다. 밤새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상하네."

그녀는 우리가 고개를 젓자 침음을 흘렸다. 지수의 한쪽 귀가 쫑긋거렸다.

"대체 뭐가 들렸길래? 느낌 이상하면 우리 깨우지 그랬어."

적어도 내 귀에 들린 소리는 없었다. 만약 지수가 무슨 소리를 들었다면 그것은 지수라서 들을 수 있었던 거겠지.

그녀는 우리보다 강화된 청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각사각 같은 소리였나? 근데 나도 애매해서 말해 본 거야.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기도 했고, 소리가 났다가 나지 않았다가 그랬거든. ···그냥 피곤해서 잘못 들었나 봐."

"좀 더 쉬다 갈까?"

나는 지수의 눈가를 어루만져 주며 물었다. 살짝 퀭한 느낌이 있는 그녀의 눈가에 손을 대니, 지수가 얼굴을 비벼왔다. 내친김에 귀도 마사지해주니 그녀의 굳은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아냐, 휴식은 충분해. 간단하게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하자. 예린아? 너도 이제 일어나서 씻고 밥 먹어."

팔다리를 쭉쭉 펴며 기지개를 키던 지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으응···. 하으으···"

예린이 눈을 비비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니 몸이 많이 찌뿌둥한 모양이다. 하긴, 누워서 잔 것도 아닌 앉아서 잠을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장 나, 지수, 한세아도 똑같았으니까.

"예린아, 여기 물티슈. 너무 졸리면 언니가 닦아줄까?"

"으음···. ······네."

한세아의 물음에 잠시 고심하던 예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세아는 이내 아이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기 시작했고, 말랑한 아이의 얼굴은 그녀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뭉개졌다.

"어푸! 세아 언니! 자, 잠깐만요!"

"가만히 있어. 너 눈에 얼마나 큰 눈곱이 붙어 있는 줄 알아?"

"으앙!"

나는 평화로운 아침 일상을 보면서 지수가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소리.

나와 한세아는 듣지 못했지만, 지수는 들을 수 있었던 소리.

현재 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고, 그 소리를 내던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동할 때 신중을 한증 더 기해야 할 듯싶었다.

단순히 착각이라고 넘기기에는 위험한 상황을 너무 많이 겪어 왔다. 몸이 좀 더 힘들더라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계를 꾸준히 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특히 산을 올라야 한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 지금 상황.

우리는 산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지수도 착각이라는 말로 넘기기는 했으나 계속 신경 쓰고 있는 눈치였었다. 세상이 변하고 나서 산을 타는 것은 모두가 처음이었으니 신경이 예민해진 까닭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빠르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반지! 꼭 되찾고 말 거예요!"

연어 캔 하나로 어느새 기운을 차린 예린이 다부지게 외쳤다. 아이의 눈에는 힘찬 의지가 불타 오르고 있었다.

"그래, 언니도 도와줄게. 까마귀 잡아서 혼내주자."

한세아는 그런 아이가 귀여운 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와 지수도 피식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예린이 푸른 눈망울을 반짝거리면서 대답하는 것을 끝으로, 우리는 고가교 아스팔트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면서 눈부신 햇빛이 밝히고 있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주변도 밝아지고, 내가 있는 위치가 높은 곳에 있는 덕분에 생각보다 멀리까지 보였다.

그렇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처참하게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건물들, 거대한 무언가가 솟구친 듯 엉망으로 헤집어진 골목길, 하단부를 전부 내보이는 차량들, 좀 더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포자 덩어리들.

어제 있었던 일의 여파인지 한층 더 음산하고 을씨년스럽게 변한 도시의 모습이었다.

인기척이 현재 우리를 제외하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수백 수천의 나무 인간들이 다시금 숨을 죽이고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있기에 괴리감은 한층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속으로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거리가 살짝 벌어진 지수, 예린, 한세아에게 얼른 따라 붙었다.

찌직- 뜨둑-

도로 위에 잔뜩 깔려 있는 넝쿨들이 짓밟히며 투명한 점액을 토해낸다.

고가교는 넝쿨로 완전히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안개의 물기가 채 사라지지 않아 햇빛을 반사시키는 넝쿨, 차량의 깨진 유리 창문을 넘어가 시트를 깊숙이 파고든 넝쿨, 간혹 날카로운 차체나 유리에 베이면서 뿜어진 체액으로 금속을 부식시키는 넝쿨.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자라 있는 넝쿨들이 전방에 있는 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넝쿨이 이리도 길게 뻗어 있었던 덕분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그것들을 발판 삼아 고가교 위로 올라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위로 올라갈 엄두도 못 냈겠지.

그리고 아마도 까마귀가 살고 있거나, 녀석이 우리를 유인하는 장소인 산의 이름은,

바로 수리산이었다.

"아저씨! 여기 또 그 까마귀 깃털 있다."

지수가 쪼르르 달려가 넝쿨 사이에 놓여 있는 검은 깃털을 줍고 돌아왔다. 깃털 또한 마찬가지로 물기가 묻어 있었다.

"산으로 가야 하는 건 확실하네요. 아, 그리고 제가 불침번 서면서 까마귀가 두고 간 천을 좀 살펴 봤거든요?"

한세아는 주머니에서 천 쪼가리 하나를 꺼냈다. 'SOO'이라고 적힌 천. 뒤 두 글자가 부리에 찍혀 사라진 모습은 이제 우습지도 않았다.

"이거 SOS같지 않아요? S로 시작해서 세 글자로 끝나는 건 그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X로 끝나는 건 말도 안 되고···."

SOS.

간단히 말해서 구조 신호였다.

'녀석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라고···?'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까마귀의 행동은 일관성이 있기는 했다. 우리를 해치려고 한 것이 아닌 오히려 살리려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비록 반지는 훔쳐갔지만.'

그러나 반지를 훔쳐 간 행동조차도 약간 최후의 수단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이 가져온 천은 의도치 않게 부리에 구멍이 뚫렸지, 나는 까마귀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 멍한 표정을 하고 있지,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드는 답답함에 이판사판으로 움직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한세아의 추측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럼 구조신호라고 치고, 수리산에 뭐가 있나? 솔직히 나는 산에 누가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아니, 그렇잖아? 산에 나무 인간들이나 변종들이 있기라도 한다면 숨을 곳이 없는 게 산 아니야? 거목 기둥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게 끝 아닌가?"

지수는 천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의문을 표했다.

"음···. 숨을 곳이야 그냥 땅굴이라도 파면 되지 않을까? 근데 숨어 산다고 해도 산에는 먹을 게 없을 것 같긴 하다."

나는 지수의 말에 반박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산에서 산다는 건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물며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해진 세상이지 않은가.

자연인이라고 해도 지금 산에서 살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 이 천은 대체 뭘까요···?"

"······글쎄요. 까마귀를 찾기 전까지는 뭐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네요."

단순히 해프닝이라고 치고 넘어가기에는 까마귀의 의도가 너무나 뚜렷했다. 우리는 지금도 도로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깃털을 주우면서 이동하는 중이었으니.

"일단 계속 가자. 슬슬 산 경계선에 진입한 것 같으니까."

나, 예린, 한세아는 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서울외곽순환도로의 양측에는 산의 초입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고속도로답게 넉넉한 차선을 자랑하는 도로에는 어느 때와 같이 다양한 차량들이 방치되어 부식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차량 밑에 숨어 있는 나무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금속 차체가 날카롭게 뜯긴 자국과 놈들의 흔적인 나무 껍질 따위는 있었으나 움직이고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귀를 쫑긋거리는 지수도 별말하지 않고 있으니 당분간은 안심하고 걸어도 될 듯했다.

그리고.

군포

산본↗150m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지나는 것과 동시에,

바스락- 바스락-

수분기가 하나도 없는 낙엽들이 넝쿨 위를 덮기 시작했다.

아직 낙엽이 잔뜩 질 시기는 아니건만. 층층이 쌓여 있는 마른 나뭇잎들이 아스팔트 도로 위를 메우고 있던 것이었다.

주변에 나무야 워낙 많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떨어진 나뭇잎들의 양이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단순히 낙엽에 불과할 뿐인지라 뭘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짙은 초록색을 자랑하는 넝쿨과 이름 모를 나무들뿐이었으니까.

문득 지수와 예린을 만났던 모텔에서도 마른 나뭇잎들이 잔뜩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행동했었지.'

살아 있는 인간과 나무 인간들이 구분이 가지 않던 시기였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녀들 덕분이었고.

바스락- 바스락-

계속 꾸준하게 걷다 보니 다음 표지판 아니, 안내판이 나왔다.

수리 터널

Suri Tunnel

500m 앞

터널길이 1882m

전방에 터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터널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겠죠?"

지하 수로의 악몽을 떠올린 한세아가 몸서리를 쳤다. 어둠만이 가득한 터널을 통과하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 나, 지수, 예린도 질색이었다.

우리는 심장을 떨리게 하는 걱정을 한아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걱정을 한 움큼 덜 수 있었다.

폭삭 주저앉아 닫힌 구멍,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 앞을 굴러다니는 콘크리트 덩어리,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 틈을 메운 나뭇잎.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전방에 있다는 수리 터널이 무너져 꽉 막힌 상태였던 것이다.

아마도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토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진 것 같았다.

"다른 길은··· 없고. 그럼 무너진 터널 위를 지나가야 하나?"

지수가 사방을 빙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까악- 까악-]

까마귀 울음소리와 함께 녀석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터널 앞에 도달하자마자 불쑥 튀어나오는 모습은 마치 까마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 느낌이 맞다면 저 까마귀는 새벽부터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찌 되었든 기가 차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역시 아무리 봐도 따라오라는 것 같죠?"

나는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는 까마귀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쁜 새···! 오빠랑 언니가 혼내줄 거야···!"

옆을 보니 예린이 주먹을 불끈 쥐고 녀석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꼬리를 일자로 곧게 세우고, 입도 앙다문 걸 보니 까마귀를 보자마자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른 모양이다.

"···그러게. 저놈 저거 날아다니면서 우리 주시하는 걸 보니까 아저씨 말이 맞는 것 같아."

"하아, 그럼 다들 얇은 겉옷이라도 입어요. 조금 더워도 나뭇가지에 찔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이윽고, 최소한의 방비를 한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밟고 한 칸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등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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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예린이가 성인이 되면 러프의 키처럼 크지 않을까 싶어요.

제 요청에 의해 축소된 예린이... 아직 키 크려면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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