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198화 (199/497)

Chapter 198 - 198. 수리산 (2)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멀리 보이는 까마귀를 따라 산길을 걷는 중이었다. 녀석은 우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간혹 시선을 우리 쪽으로 보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라도 알면 답답함이 조금 덜 할 텐데, 까마귀가 인도하는 대로만 이동하다 보니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부스럭! 바스락!

층층이 쌓인 마른 나뭇잎들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운다. 초입부터 낙엽들이 많긴 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처음에 보았던 양은 약과였다는 듯 그 수를 더해 가고 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지지직!

"으앗!"

씩씩하게 발걸음을 내딛던 예린이 순간 높은 경사를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려고 했다.

"조심!"

나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아이를 붙잡았다. 내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예린이 뒤로 크게 넘어질 뻔했다.

후두둑- 투투둑-

투둑- 툭-

아이 대신 뒤로 확 밀려난 흙알맹이들이 마른 낙엽 위를 두드리며 내려간다.

"예린아, 괜찮니?"

살짝 뒤처져 있던 한세아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아이에게 상태를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볼에 찰싹 달라붙은 적색 머리카락은 한세아가 지친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네에···. 죄송해요."

"죄송할게 뭐가 있어? 이쯤 해서 조금 쉬자. 언니도 힘들어 보이고,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잖아.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기가 죽은 예린의 귀를 주물러 펴준 지수가 나와 한세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급하게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까마귀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시 되기 전까지는 체력을 온존하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다.

"그래, 그러자."

"흐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은 흙 위에 깔린 낙엽을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다들 상당히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이었다면 마른 나뭇잎 아래에는 온갖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을 테지만, 세상이 바뀌고 나서는 날벌레조차 본 적이 없으니 안심하고 앉아도 될 듯했다.

부스럭!

그리 생각한 나도 그녀들을 따라 바닥에 앉았다. 잔뜩 깔린 나뭇잎들의 숨이 우리의 무게에 의해 확 죽는다.

"다들 당 보충해요. 등산하면 초코파이지만 그건 없으니 대신 초코바로. 근데 이것도 별로 안 남았네요. 조금 더 챙겨올 걸 그랬나···."

한세아는 가방에서 초코바 4개를 꺼내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나중에 또 구하면 되죠, 언니. 먹을 건 걱정하지 마요. 모자라면 저랑 아저씨가 구해 올게요."

"어? 저는 왜 빼요, 지수씨? 저도 한몫할 수 있거든요?"

지수와 한세아는 대화를 나누면서 예린을 챙겨 주었다. 그녀들이 챙기지 않아도 예린은 이미 입에 초코바를 한가득 넣은 상태였지만.

"마시따···."

예린은 눈을 반짝이면서 입을 오물거렸다. 기운을 잃었던 아이의 꼬리가 기세를 되찾기 시작했다.

휘이이···

부스스- 부스스-

나는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쑤시개처럼 서 있는 잡목들.

산에 있는 나무들은 보통 소나무나 밤나무, 혹은 상수리 나무들로 구성되어 있을 텐데, 현재 보이는 나무들은 무슨 나무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몸체가 두껍고 길어져서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닌 건 확실했다. 나무 한 그루에 여러 가지 종이 섞인 모습이었으니까.

마치 억지로 접목을 시킨 듯한 외형이었기에 이름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싱그러운 초록빛.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에서 돋은 나뭇잎들은 쉴 새 없이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탐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무 아래는 맑은 하늘과 대비될 정도로 어두움을 자랑했다. 숲속이라는 점과 그림자가 잔뜩 졌다는 점은 공기를 쌀쌀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0.16km 관모봉

←2.31km 안양시 현충탑 / 태을봉 0.58km→

국가지점번호

다da사sa

4841

3099

국민안전처 긴급전화 119

완전히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는 방향 표지판.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등산로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등산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길이었다.

보통 등산로는 단순한 흙길을 넘어서 수월한 이동을 위한 나무판자가 설치되어 있지 않던가.

나무들이 이리저리 꺾여 있고, 이곳에 맞지 않는 표지판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

아마도 급변하는 기상과 지속해서 지각을 울리는 지진의 영향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다. 게다가 예고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나무뿌리도 한몫했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인간의 편의성을 위한 설치물들이 전부 제 기능을 상실할 리가 없었다.

그 탓에 현재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방향은 아이러니하게도 까마귀가 인도하는 방향뿐이었고.

그저 마음 가는대로 이동했다가는 체력은 체력대로 소모되고 목적은 하나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움직이는 이정표인 까마귀는 우리가 쉬는 걸 보더니 굵은 나뭇가지에 앉아 자신도 쉬는 중이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다시 이동을 시작하면 녀석도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방향을 알려줄 듯했다.

"···여기도 개미가 한 마리도 안 보이네요. 산이면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한세아가 짧은 나뭇가지로 낙엽을 뒤적거리면서 불쑥 말했다.

"세아씨, 혹시 벌레들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기억하십니까?"

나는 이참에 궁금한 점을 그녀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 묻기에는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아예 물어보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음···. 나무 인간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였을걸요?"

"맞을 거예요, 언니. 도로에 죽은 벌레들이 엄청 많이 깔린 게 아직도 기억나거든요."

"···죽은 벌레들이 많았다고?"

"그렇다니까. 살충제를 뿌린 것도 아닌데 그냥 다 죽어 가던데? 이상한 현상이긴 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나 살기도 바빠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지. 그까짓 벌레 죽은 게 대수겠어? 그 옆에는 사람 죽은 것도 막 널려 있었는데?"

지수는 당시의 광경을 회상했는지 꼬리털을 곤두세웠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도로는 금방 깨끗해졌어. 넝쿨이 먹어치운 걸 청소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그냥 모기도 없고, 바퀴벌레도 없고, 파리도 없고, 이상한 날파리도 없고 해서 한숨 돌릴 수 있었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병 걸린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을걸?"

지수의 말처럼 벌레들은 병균을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한다.

몸조차 마음껏 씻지 못하고, 의약품이 풍부하지도 않게 된 세상에서 해충, 익충 가리지 않고 벌레들이 전부 죽은 것은 일견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백한 이상 현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본래라면 과거보다 기세를 더욱 부풀렸을 곤충들. 그것들을 몰살 시킨 요인이 벌레를 넘어서 인간을 노리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으니까.

'아니, 이미 노린 후의 결과가 지금인가?'

가장 곤충에 가까운 외형을 한 것은 예전에 보았던 거미 변종. 하지만 그것 또한 거미와 나무 인간들이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둘 다 곤충이 아닌 동물이었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움직입시다."

속으로 한숨을 쉰 나는 지수, 예린, 한세아를 일으켰다. 휴식은 잠깐이면 충분했다. 여기서 더 쉬는 것은 체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닌 역으로 몸을 더 무겁게 만들고 말 것이다.

이윽고.

"알았어, 아저씨. ···응? 예린아, 너 바지 좀 털어야겠다."

"예린이 바지에 흙이 엄청 묻었네. 아하핫-!"

"으앙! ······이제 없어요?"

"어. 이제 없다. 그만 털어도 돼."

얼추 기력을 회복한 우리는 가파른 경사가 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까악- 까아악-]

꾸벅꾸벅 졸고 있던 까마귀는 고개를 휘휘 털며 정신을 차렸고, 이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러다가 정들겠어요."

멍하니 까마귀를 바라보던 한세아가 투덜거렸다.

"혼내줄거야혼내줄거야혼내줄거야혼내줄거야······."

그녀의 손을 꽉 붙들고 있는 예린은 무어라 계속 웅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지수는 제대로 들었는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예린이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하하. 세아 언니랑 조금 떨어트려 놔야 하나?"

나와 눈이 마주친 지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귀 한쪽만 쫑긋거렸다.

"무슨 의미야?"

"모르면 됐어! 그보다 아저씨, 벌레들이 안 보이는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

"제까짓 벌레들이 나와 봤자 뭘 할 수 있겠어? 방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도 꽤 강해졌잖아? 이거 봐. 힘이 이렇게 세졌다니까?"

지수는 짐짓 자신만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내 산길옆에 있는 거목을 도끼로 퍽퍽 쳤다.

빠악-!

부스스···

기둥을 친 도끼날에 의해 나뭇잎들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우지끈!

쿵! 드드드득!

두터운 나무 기둥이 덩치에 맞지 않게 맥없이 뒤로 넘어가며 속살을 내보였다. 반으로 꺾인 기둥은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며 굴러떨어졌다.

"······."

"······"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바짝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일으킨 지수는 도끼와 맹렬한 기세로 굴러가는 중인 나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지수에게 한 소리 하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말의 방향을 바꿔 중얼거렸다.

문득 시야에 들어온 나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나무가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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