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02화 (203/497)

Chapter 202 - 202. 수리산의 아이들 (2)

병목안캠핑장 관리사무소 안.

"우선 사과부터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까악이가 반지 훔쳐 간거랑 여기까지 오게 하신 거 전부 죄송해요."

마른 남자는 아이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멋도 모르고 뒤따라 들어온 까마귀도 남자의 손길에 의해 고개가 푹 숙여졌다.

푸드덕!

[까악-]

날갯짓으로 반항 하려던 녀석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내 반항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예린아, 그렇다는데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한세아로부터 벗어나 내 손을 꼭 붙잡은 예린에게 물었다. 나, 지수, 한세아는 산을 타서 조금 힘들었을 뿐, 예린은 반지를 잃어 버린 탓에 마음고생까지 심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내가 나서서 남자와 까마귀를 사과를 받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

까마귀를 찌릿 노려보는 예린.

"······받아줄게요, 사과. 그러니까 다시는 그러면 안 돼! 알겠어? 한 번 더 그러면 진짜 나쁜 새야···!"

아이는 이내 표정을 풀고 까마귀에게 훈계를 날렸다. 예린은 그때만 생각하면 열불이 난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깍-]

녀석은 풀린 예린의 얼굴을 보고 작게 울음을 내뱉었다. 외마디 소리라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게 생각하면 사과 받아줘서 고맙다는 뜻이겠지.

"하아···, 다행이에요. 아! 저는 김청수라고 해요. 여기 아이들은 차례대로 박채연, 박수린, 김대현, 최민수라고 하고요. 얘들아, 사람 만나면 내가 뭐라고 했지? 인사 해야지."

그나마 일이 더 꼬이지 않고 풀려서 다행이라는 듯한숨을 작게 내쉰 김청수. 그는 자기 이름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아이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김청수의 뒤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은 쭈뼛쭈뼛 눈치를 보면서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박채연이에요!"

살짝 갈색이 맴도는 머리카락과 날개를 가진 아이.

뱁새였다.

"······박수린이에요."

흰색 머리카락과 검은 줄무늬 날개를 가진 아이.

뱁새···였다.

색의 차이가 있을 뿐, 성이 같고 외형이 비슷한 걸 보니 둘은 자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박수린이라고 소개한 여자아이는 우리와 처음 조우했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어서.

"김대현! 청수형 동생입니다!"

"난 최민수!"

씩씩하게 외치는 다람쥐와 청솔모를 끝으로 자기소개 시간은 끝났다. 둘도 얼핏 비슷하게 보이긴 했지만 두툼한 꼬리의 털의 길이와 두께가 확연하게 차이가 났으니 다른 종이 맞을 듯했다. 그리고 김대현이라는 아이 또한 우리와 마주쳤던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어······."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뜬금없이 시작된 자기소개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서로를 소개하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건만, 세상이 이리 바뀌고 나서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오랜만인 까닭이었다.

겉으로는 호의를, 속으로는 악의를 품고 있나 의심도 해 보았으나, 그런 경우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지수의 말처럼 이곳에서는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고, 우리를 바라보는 김청수와 아이들의 눈에는 살짝의 경계심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을 뿐 흑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

나는 지수와 한세아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저는 이현우라고 합니다."

"···김지수."

"한세아예요."

"최예린이에요!"

나를 필두로 일행이 각자 이름을 말했다. 단순히 이름만 말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우리측 소개는 순식간에 끝났다. 아이들은 그런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아! 말 편하게 하세요! 예린이라는 아이 빼고 저보다 다 연장자이신 것 같은데, 맞을까요? 저 18살이거든요."

18살.

아직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 하는 나이.

캠프에서 나름 최고 연장자로 보였던 김청수가 고작 18살에 불과하다는 소리에 침음이 절로 나왔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상보다 더 어린 나이였기에 그런 것이었다. 우리의 생각이 맞다면 김청수 혼자 아이 넷을 챙기고 있었다는 말이 되니까.

"······그래, 그럼 말 편하게 할게."

짐짓 너스레를 떤 김청수가 무안하지 않게 나는 곧바로 말을 놓았다. 내가 말을 놓자, 그는 얼굴 한 켠에 있던 불편함을 지웠다. 우리가 존댓말을 하는 것이 내심 불편했던 모양이다.

"네, 형! 뭐가 궁금하신데요?"

"혹시 다른 어른들은 없어? 왜 너희만 여기 남아 있는 거야?"

"······."

뭐든 물어보라는 태도를 취했던 김청수는 이어지는 내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들의 몸이 덜컥하고 굳은 것은 덤이었다.

그런 모습에 첫 물음부터 잘못 고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물어봐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순서의 차이만 있었을 뿐.

"먹을 걸 구하러 나가셨어요. 아마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아니, 무조건 돌아오실 거예요."

김청수는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들은 그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그래, 어른이 없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워서 보이지 않은 거겠지.

나는 애써 그리 생각하며 내심 안도했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그럼 이 천에 구조 신호는 왜 적은 거니?"

한세아가 천을 내밀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리고 나도 무심코 외면하려고 했던 숨겨진 진실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제가 썼다가 필요가 없어져서 버린 거예요. 바닥에 버린 걸 까악이가 주웠고 그게 형, 누나들한테 간 거죠."

"그렇구나. 부모님들이 언제 나가셨는지 물어봐도 될까?"

"글쎄요, 조금 됐어요. 이제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오셔야만 하는데 아직 안 오셨네요. 그래도 아까 말했듯이 금방 오실 거예요."

"······지금 바깥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는 있어?"

불쑥 치고 들어온 지수의 물음에 김청수는 재차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이내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배고프지? 나가서 열매들 먼저 먹고 있어. 나는 이 분들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아."

"오빠는···? 오빠는 안 먹어?"

"어, 괜찮아. 너희끼리 다 먹어. 아, 그리고 수린이랑 대현이 너희 또 멋대로 나가면 그때는 진짜 혼난다. 알았어?"

"···네에."

이구동성으로 답하는 아이들은 묘하게 기가 죽은 채로 열매를 한아름 들고 나갔다. 꼭 우리가 겁박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에 가슴이 쿡쿡 찔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형, 누나들.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애들 앞에서는 부모님 관련해서 말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김청수는 매우 피곤해진 기색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의 겉모습은 우리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물기를 짜기는 했지만, 여전히 젖어 있었으니 말이다.

"저희는 아직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나간 지 얼마나 되었냐, 라···. 어림잡아도 2개월? 3개월은 그냥 넘은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바깥 상황은 제가 묻고 싶어요. 저랑 아이들은 여기서 나간 적이 없어서 자세한 건 모르거든요."

그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자, 속에 꾹꾹 담아두었던 말들을 하나씩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나씩 말이 이어질 수록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론은 그거였다.

캠프에 놀러 온 가족들이 사태에 휘말려 수리산에 고립되었다가 부족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지만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외부로 나간 부모님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

나는 넓게 잡아도 7평이 채 되지 않은 관리사무소 안을 훑어보았다.

물이 반 정도 차 있는 정수기, 딱딱한 타일, 난방이 되지 않는 벽, 사방으로 뚫린 유리창문, 구석을 차지한 불이 꺼진 냉장고, 목재 선반에 놓인 각종 캠핑 도구들.

그리고 일렬로 쭉 깔린 침낭들.

이곳까지 오면서 멀쩡한 건물들은 이 관리사무소와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뿐이었으니 여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분명하리라.

생활감과 손때가 묻어 있는 공간인 것도 그러한 추론에 확신을 더해주고 있었다.

다만.

"식량···. 그래, 청수야.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했었지? 그럼 너희 뭘 먹고 버틴 거야? 열매도 무한정 주울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가장 중요한 식량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이들이 들고 나간 열매들이 마지막 식량인 것처럼 보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김청수와 아이들이 유독 말라 보이는 이유는 부족한 식량이 직접적인 원인이겠지.

"그냥··· 방금 애들이 주워 온 열매나 먹고 버텼어요. 처음에는 좀 힘들었는데 몸이 적응을 하는 건지 적게 먹어도 나중에는 버틸만 해지더라고요."

"······다른 건? 여기 계곡도 있는 것 같던데, 잡기는 힘들겠지만 물고기 같은 것들도 있잖아."

"아, 계곡이 있기는 한데 거기서는 물도 마실 생각도 하면 안 돼요. 어느 순간부터 물이 이상하게 변했거든요. 그래서 식수로는 못 쓰지만 빨래할 때만 간간이 사용하는 중이예요. 애초에 물고기도 다 사라진 지 오래고요."

"하아···."

약수터 물도 변했으니 계곡 물이 변하는 것도 이상한 현상은 아니었다.

식수도 충분치 않다.

식량도 충분치 않다.

암울한 상황에서 김청수는 아이들과 함께 몇 개월을 버텨 낸 것이다.

아마 자신도 알고 있을, 돌아오지 않을 부모님들을 하루하루 기다리면서.

그리고 산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고 추정되지 않았던가.

벌레가 남긴 흔적인 식흔의 존재는 변종 벌레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당장은 바깥보다 위험이 덜 할지는 몰라도 그게 언제까지 유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청수야, 여기서━"

나는 의왕시 캠프를 떠올리며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

벌컥!

아이들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가하는 불안감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형! 비 올 거 같아! 빨리 나와. 빨리!"

그러나 다행히 우리가 예상했던 일은 아니었기에 안도할 수 있었다. 단순히 곧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킁킁-

"···진짜네. 갑자기 수분기가 확 느껴진다."

문이 열린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맡던 지수가 코를 킁킁 거리더니 말했다. 그녀의 꼬리는 어느새 털이 눅눅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쏴아아아아아아아-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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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러프 거의 최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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