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03화 (204/497)

Chapter 203 - 203. 수리산의 아이들 (3)

쏴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들이닥친 장대비에 김청수는 대화의 끝을 알렸다.

"여기서 쉬고 계세요! 전 빗물 받으러 가야 해서요!"

그는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관리사무소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까악-]

사람 사는 건물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 기어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까마귀마저도 종종걸음으로 나가 빗줄기 사이로 사라졌다.

"···우리도 나가서 도와주는 게 어때요?"

한세아가 사무소 한쪽에 짐 가방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나갈 준비가 만반이었다.

캠핑장 사람들을 본 것은 잠시뿐이었지만, 그들이 왜 저렇게 급하게 행동하는지 알 것 같았다. 푸른 조각도, 이능도 없는 그들이기에 마실 수 있는 식수가 빗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럽시다. 얼른 나가서 도와주죠."

나는 한세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대화가 끊겼지만 이야기야 나중에 이어서 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여기 앉아만 있는 것도 모양이 이상하고, 무엇보다 기껏해야 초등학생이 겨우 되었을 아이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마음도 불편한 참이었다.

단순히 빗물받이에 물을 받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더라도 말이다.

그리 어려운 작업도 아니니 나가서 한 손 거들어 우리 일행과 캠핑장 아이들의 사이에 자리 잡은 경계심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것이 좋은 판단이지 않겠는가.

"예린아, 너는 여기 있을래?"

지수는 혹여 예린이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되어 물었으나,

"아니! 나도 나갈래!"

예린은 단호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너 몸 안 좋아지면 바로 여기 들어와서 옷 갈아입고 쉬어야 한다?"

"알았어, 언니!"

이윽고, 우리도 김청수와 아이들을 따라 관리사무소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아-

외부로 나오니 한층 더 강해진 빗소리.

조용했던 캠핑장에 거센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두둑-

무성하게 핀 나뭇잎과 가지를 타고 빗물이 끝도 없이 떨어진다. 빗방울이 워낙 굵은 터라 얼핏 보면 방울이 아닌 물줄기로 오해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듯했다.

퐁- 투둑-

콸콸콸콸······

그렇게 떨어진 빗방울들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흐르기 시작한 물살에 미약한 파문을 만들어내었다. 그것도 잠시, 파문이 멀리 퍼지기도 전에 점점 빨라지는 물살이 잡아먹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대현아! 민수랑 같이 차고 가서 통 다 꺼내와! 할 수 있지? 항상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알았어, 형! 금방 가져올게!"

"채연이랑 수린이는 방수포 줄 잡아당겨서 나무에 고정시켜 줘!"

"네!"

흐르는 빗물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캠핑장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기껏 세운 꼬리깃이 엉망으로 변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고, 곧장 아이들을 향해 움직였다. 굵은 빗줄기가 우리 몸을 인정사정 없이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도 도와줄게!"

"네?! 하지만···. 아니다, 저보다는 애들 좀 도와주세요! 저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김청수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리를 숙이며 부탁해 왔다.

"지수는 나랑 가고, 세아씨는 예린이랑 그 남자애들 도와주십쇼!"

나는 그녀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후둑- 후두두둑-

나무, 도로, 지붕, 철판, 방수포를 두드리는 빗소리의 기세가 말소리를 잡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가자, 예린아!"

"네!"

한세아와 예린은 빗줄기를 뚫으면서 곧장 남자아이들을 따라 이동했다. 굵다 못해 두꺼운 빗줄기는 그녀들의 모습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만큼 시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와 지수도 옆에 있는 숲속으로 사라진 여자아이들을 서둘러 쫓았다. 비록 아이들이 숲에서 지내는 것이 익숙해졌다고 해도, 이런 폭우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니 빨리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찰박! 찰박! 찰박!

아스팔트 도로와 산길에 형성된 물살을 밟을 때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튀지도 못했다.

쏴아아아아아-

하늘에서 지상을 억누르는 듯 쏟아지는 비가 빗소리만 남기고 주변의 모든 소리들과 함께 더 거세진 물살로 휩쓸었으니까. 그 탓에 우리가 만들어 내는 파문은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한 달음에 박채연과 박수린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이익···! 이거 왜 안 되는 거야···!"

"나랑 같이 해! 하나, 둘 하면 동시에 잡아당기는 거야! 하나, 둘···!"

여자아이들이 단단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밧줄을 아래로 잡아당기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방수포 구석에 연결된 4개의 밧줄 중 3개는 이미 아래로 당겨진 상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머지 하나였다.

넓게 펼쳐진 방수포에 모이는 빗물의 양이 상상 이상이라 무게가 엄청 무거워졌고, 그 탓에 아이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나마 3개마저도 까마귀가 도와줘서 고정시킬 수 있었던 것 같고.

바로 그때.

첨벙-!

"아야!"

"악!"

안간힘을 쓰던 아이들이 밧줄을 놓치는 것과 동시에 뒤로 확 넘어져 엉덩방아를 크게 찧었다.

"히잉···."

넘어진 충격에 순간 아이들의 눈에 눈물이 핑 돌고 입꼬리가 축 처졌지만, 이내 눈가를 거칠게 닦으며 다시 한번 밧줄을 잡았다. 로프가 바닥에 고정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다.

"얘들아! 이제 우리가 할 테니까 물러나 있어!"

이대로 두었다가는 크게 다칠까 싶어 나와 지수는 박채연과 박수린의 행동을 황급히 중지시켰다.

"힉!"

"꺅!"

우리의 손이 어깨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비가 오기 전까지는 그나마 옷의 넉넉한 품이 체구를 숨겨 주고 있었으나, 이제 물을 잔뜩 머금게 된 옷은 아래로 축 늘어져 깡 마른 체구를 그대로 드러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빗물이 살짝 옴폭한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모습은 아이들을 한층 더 안쓰럽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나와 지수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겠지만, 그것이 어찌 아이들만 하겠는가. 우린 적어도 배를 심하게 곯지는 않았다.

"그···!"

"괜찮아! 도와줄게! 이것만 잡아서 밑에 뿌리에 고정하면 되지?"

"······네! 맞아요!"

뱁새인 박수린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가 이어진 내 말을 듣고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탁!

나는 아이에게 밧줄을 건네받았다. 밧줄이 걸린 나무 아래쪽을 보니 후크가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잡아당긴 로프를 두꺼운 뿌리에 설치된 후크에 연결시키면 될 듯했다.

"흐읍!"

나는 있는 힘껏 꽉 붙잡은 밧줄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끄드드득···

젖은 밧줄과 젖은 나뭇가지가 서로 비벼지며 비명을 지른다.

출렁- 촤르르르륵-

크게 들어 올려진 방수포는 꿀렁이며 담고 있던 물을 한차례 토해냈다. 쏟아진 물은 비탈길을 타고 흐르는 흙탕물과 하나가 되었다.

"아저씨! 그대로 잡아당기고 있어! 내가 고리에 밧줄 끼울게!"

넘어진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지수가 어느덧 후크와 서로 맞닿고 있는 밧줄을 잡았다. 나는 그녀가 매듭을 묶기 편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조금 더 힘을 썼다.

끄드득-!

나야 근력이 강한 편이니 이 정도는 수월하다. 그러나 들어가는 힘을 보아하니 아이들의 힘으로는 밧줄을 잡은 게 한계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와 지수가 말리지 않았다면 실수로 놓친 로프에 크게 다치고 말았겠지.

-찰칵!

"됐다! 아저씨! 이제 놔도 돼!"

혹시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내 다리를 탁지는 것으로 신호를 준 지수. 나는 즉시 손에 힘을 풀고 밧줄을 놓았다.

후두두둑- 후두둑- 투툭-

반동으로 포에 붙어 있던 물방울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제 방수포의 사각은 전부 들어 올려져 쏟아지는 비가 한가운데로 안정적으로 모일 수 있게 되었다. 빠져나가는 물이 없으니 방수포는 점점 오목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방수포의 크기도 상당했기 때문에 고이는 물의 양이 꽤 많았다. 물이 흘러 넘치게 될 때쯤에는 한동안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식수가 모이게 되리라.

그 순간.

쏴아아······

정신없이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

"뭐야."

나뭇잎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면서 나와 지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껏 작업을 끝냈더니 비가 그쳐 버린 것이다.

소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린 것도 아니었건만.

"···그냥 소나기였나 봐, 아저씨."

"하···."

뭔가 허탈했다. 비 맞은 생쥐 꼴로 서 있으니 허탈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흘깃 방수포를 보니 빗물이 예상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삼분지일 정도만 차오른 것이 보였다.

양은 꽤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컸다.

'···아니, 잠깐만.'

굳이 빗물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오기 전까지는 빗물이 유일한 식수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온 이상 옆에 계곡물이나 약수터 물을 마셔도 되지 않은가.

물론, 푸른 불로 정화를 마치고 한번 끓여 마셔야 하겠지만 그런 과정들 전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말이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허탈감이 찾아왔다.

옷과 꼬리의 물기를 짜내던 지수도 나와 같은 생각에 도달한 듯 행동을 멈추고 입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나도 그렇고.

그래, 3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경우는 조금 다를지라도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에게 행동이 휩쓸렸으니 얼추 비슷한 상황이기는 했다.

게다가 우리의 말을 다짜고짜 믿어 줄 지도 미지수였으니 결국 아이들을 돕는 것은 변하지 않았겠지.

좋게 좋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저기···! 혀, 현우 오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빗물에 푹 젖은 뱁새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흰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박수린. 아이는 품에 고이 숨겨 놓았던 연한 갈색을 띠는 도토리 비슷한 열매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주위를 보니 나뿐만이 아닌 지수, 예린, 한세아도 다른 아이들에게 도토리나 밤 따위의 열매를 받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 빗물을 통에 받는, 별것 아닌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해 나서준 것이 고마웠는지 캠핑장의 아이들 나름의 감사 인사인 모양이다.

아이들이 내민 것을 단순한 열매로 치부해서는 안 되었다. 현재 가장 모자란 식량을 도와 준 사람을 위해 양보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고마워. 잘 먹을게."

"네···!"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나는 박수린이 내민 도토리를 건네준 것만큼이나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리고 뚜껑만 따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오독- 오도독-

씹을 때마다 쓴맛과 떫은맛이 확 퍼진다. 당연하다. 원래 도토리는 생으로 먹는 열매가 아니고, 물에 여러 번 데친 후에 먹는 열매이니 말이다.

오도독-

하지만 내가 지금 쓴맛을 훨씬 더 강하게 느끼고 있는 이유는,

도토리가 예상보다 덜 익은 탓일까.

아니면.

아이들이 어른들도 없이 어떻게든 살겠다며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본 탓일까.

······아마 둘 다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