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4 - 204. 수리산의 아이들 (4)
오들오들···
"흐으···."
"추어···."
젖은 날개라도 펼쳐 작은 몸을 감싸 안아 체온을 유지하려는 뱁새 자매. 소나기가 그치자 이제는 기온이 확 내려간 것이다. 물이 확 불어난 계곡 옆이라 떨어진 기온이 더욱 크게 체감되는 듯했다.
"얘들아, 너희는 먼저 들어가 있어. 감기 걸리겠다. 이 물 어디에 담으면 되는지만 말해주고."
"그래, 어서 들어가."
나와 지수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박채연과 박수린에게 말했다. 아이들은 조막만 한 손으로 서로 옷의 물기를 짜내는 중이었다.
"이건-엣치! 청수 오빠랑 남자애들이 가져온 통에 담으면 돼요. 곧 올 때가 됐는데···."
그중 붉은 뱁새가 아니, 박채연이 코를 훌쩍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말대로,
"허억! 수린아! 채연아!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청수가 도로 위의 물살에 발자국을 남기며 뛰어왔다. 그는 여러 개의 플라스틱 정수통을 들고 있었다. 흔히 정수기에 꽂아 쓰는 말통 말이다.
찰박! 찰박! 찰박!
흙탕물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에 의해 죄다 쓸려 나간 아스팔트 도로 위의 낙엽들. 대신 자잘한 모래 알갱이가 빈자리를 채운 탓에 전보다 더 더럽게 보였다.
"애들은 괜찮아. 근데 많이 추워해서 먼저 들여보내는 게 낫겠다."
"아, 네네!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요. 채연아. 수린이랑 같이 관리사무소로 가서 옷도 갈아입고, 추우니까 침낭 넢고 있어. 대현이랑 민수는 이미 들어가 있을 거야."
"네, 오빠!"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박채연과 박수린은 물장구를 치며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우리가 말했을 때는 눈치만 봤는데, 김청수가 말하니 바로 행동에 옮기는 모습. 하긴 그동안 쌓아온 친밀도나 신뢰도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형이랑 누나도 들어가서 쉬세요. 붉은 단발 누나도 쉬고 있을 거예요. 이제 비도 그쳤으니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아냐,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도와주고 갈게. 하면서 해 줘야 할 이야기도 있고."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지수의 꼬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수야, 너도 아까 그 애들 따라서 가 있어. 그리고 같이 따뜻한 물 좀 마시고. 뭐, 이미 세아씨가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만."
"알았어, 아저씨!"
푸르르 몸과 꼬리의 물기를 털던 지수는 빠른 대답과 함께 어린 자매를 따라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눈을 끔뻑이고 있는 김청수를 바라보았다.
"음···. 진짜 별거 없는데···, 물만 통에 넣으면 되거든요. 일단 알았어요. 그럼 저 방수포 좀 살짝 들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청수는 이내 고개를 한차례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많이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한층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이윽고.
"이대로 든다? 각도랑 방향은 잘 맞지?"
"네! 너무 높게 말고 천천히 조금씩만 들어 주시면 돼요!"
나와 김청수는 빗물을 통에 옮겨 담는 작업을 시작했다.
출렁- 쪼르르륵-
방수포에 손을 올리자 안에 고인 물에 파문이 일어났다. 한쪽이 기울어지게 방수포 한쪽 면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밑에 대기하고 있던 통으로 빗물이 흘러 들어간다.
토도동- 쿠르륵-
물줄기는 플라스틱에 부딪치는 것도 잠시 순식간에 차오른 수위에 의해 자기들끼리 부딪치게 되었다. 서로 뒤섞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포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위의 과정은 방수포에 모인 빗물이 동이 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퉁!
물이 꽉 담긴 정수기통이 하나, 둘씩 바닥에 놓이게 되었고, 나는 천천히 김청수를 불렀다.
"청수야."
"네?"
"아까 보니까 애들이 많이 말랐더라. 아, 그렇다고 너를 탓하거나 그런 말은 아니야. ···그냥 식량이 우리 생각보다 더 부족했구나 싶어서."
나는 그가 내 말을 오해할까 싶은 마음에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김청수를 탓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칭찬 받아 마땅했다. 홀로 아이 넷을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콰르르륵-
통 안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
"······."
"······."
나와 김청수 사이에 차오른 침묵.
"후우, 아까 저희가 먹는 거 보셨죠? 크기랑 생김새는 조금 달라졌지만, 얼핏 보면 밤이나 도토리, 잣 같은 거였잖아요. 맛도 그것들이랑 비슷하고요. 아마 들어 있는 영양분도 비슷하겠죠."
그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뭐, 문제는 그게 아니지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예요. 산이 변했어요, 형. 가족들 따라서 캠핑을 몇 번 해 봐서 야생에 있는 것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를 조금 알고 있었었는데.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 다 쓸모가 없어졌더라고요."
"그래서 익숙하고 안전해 보이는 열매만 주워 먹은 거야?"
"네, 맞아요. 칡 뿌리나 식용 버섯, 산딸기 같은 건 모습이 다 너무 이상하게 변해서 함부로 손 댈 수가 없었거든요. 혹여 잘못 먹었다가는 저 혼자만 큰일 나는 게 아니니까. 다행히 열매들은 기괴하게 변하지는 않아서 먹었죠. 지금이 열매가 맺힐 시기는 아니지만 이젠 그런 것도 상관없어졌나 봐요."
밤, 도토리, 잣 같은 열매들은 대표적인 가을철 열매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나무에서 열매들이 맺혔다는 것은 명백하게 이상 현상. 하지만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시기를 가리지 않고 맺은 열매 덕분에 캠핑장 생존자들이 그나마 간신히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부족한 식량은 결국 아이들의 부모님에게 하여금 위험한 바깥으로 나가라는 선택지를 내밀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어른들이 외부로 나가자 당장 먹을 입이 줄어 아이러니하게도 김청수와 아이들이 목숨을 좀 더 연명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지금까지는 열매가 맺혔다고 해도 겨울이 되어도 열매가 맺힌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열매도 완전히 안전하지 않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 캠핑장에 아이들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깡 마른 체구의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몇 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열매조차 바닥 나 아무것도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청수야, 여기서 지내면서 위험한 것들은 못 봤어? 나무 인간이나 괴물 같은 거 말이야."
이 캠핑장도 지내기에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껍질이 붙은 사람 아니, 괴물 말하는 거죠? 바깥에서는 나무 인간이라고 부르나 보네요. 그런 괴물은 여기에 고립되고 나서 몇 번 본 것이 끝이었어요."
"벌레들은? 여기 산 타면서 보니까 썩은 거목에 식흔이 잔뜩 있더라고. 커다란 애벌레 같은 거 본적 있어?"
"어······ 아뇨? 저희는 여기 캠핑장 구역에서 나간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흠."
"아, 잠시만요. 몇 주전부터 까악이가 밤마다 어디 나가던데 사냥 하러 나가는 거였을까요? 그러고 보니 요새 밥 달라고 보채지도 않네요. 우리 몰래 뭘 먹고 오는 건가?"
작업을 잠시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김청수. 그는 이내 까마귀의 행동 변화에 대해서 말했다.
'···밤마다 나갔다고?'
낮에 틈틈이 졸던 까마귀가 떠올랐다. 녀석을 붙잡아 반지를 되돌려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까마귀가 졸고 있는 덕분. 그러나 이상하기는 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 까마귀는 야행성 동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문득 지수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녀가 들었던 소리와 까마귀가 밤마다 나간다는 말을 억지로 연결시켜보면, 밤이 될 때마다 수리산에 있는 무언가가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이 된다.
비록 확실하지 않은 추측일지라도, 그것은 위기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에 충분히 한몫하고 있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나야 모르지. 근데 까마귀 밥도 챙겨 줬어? 그 커다란 녀석한테? 너희 먹을 것도 부족하잖아."
나는 일단 김청수에게 이야기를 더 들어 보기로 했다. 판단은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예전에는 원래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그냥 평범한 까마귀였는데 한 달 전인가? 그보다 더인가? 아무튼 그때부터 뭘 주워 먹었나 갑자기 무럭무럭 자라더니 저렇게 커진 거예요."
"녀석이 너희를 위협하거나 하진 않았고?"
"까악이가 알인 시절부터 제가 키웠는데요, 뭘. 그런 일은 하나도 없었어요. 체구도 커지고 뭔가 더 똑똑해져서 그런지 말은 더 잘 들었으니까요. 부리를 함부로 쪼지도 않고요."
변종으로 변한 까마귀였지만, 다행히 캠핑장 아이들을 아군으로 인식한 모양이다. 자기 행동이 무슨 결과를 불러오는지 이해하고 있던 녀석이었으니 행동을 더 조심한 듯했고.
그렇다면 까마귀가 SOS가 적힌 천을 우리에게 내민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김청수는 그 천이 필요가 없어져서 버린 것이라고 했으나 필요가 없어졌을 리가 없었다.
하루를 채 보지도 못한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캠핑장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을 정도였으니까.
까마귀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부족한 식량 문제이든 다가오는 위험이든 간에 상관없이 내가 김청수에게 말해야 할 것은 명백했다.
바로 여기를 같이 떠나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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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스
검스
맨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