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5 - 205. 수리산의 아이들 (5)
"청수야."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김청수를 불렀다.
"네?"
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김청수는 마지막 플라스틱 정수기통을 막 밀봉한 참이었다. 이제 통을 들고 사무소로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일만 남았다.
"바깥이 어떤지 물어봤었지?"
"···그렇죠?"
"외부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해. 온갖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거든. 그리고···."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했으니까.
"여기도 안전하지 않게 될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 당장 지금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위험해질 것이라는 건 확실해."
"······."
"너희를 겁주거나 위협하려는 말이 아닌 순전히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까마귀가 그러더라, 너희를 구해 달라고. ···말을 한 건 아니고 행동이 그랬다는 이야기야."
"···그래서요? 바깥은 위험하다면서요. 그럼 저흰 어디로 가요? 적어도 지금은 여기가 안전하다는 거 아니에요?"
김청수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러면서 작업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그동안 몸에 입력되었던 행동을 강제로 이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쿵!
물이 가득 담긴 정수기통들이 아스팔트 도로 위에 차곡차곡 쌓인다.
"의왕시에 캠프가 하나 있어. 거기로 가면 돼. 거기 사람들도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니까 너희를 환영할 거야. 여기 꼬맹이들 또래도 몇 명 있고."
나는 그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돌아오는 반응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어찌 첫술에 배가 부르겠는가.
단순히 부모님들이 돌아올 거라는 단 하나의 희망만 가지고 산에서 몇 개월을 내리 버틴 아이들이다. 그런 그들의 고집이 고작 내 말 몇 마디에 꺾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는 길도 걱정하지 마. 우리가 캠프로 데려다줄게. 나랑 거기 사람들이랑 잘 아는 사이거든? 응? 그러니까 같이 가자, 청수야."
비록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향하는 방향과 정반대였지만, 비록 되돌아가는 길에 포탄들의 밭과 출렁 다리를 또 지나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괜히 하는 말 아니야. 물통은 잠깐 내려놓고 나 봐봐. 놀라지 말고."
이제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김청수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나는 손에 푸른 불을 피어 오르게 만들었다.
화륵-
주먹을 둘러싼 푸른 불꽃.
"아, 또 왜··· 뭐야."
짜증을 내며 미간을 찌푸리던 김청수는 물통을 놓치면서 당혹성을 토해냈다. 그의 반응은 이능을 처음 보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화르륵!
나는 그가 말릴 새도 없이 곧장 푸른 불을 김청수의 몸에 밀어 넣었다. 설명보다 직접 몸으로 겪는 것이 설득을 빠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어어?!"
그는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보다 내가 불을 흡수시키는 것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저항감없이 들어간 푸른 불꽃은 불티로 변해 김청수의 주위를 휘감았다.
"가만히 있어. 진정하고 느껴봐. 지금 네 몸이 어떤지."
나는 그를 진정시켰다. 다행히 처음에 좀 놀랐을 뿐, 이내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김청수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얼굴은 아직 놀란 표정이었지만.
화르륵-!
타닥- 타닥-
맹렬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이 태운 무언가 아니, 검은 입자가 기운을 잃어버리고 빠져나온다. 그것이 김청수에게서 빠져나올수록 그의 안색은 점차 편해져 갔다.
알게 모르게 부담을 주고 있던 검은 입자가 사라지니 몸이 한결 편해진 거겠지.
"······어때? 뜨겁지는 않지?"
나는 김청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뜨겁다기보다는 포근한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형, 이게- 이게 뭐예요?"
그는 흩어져서 사라지고 있는 검은 입자를 멍하니 보았다.
내가 시간적 여유 없이 아이들에게 여기를 떠나자고 한 이유는 그들의 몸에 미세한 검은 입자가 쌓인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캠핑장 아이들이 최대한 먹을 만한 것들로만 골라 먹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변화한 산에서 나온 부산물이지 않은가.
검은 입자의 양에 대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독성이 있다는 건 동일했다.
"푸른 불을 말하는 거라면 내가 가진 이능이야. 옆에 떠다니는 건 검은 입자. 너와 아이들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던 악마.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는 원인. 그게 너희의 몸속에 들어 있었어. 내가 너희에게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해."
나조차도 아이가 건넨 도토리를 삼키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미약한 검은 입자가 들어 있었다. 그래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속해서 체내에 쌓이는 검은 입자는 끝내 숙주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괴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이능? 아니아니, 방금 뭐라고 했어요? ······괴물로 변한다고요?"
"그래, 아마 그동안 먹었던 열매들이 가지고 있던 검은 입자일 거야. 지금이야 내가 너희를 정화해 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나는 뒷말을 굳이 잇지는 않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앞서 나온 이야기 덕분에 좋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아무거나 함부로 주워 먹지 않아서 이 정도다.
내가 캠핑장에 도착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그들이 배고프다면서 아무거나 무작정 입에 넣고 봤다면 모든 상황은 이미 늦었을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까마귀를 볼일도 없었겠지.
"그, 그럼 제 동생들은요?! 걔네들의 몸에도···!"
김청수는 자기 몸보다 아이들의 상태에 대해서 물어왔다.
"그건 걱정하지 마. 이미 정화가 됐을 거야."
뱁새 자매와 다람쥐 형제의 체내에도 검은 입자가 당연히 있었지만, 그 정도는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지수와 한세아가 가지고 있는 푸른 조각에 의해 정화가 되었으리라.
'나중에 내가 한번 더 보긴 하겠지만.'
최소한 바로 나무 인간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는 너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이런 말을 내가 직접 하니까 조금 이상하긴 한데, 우리 나쁜 사람 아니야."
"형 누나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까악이가 새끼였을 때부터 사람은 기가 막히게 잘 구분 했었거든요. 나쁜 사람인지, 괜찮은 사람인지 말이에요."
"···그렇게 여겨 주면 고맙고. 아무튼 네 몸에서 나온 검은 입자는 네가 보기에도 불길했잖아. 그렇지?"
"······하아, 네."
김청수는 머리가 아픈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가 짐작하지도 못하고 있던 위험이 캠핑장을 잠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두통이 찾아온 모양이다.
"여기에 있으면 더 악화할 거야. 우리도 언제까지고 여기에 같이 있어 줄 수가 없어. 남산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린 거나 마찬가지라서."
"남산으로 가신다고요? 거긴 왜요? 저도 상황을 완전히 모르는 건 아니에요. 거기가 진원지이니 뭐니 하면서 한동안 떠들썩 했었잖아요."
"아···, 그거까지 말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해줄게. 일단 이것부터 마저 옮기자. 가장 급한 건 끝냈으니까."
"알았어요."
이윽고, 나와 김청수는 다시 정수기통을 어깨 위로 올려 걸쳤다. 꽉 차 있는 물의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가 없었을 때는 이 짓을 그 혼자 했을 테니 꽤 고생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넷을 챙기랴,
식량과 식수를 구하랴,
까마귀도 돌보랴.
뭐,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하면서 하루하루가 힘들었겠지.
"청수야, 아이들하고 잘 이야기해 봐. 되도록 빨리 말해주면 좋겠지만, 재촉하지는 않을게. 너도 충분히 이해한 것 같고."
"······."
그는 답하지 않고 침음을 흘리기만 했다. 복잡한 생각만큼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청수는 묵묵히 관리사무소로 걸음을 옮겼다.
찰박- 찰박- 찰박-
살짝 파인 아스팔트 도로에 고인 빗물이 사방으로 튄다.
"꺄하핫! 우와! 람쥐썬더! 아니, 도그썬더야···!"
"나도! 나도 줘! 아니, 주세요!"
무거운 수통을 어깨에 인 채, 건물과 가까워지니 아이들의 감탄 소리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색하게 지내면 어쩌나 싶었건만, 내 생각 이상으로 사이가 빨리 가까워진 모양이다.
하늘의 먹구름이 얼굴로 옮겨졌던 김청수도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니 한결 나아진 표정을 지었다. 역시 퇴근길을 반겨 주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 소리만큼 효과가 좋은 피로 회복제는 없겠지.
"형, 나중에 이능은 무슨 소리고, 입자는 뭔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 말고 지수랑 세아씨한테 들어도 되고, 우리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다 알려줄게."
잠깐의 대화를 끝낸 나와 김청수가 관리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박채연과 박수린, 김대현과 최민수가 너나 할 것 없이 예린에게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아 언니랑 지수 언니한테도 해!"
팔짱을 끼고 있는 예린은 우쭐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핫초코 스틱 4봉지가 들려 있었다.
"하하···."
지수와 한세아는 그런 아이들 옆에서 어색하게 웃는 중이었다. 지수는 아이들에게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는지 작은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한세아는 냄비에 물을 넣어 끓이고 있었다.
보글보글···
관리사무소 건물을 채우고 있는 간이 버너 위에 올려진 냄비에서 들려오는 물 끓는 소리와 스멀스멀 올라오는 하얀 김. 그리고 사람의 체온.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건물 내부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
김청수는 멍한 얼굴로 예린에게 머리를 박고 있는 아이들과 옆에 있는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해야."
내가 그를 데리고 있는 사이에 지수, 예린, 한세아가 집단을 밑에서부터 굴복시킨 듯한 모양새에 나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눠 주라고 하긴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아이들이 온기와 식량에 굶주렸다는 이야기이리라.
이윽고, 나는 떠듬떠듬 입을 열어 변명했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