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06화 (207/497)

Chapter 206 - 206. 수리산의 아이들 (6)

관리 사무소 안.

"음냐···."

"흐응···."

네 명의 아이들이 침낭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먹은 따뜻한 식량과 핫초코가 그들의 몸을 순식간에 함락 시켜 버린 것이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자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줄 정도로 귀여웠다.

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기름진 통조림뿐이었기에 아이들의 속을 최대한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소분해서 줄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은 그마저도 행복하게 웃으면서 꼭꼭 씹어 먹었다.

그리고 아이들뿐만이 아닌 나, 지수, 예린, 한세아 마지막으로 김청수까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옷도 갈아입은 상태였다.

"······."

김청수는 착잡한 얼굴로 자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도 처음에는 오랜만에 인공적인 조미료 맛을 보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여태껏 자기들이 먹은 열매들이 사실은 위험한 것이었고, 앞으로는 어찌해야 하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까마귀는 또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덩치가 커다란 녀석이니 좁은 관리사무소가 답답했나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새였기에 그리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바람 좀 쐬고 돌아올 것이리라.

바로 그때.

"현우씨, 아까 비 왔을 때 남자애들 따라서 여기 옆에 가 봤거든요? 근데 거기 엄청 튼튼해 보이는 차가 한 대 있던데요?"

한세아가 내 옆에 붙어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예린을 포함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챙겨 준 덕분인지 우리 일행 중에서 인기가 제일 많았다.

"차가 있다고요?"

"네. 군용 차량 같아 보였어요. 그렇지, 예린아?"

"맞아요! 초록색? 아, 국방색!"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세아와 예린.

세상이 바뀌고 나서 수개월 동안 방치된 차량들은 겉만 멀쩡해 보일 뿐, 속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아니, 겉모습마저도 넝쿨 체액에 의해 잔뜩 부식되거나 나무 인간에 의해 박살 나거나 했으니 사실상 멀쩡한 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관리를 받지 못해 대부분의 차량 시동 배터리가 방전이 된 상태이기도 했다. 당연히 아직 방전이 되지 않은 배터리는 있긴 하겠지만, 그건 소수에 불과하겠지.

물론, 발전기가 있으면 어떻게든 배터리 충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발전기가 망가지지 않았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였다.

당장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힘들게 두 다리로만 이동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니었던가. 의왕시 캠프에 남아 있는 발전기가 전부 망가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길거리에 있는 철물점 내부에 발전기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것들도 멀쩡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곳에 있는 물건들은 더 엉망이었으면 엉망이었지, 작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뜬금없이 군용 차량이 있다는 소리에 나는 김청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이들을 보고 있던 그 또한 한세아의 말에 시선을 우리 쪽으로 향했다.

"청수야, 세아씨 말이 맞아? 군용 차량이면 뭐, 두돈반이나 코란도 그런 게 있는 건가?"

"아뇨, 그 뭐라고 하더라···. 아! 험비! 험비라고 했던 거 같아요."

"···험비가 있다고?"

"그냥 직접 가서 보실래요? 어차피 이제 애들도 자겠다, 할 일도 다 했겠다 하니 지금은 한가하거든요. 아까 형도 남은 이야기 있다고 하셨잖아요. 여기는 애들 자게 냅두고요."

김청수의 제안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중에서 특히 예린은 내게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래, 아저씨. 나랑 언니는 애들 보고 있을 테니까 다녀와. 예린이는 어떻게 할래?"

"오빠 따라 갈래!"

"들으셨죠? 그렇다네요."

꼬리를 흔들면서 대답한 예린을 보며 한세아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등 떠미는 수준으로 다녀 오라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쫑긋거리는 예린의 귀를 한번 만져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내 손을 놓칠 새라 꼬옥 붙잡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자, 청수야."

군용 차량이든 일반 차량이든 어차피 시동은 걸리지 않을 테지만, 김청수의 말처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을 듯했다. 현재 중요한 것은 차량이 아닌 대화였으니까.

휘이이이···

바깥으로 나오니 매우 찬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산이라는 지리적 특성 탓에 기온이 한껏 내려간 것이다.

졸졸졸···

아직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의 흐름이 신발을 스쳐 지나간다.

찰박! 찰박! 찰박!

그래도 기세가 처음보다 확연히 줄어든 덕분에 물이 많이 튀지는 않았다.

이윽고, 나, 예린, 김청수는 관리사무소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정확히는 주차장이 아닌 한때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였다.

"잠깐 뒤로 물러나요, 형. 기껏 갈아입은 옷이 젖으면 좀 그렇잖아요."

김청수는 분리 수거장 지붕 위에 펼쳐진 방수포를 잡으며 말했다. 방수포에는 물방울들이 잔뜩 붙어 있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포를 걷어야 했다.

찰박-

나는 예린을 안아 들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아이도 물이 튀는 것이 싫은 듯 내게 몸을 완전히 기대왔다.

펄럭-!

우리가 거리를 벌린 것을 확인한 김청수는 단숨에 방수포를 위로 걷어 올렸다.

후두둑- 후두둑-

포의 겉면에 잔뜩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육중한 차체, 국방색 페인트, 두꺼운 검은 타이어, 각진 디자인, 사각형의 유리창에 달려 있는 와이퍼.

소형전술차량인 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험비잖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말문이 막혔다. 이제껏 이렇게 상태가 좋은 차량을 본 것이 처음인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그리고 험비 차체에 잡다한 부속품들이 달렸지 않은 걸 보니 예전 군생활 할 때 자주 보았던 4인승용 기본 모델인 듯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아까는 나보고 여기 캠핑장에서 나간 적이 없다고 했었잖아."

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김청수에게 던졌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명백하게 군용 차량이 맞다.

그러나.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는가?

캠핑장에서 나간 적이 없다면, 우리처럼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끌고 온 군인은 어디 있는가?

혹은 이것을 구해 온 사람은 어디 있는가?

그가 내게 해줬던 이야기에는 서로 맞물리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숨긴 부분이 있는 것처럼.

그래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당장 나조차도 김청수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으니까.

그저 서로 정보를 더 교환하면 될 뿐인 일이었다.

"그건 사실이에요, 형. 저는 바깥에 나가지 않았어요. 대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있었죠."

김청수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부모님들이 저랑 동생들만 남기고 가진 않았어요. 그때는 제가 날개를 크게 다친 상태였어서요."

"날개가 있었어?"

"아, 제가 까치랑 합쳐졌다고 말 안 했었나요?"

나와 예린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어쩐지 박채연, 박수린, 김대현, 최민수와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 특징이 보이지 않더라니, 한세아와 같은 경우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형 누나들이 나무 인간이라고 부르는 괴물을 처음 본 것이 그때, 제가 기형으로 난 날개를 잃어 버린 것도 그때, 어른들이 외부로 나간 것도 그때···였네요.

"······?"

무언가 이상했다.

부상자를 캠핑장에 내버려 두고 나갔다니?

하물며 나무 인간이 등장한 직후이지 않은가?

조금 더 추후를 지켜보지 못할망정 아니, 하다못해 상처가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외부로 나가도 되지 않은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을 염두하지 못할 정도로 병목안캠핑장의 상황이 최악이었을 거라는 말이 된다.

내 표정이 좋지 않아진 것을 본 김청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네요. 근데 저도 왜 부모님들이 급하게 나간 건지는 몰라요. 거의 내내 기절한 상태이기도 했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생 넷이랑 제 형만 남았더라고요."

"······."

"제 상태를 지켜볼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동생들을 돌볼 사람도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형이 남았었나 봐요. 깨어나고 보니까 동생들은 배고프다고 울지, 엄마 아빠 어디 갔냐고 물어도 형은 묵묵부답이지···."

그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김청수의 손은 없어진 무언가를 찾는 듯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다가 투정을 도저히 못 참겠는지 말도 없이 나갔다가 잔뜩 긁혀서 돌아오더라고요. 지금 보는 이 차 한대만 간신히 끌고서."

"후우···."

나는 더 듣지 않아도 이어지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 것 같았다. 아니, 확실하게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캠핑장에 그의 형의 존재가 없다는 것은 단 하나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손을 들어 김청수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는 기어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리고 바보같이 죽었어요. 혼자 시름시름 앓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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