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07화 (208/497)

Chapter 207 - 207. 수리산의 아이들 (7)

"···미안하다."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억누른 채 김청수에게 사과를 건넸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 알게 되었을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미안함을 느끼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어딜 가나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깊게 침잠했다.

"됐어요. 별로 신경 안 써요.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울고 있는 동생들을 보니까 그냥 몸부터 움직이더라고요. 이제 걔네들을 챙길 사람이 저밖에 안 남기도 했고."

"······."

"지금도 아니, 지금은 형이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지만, 그래도 원망스러운 건 여전하네요. 차라리 도와달라고 말이라도 했다면, 적어도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더라면······그렇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혹시 그 형이라는 분에게 나무 껍질이 돋아나고 그랬어? 아니면 대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길래?"

보다 더 끔찍한 결말을 암시하는 김청수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예린도 말없이 얼굴을 내 품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참을 입술만 달싹거리던 김청수가 말해 준 것은 나와 예린의 예상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상처···는 심하게 보이는 것은 없었어요. 그냥 자잘하게 긁힌 상처만 있었는데 이상하게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더니 녹아버렸어요."

"······녹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그냥 녹아서 사라졌어요. 흔적도 없이. 그때는 제 형 혼자 따로 자던 시기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동생들이 그 꼴을 전부 다 봤을걸요. 사실 그게 정말로 형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입고 있던 옷가지는 남았으니 형이 맞았겠죠."

애써 무덤덤한 척을 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김청수.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손과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사람이 녹아 액체로 변한 끔찍한 모습을 처음 목격했던 당시를 회상한 탓인 듯했다.

그 뒤로 정체불명의 액체가 담긴 텐트는 그대로 버렸고, 동생들에게는 형이 부모님들을 찾으러 나갔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덤덤한 어투로 이어지는 과거 이야기.

그러나 내용만큼은 결코 덤덤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비극이 아닌 것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듣기만 해도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었다는 걸 알 수 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끝까지 여기서 수개월을 버틴 것이다.

외부로 도움을 요청한 부모님들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 아니, 미련만을 품은 채.

"아무튼, 그런 거예요. 자꾸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는데 결론은 간단해요. 이 차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가져 왔다는 것. 그것뿐이네요."

김청수는 화제를 돌리고 싶은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몸을 잠식하려는 과거를 훌훌 털어내려는 손짓에 나와 예린도 함께 편승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이야기는 이쯤 하면 충분했으니까.

"예비군 훈련장이라···."

나는 험비 보닛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서늘한 냉기가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먼지 한 톨 묻어나지 않은 모습은 이 차량이 사람의 관리를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차 처음에는 엄청 더러웠는데 지금은 상태가 꽤 괜찮아 보이죠? 엔진 이런 건 몰라도 겉은 깔끔하잖아요."

"그러게. 깔끔하기는 하다."

"여기에 있다 보면 생각보다 할 일이 없거든요. 그날 나온 더러워진 옷들을 빨고, 그날 먹을 열매들을 주우러 다니고, 동생들 챙겨 주고···.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이렇게 먼지나 닦는 거죠."

김청수는 분리수거장 철망에 걸린 젖은 걸레로 군용 차량을 닦는 시늉을 했다.

"뭐, 시동도 걸리지 않아서 그냥 튼튼한 창고 대용으로 쓰고 있을 뿐이지만요. 어느 순간부터 전기도 끊기고, 추워서 등유로 난로 한번 켰다가 이상한 가루가 불을 꺼버리고 하니까 어쩔 수가 있나요."

"······."

"그래도 형 누나들이 와 준 덕분에 간만에 동생들이 배도 채우고, 따뜻하게 자네요. 감사합니다, 형."

"아냐, 당연히 해 줘야 하는 일인걸. 애들이잖아."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짐을 풀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가진 것을 낯선 남에게 베푸는 행위 자체가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상대가 아이들이지 않은가.

그리고 아까부터 내 머릿속에는 예비군 훈련장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었다.

김청수의 형이 그곳에서 험비를 끌고 돌아왔다는 것은 예비군 훈련장의 물자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거기를 관리하는 군인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김청수의 형을 따라왔거나 그의 형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것은 근처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은 현재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이리라.

마침 식량이 부족해진 참이었다. 앞으로 하루 이틀 먹을 양은 남아 있긴 했어도 먹을 입이 넷에서 아홉으로 늘어난 탓에 아껴 먹어도 하루에 소모 되는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캠핑장 아이들이 고집을 풀 시간도 줄 겸 해서 식량을 조달할 곳을 찾으려고 했건만,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

넘치는 식량이 있는 곳.

정확히는 있을 수도 있는 곳.

예비군 훈련장 말이다.

바로 그때.

"제가 더 이야기해드릴 건 더 없어요, 형. 그럼 이제 형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요."

김청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남산으로 향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내가 그에게 말해주기로 했으니 이제는 약속을 이행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아, 청수야. 미안한데 그건 지수랑 세아씨한테 들으면 안 될까? 물어보면 잘 대답해 줄 거야. 진짜 미안."

이래저래 잡다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터라 입을 열 여력이 없었다. 지수와 한세아에게 일을 떠넘기는 듯한 모양새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그래도 도저히 말할 기운이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내가 좀 쉬겠다고 김청수를 가만히 방치시켜 놓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에이······, 알았어요. 형은 여기 더 있으려고요?"

"어, 난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게. 그래도 되지?"

"네, 상관없어요. 차 뒤쪽에 있는 드럼통에는 휘발유랑 등유 들어 있으니까 그것만 조심해주세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미묘하게 기름 냄새가 나더라니. 비록 기름을 쓸 일은 없겠지만, 나는 가지런히 일렬로 세워진 드럼통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파란 원형의 기름통.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기는 했으나 찌그러지거나 우그러진 곳도 없이 튼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김청수는 분리수거장 바깥으로 나가 사라졌다. 그가 향하는 방향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걷는 모습은 그가 내 이야기를 매우 궁금해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긴, 바깥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우리가 처음이었으니까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아···."

"오빠, 왜 자꾸 한숨 쉬어요?"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예린이 귀를 쫑긋거리며 물었다. 가만히 내게 몸을 기대 꼬리만 흔들고 있던 아이가 김청수가 자리를 비우자 입을 연 것이다.

"그냥 이게 시동이 걸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당장 눈앞의 험비만큼 튼튼하고 멀쩡해 보이는 차량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차 역시도 보기에만 좋은 애물단지라는 사실에 아쉬움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시동만 걸리면 예비군 훈련장에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가져올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총이나 탄약 같은 게 쌓여 있을 가능성도 작지만 있긴 하고.'

물론, 훈련장에 있는 물자들의 상태가 멀쩡한 것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른다. 어쩌면 전부 망가진 상태일 수도 있겠지.

일단 그런 것들은 둘째 치더라도, 이동 수단이 있다는 것은 좀 더 넓은 폭의 선택지를 제공해준다.

움직이는 거리 단위 자체가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만에 하나 예비군 훈련장에 물자가 없더라도 좀 더 멀리까지 나가 식량이나 각종 물자들을 구해 올 수 있지 않겠는가.

"······오빠."

입을 오물거리던 예린은 내 대답을 들은 뒤,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이는 무언가 결심한 얼굴을 한 채였다.

"응?"

"이 차 시동이 걸릴 지도 몰라요. 차에 전기만 남아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배터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네! 여기 안에 제 친구가 들어 있거든요. 조금 아니, 많이 예민해 보이긴 하는데 대화를 나눠보면···되지 않을까요?"

친구.

또다시 나온 예린의 친구 이야기.

나는 마침 예린과 둘만 남게 된 지금이 대화하기에 적기라고 판단했다. 혹여 아이의 정신이 아픈가 싶은 마음에 걱정되기도 했고.

"예린아, 혹시 친구가 무슨 친구를 말하는 건지 알려줄 수 있을까?"

"음···. 저 믿어요, 오빠?"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역으로 되물어온 예린.

"그럼 믿지. 언제 내가 예린이 안 믿은 적 있어? 다 믿어 줄 테니까 말해 봐."

"그럼 이거 잠깐, 아주 잠깐! 빌려줄게요."

이번에도 예린은 내 질문의 답이 아닌 엉뚱한 것을 내밀었다. 아이가 내민 것은 목걸이에 끼고 있던 반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믿는다고 말한 것이 조금 전이지 않은가. 지금은 예린의 행동에 맞춰주는 것이 좋은 판단이리라.

"반지 끼면 보일 수도 있어요. 지수 언니랑 세아 언니는 반지를 껴도 못 봤지만요."

"뭐가 보인다는······."

나는 대충 중지에 반지를 끼우며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키이잉-

푸른 입자가 활성화 되는 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허공을 떠다니는 푸른빛무리가 시야를 메웠으니까.

그리고.

"보여요?! 와! 오빠도 보이는 구나! 그럼 저기 봐봐요. 차 보···뭐라고 하더라? 아! 보닛! 거기에 있는 친구가 제가 말한 애예요!"

내가 빛무리를 보았다는 걸 확신한 예린이 잔뜩 신난 기색으로 외쳤다.

아이가 조막만한 손으로 내 고개를 손수 돌려주며 가리킨 곳에서는 좀 더 뚜렷한 형상을 가진 무언가가 자리잡은 것이 보였다.

작은 뱀의 형태를 한 빛무리.

파직- 파지직-

그것의 몸체에는 노란 점들이 박혀 있었고, 거기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고 있는 중이었다.

나와 예린을 둥글둥글한 눈으로 삐뚜름하게 바라보던 그 뱀은,

[애애앵-!]

이내 입을 크게 벌리며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크게 벌려진 입에서 날름거리는 혓바닥. 누가 보아도 우리를 놀리는 모양새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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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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