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8 - 208. 수리산의 아이들 (8)
"오빠! 그, 놀리는 건 아니에요! 잘 들어봐요. 귀를 기울이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릴 거예요, 분명. 오빠는 언니들하고 다르게 볼 수 있으니까."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린 내 모습을 본 예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의 꼬리가 삐걱거렸다.
"화난 거 아니니까 걱정 하지마. 그냥 좀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것뿐이야."
나는 예린이 안심할 수 있도록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린 이유는 뱀 형상을 한 작은 빛무리가 내게 혀를 내밀어서가 아니라 흐릿한 형상을 좀 더 잘 보기 위함이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처럼 윤곽선이 선명해졌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아예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지만.
"그보다 잘 들어 보라고? 저것-."
나는 아이를 감싸지 않은 한쪽 손으로 험비 보닛에 자리 잡은 빛무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려고 했으나,
"쉿! 오빠! 저것이 아니라 친구! 친구들은 저희 말도 다 알아들으니까 말조심해야 해요!"
고사리 같은 예린의 손이 착-하고 내 입을 막았다. 아이는 혹여 예민해 보이는 빛무리의 심기가 상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예린의 꼬리가 조심스럽게 살랑거렸다.
끄덕-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친구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라는 것과 우리 말을 알아듣는다는 말은 저것 아니, 저 친구와 대화가 통한다는 뜻이리라.
"알았어. 조심할게."
"그럼 저랑 같이 가서 말 걸어 봐요, 오빠."
나와 예린은 빛무리가 놀라 도망가지 않도록 천천히 차량을 향해 걸었다.
무언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편하게 움직였을 테지만, 이상한 혼령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몸의 움직임이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달그락-
찰박- 찰박-
분리수거장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 보도 블록이 발에 눌렸다. 서로 엇박으로 틈이 비틀리자 그 사이에 고인 물이 작게 튀어 오른다.
이윽고.
[애애앵!]
우리는 빛무리 바로 앞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녀석은 나와 예린에게 다시 한번 혀를 삐죽 내밀었다.
"······."
말없이 내 팔뚝을 툭툭 치는 예린. 작은 뱀이 하는 소리를 잘 들어 보라는 신호였다. 여전히 울음소리로만 들리긴 했지만, 예린이가 괜히 허튼 말을 한 건 아닐 것이다.
[애애앵!]
나는 빛무리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직 소리는 바뀌지 않았다.
키이잉- [애······마!]
예린이가 빌려 준 반지에서 푸른 입자가 활성화 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잔뜩 심통이 난 어린아이의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리기 시작했다.
"······!"
"오빠, ···들렸죠?"
"어, 들리긴 했는데···."
아직 긴가민가했지만, 무슨 소리가 들리기는 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다가오지 마!]
그래, 가까이 오지 말라는 위협이었다. 예린의 말대로 놀리는 건 아니었지만 거부감을 표한다는 것은 동일했다.
작은 뱀 형상의 빛무리. 그것의 몸체에 있는 노란 점박이에서 스파크가 점점 강하게 튀는 게 시선을 이끌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가 환상을 넘어 현실에서도 튀고 있었으니까. 그러한 모습은 마치 어렸을 적 보았던 플라즈마 볼 속의 번개를 연상케 했다.
"그럼 일단 다시 뒤로 가요. 더 자극하면 저 차에 남은 전기 다 빨아들일 것 같으니까요."
나는 예린의 말에 얌전히 따랐다.
다행히 거리가 멀어질수록 잔뜩 성질이 난 작은 뱀의 성질이 죽어 갔다. 우리가 함부로 다가오는 것이 많이 싫었던 모양이다.
찰박- 찰박-
나와 예린은 처음에 서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성격 참···."
-고약하네,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온 것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 빛무리의 심통이 다시 도진다면 여태까지 한 행동들이 전부 말짱 도루묵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무슨 방법 있어?"
"이제 저만 믿어요! 저번에 오빠가 준 가루로 협상하면 될 거예요! 정확히는 이걸로 거래를 하는 거지만요!"
예린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조각이 부서지고 남은 가루를 한데 모아둔 것이었다.
아이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대체 언제부터 저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는지,
푸른 가루와 저 빛무리에는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지, 무엇보다 저것들의 정체가 뭔지, 위험도는 어떠한지 말이다.
그래도 우선은 속에 묻어두었다. 아직 예린의 행동이 끝난 것이 아니니 좀 더 지켜보고 나서 물어도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보고 있어요, 오빠. 제가 잘 설득해볼게요. 그냥 내쫓으면 배터리가 다 사라질 수 있거든요. 전기도 조금 남겨 달라고 해야 하구요."
내 품에서 벗어난 예린은 뒤따라 가려는 나를 제지한 후, 홀로 작은 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또래에 비해 작은 체구를 가진 탓일까.
거대한 험비.
정확히는 보닛에 있는 빛무리에게 접근하는 아이의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의 느낌을 주었다.
물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막아 낼 것이지만 말이다.
[애애앵!]
파지직-
기껏 뒤로 물러난 예린이 재차 가까이 오자 다시 심기가 불편해진 녀석.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너 이거 가지고 싶지?"
[······!]
예린이 코르크 마개를 딴 유리병을 앞으로 내세우자 작은 뱀은 뾰족하게 만든 눈을 순식간에 온순하게 만들었다. 사방으로 튀던 스파크 또한 한순간에 사라졌다.
"허···."
눈 깜빡할 새에 돌변한 녀석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한 꼬집 줄 테니까 거기서 나와주면 안 될까?"
푸른 가루가 먹힌다는 걸 눈치챈 예린이 작은 뱀에게 제안을 건넸다. 아이는 빛무리가 푸른 가루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루를 집은 손가락을 살살 비볐다.
"이거 가지고 싶잖아? 응? 너 이거 엄청 필요하잖아, 그렇지?"
[······]
눈을 어지럽히는 푸른 가루가 한층 더 반짝거리는 광경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작은 뱀.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으나,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파직-!
녀석은 여차하면 무력으로 강탈할 것이다 라는 의도를 드러내며 스파크를 위협적으로 튀겨 보았지만, 예린도 마냥 만만하지 않았다.
찰박!
타타탓-
"너어···! 나랑 오빠가 너보다 세거든? 아니, 나는 말고 우리 오빠만. 아무튼! 이거 나눠줄 테니까 차에서 비켜줘! 아니면 안 줄 거야···!"
실수로 흘리는 푸른 가루조차 아깝다는 듯 마개를 꽉 닫고 한 달음에 내 뒤로 숨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고양이. 행동이 아주 재빨랐다.
화륵-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손가락에 푸른 불을 피워 보였다. 바보같이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는 게 아무래도 낫지 않겠는가.
이윽고.
[······4]
멀어진 예린을, 정확히는 푸른 가루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작은 뱀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혓바닥이 아닌 숫자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뭐?"
[한 꼬···집? 한 개? 너무 적어. 4개]
부피의 단위를 헷갈려 하는 녀석이었지만 이내 단호하게 자신이 원하는 양을 말했다.
"너 이게 얼마나 귀한 줄 알고! 그렇게는 못 줘···!"
[4개]
"안 된다니까?! 어떻게 하나에서 네 배나 올릴 수 있냐구! 그냥 두 꼬집 아니, 세 꼬집 줄게! 이것만 해도 세 배란 말이야!"
[4]
이제는 입을 열기도 귀찮은 듯 달랑 숫자 하나만 말하는 녀석.
"으으···! 오빠, 우리 차 꼭 필요하죠······? 진짜, 진짜진짜 있어야 하는 거죠···?"
예린은 눈물을 머금고 나를 돌아보았다. 유리병을 쥔 아이의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커진 지출에 정신이 혼미해진 모양이다.
"그, 있으면 좋지. ······엄청."
나는 예린의 시선을 외면하며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 이제 와서 필요 없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좋아! 네 꼬집 줄게! 대신 네가 가져간 배터리 전기 전부 두고 가."
울상을 지은 예린은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더 이상 타협은 없다는 엄포를 놓았다. 작은 뱀은 아이의 마음이 바뀔까 황급히 작은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전기 먼저 두고 나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애애앵!]
"······먼저 한 꼬집 줄 테니까 전기만 두고 나와 그럼."
[2]
"아, 진짜 그냥 없애 버려···?"
[···1]
나는 뒤에서 예린과 빛무리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푸른 가루로 티격태격하는 광경에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의왕시 캠프를 떠나는 길에 올랐을 때, 예린이 가지고 있던 유리병에 담긴 푸른 가루의 양이 줄어들었다고 느껴진 것이 역시 착각이 아니었었나 보다.
어쩐지 창고에 숨은 나를 단박에 찾아내더라니, 그때 푸른 가루를 썼던 것 같았다. 당시에 친구가 알려 줬다는 말도 했으니 거의 확실하겠지.
바로 그때.
"오빠!"
예린이 한 달음에 내게 달려와서 푹 안겼다. 손은 여전히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은 한결 풀린 상태였다. 일이 어긋나지 않고 잘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 녀석이랑 잘 풀었어?"
"네! 우리 얼른 차에 타 봐요! 저랑 오빠가 처음이여야 한다구요!"
"알았어, 알았어. 어서 타보자."
마음이 어찌나 급한지 자꾸만 재촉하는 예린이었다. 나도 차가 정말로 시동이 걸리는지 걸리지 않는지가 매우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못 이기는 척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덜컹-
시동을 걸기에 앞서, 작은 뱀이 자리 잡고 있던 보닛을 열어 엔진 오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가 변질이 되었거나 말라 있다면 엔진을 망가트리는 원인이 되고 마니 가장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었다.
'···괜찮네. 연료도 적당히 들어 있고.'
다행히 엔진 오일 게이지를 쭉 뽑아 보니 양도 충분했고, 상태도 썩 나쁘지 않았다. 김청수가 꾸준히 관리를 해 왔다고 하더니 그 덕을 톡톡히 본 듯했다.
마무리로 푸른 불로 차량에 달라붙은 검은 입자마저 제거해주고 나면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끝났다.
-쿵!
"들어가 보자, 예린아."
나는 보닛을 다시 닫으며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예린에게 말했다.
곧바로 육중한 운전석 문을 여니 일반 차량과 별반 다르지 않는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좀 더 투박하고 잡을 부분이 많다는 것일까.
달칵-
운전석에 앉은 나와 예린은 긴장되는 심정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다지 큰 소용은 없었다. 지금이 가장 가슴이 떨리는 순간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배터리, 연료 그 외의 상태도 썩 나쁘지 않았으니 이상이 없다면 차는 무사히 시동이 걸릴 것이리라.
"예린아, 한다?"
"네···! 해요, 오빠!"
짧게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것으로 열쇠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키기기긱-!
검은 매연이 엄청나게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