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2 - 212. 창박골 (2)
[끄게에에엑!]
차량 범퍼에 부딪힌 고라니 한 마리가 넝쿨로 뒤덮인 아스팔트 도로 위를 나뒹굴었다. 놈이 다리로 발버둥을 칠 때마다 짓이겨진 넝쿨 줄기에서 체액들이 마구 흩뿌려진다.
속도가 완전히 붙기 전에 부딪힌 터라 강하게 친 것이 아니건만, 고라니의 고통스러워하는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얼핏 노루처럼 보이기도 하는 외견, 황갈색의 털, 아래로 나 있는 송곳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근육질의 뒷다리.
그것도 체구가 어지간한 경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커다래진 변종 고라니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씹···."
내가 차로 동물을 쳤다는 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도끼로 나무 인간들을 처리해 오긴 했어도, 차량으로 무언가를 밀어 버린 것은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어휴, 놀래라. 현우씨, 괜찮아요?"
정신을 차린 한세아가 내게 물었다. 그녀는 아직도 넘어진 채 발버둥 치고 있는 고라니를 찌릿 노려보고 있었다.
"네네, 전 괜찮습니다. 세아씨는요?"
"저두 괜찮아요. 시작부터 이게 무슨 봉변인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일단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차체가 워낙 튼튼한 덕분에 내부에 있는 나와 한세아에게는 그리 큰 충격이 전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실제로 험비 범퍼에는 기스 하나조차 나지 않았고.
[께에에엑!]
버둥버둥-
도로 한복판에서 넘어진 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다리를 휘적거리고 있는 고라니.
하필이면 나와 한세아가 이른 새벽부터 활동을 시작했기에 고라니를 맞닥트린 듯했다. 습성이 바뀌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단독생활을 하는 녀석들은 대개 새벽과 해 질 녘에 가장 활동량이 많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어쩌죠? 지금 저 고라니가 길을 비켜 주지 않으면 못 지나가잖아요."
"세아씨, 손잡이 다시 잡으십쇼. 그냥 밀어버릴 거니까."
"···네? 진심? 진짜?"
"진심."
예전에 군대에서 초병으로 근무했을 때는 너구리, 멧돼지, 고라니 등등 정말 다양한 산동물들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멧돼지는 거의 본적이 없고, 그나마 자주라는 범주에 들어갈 정도로 마주친 것들은 너구리와 고라니.
너구리는 광망을 물어뜯고 도망가는 비겁한 놈이었고, 고라니는 광망에 들이받는 돈키호테였다.
곧장 출동하게 되면 간혹 무아지경으로 철망에 몸통을 부딪치고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도망가야 하는지 겁을 줘서 내쫓아야 하는지 끝없는 내적 갈등이 일어났었었던 적이 있었다.
수초의 눈싸움 끝에 도망가는 것은 언제나 고라니쪽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빈 초소 안에 숨어 녀석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만 했었으리라.
총을 들고 있으면 뭐 하는가. 실수로라도 쏘게 되면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이 변하기 전의 이야기였다.
지금 나와 한세아의 눈앞에 있는 고라니는 보통 고라니가 아니다. 푸른 입자와 검은 입자에 영향을 받아 변종이 되어 버린 동물이었으니까.
"괜히 나가서 다리에 얻어맞고 다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저 크기 좀 보십쇼. 그리고 저거 엄살입니다."
"어··· 음. 알았어요, 벌써 총알 낭비하는 것도 안 되니까 현우씨 결정에 따를 게요. 바로 앞에서 총 쐈다가는 지수씨가 바로 뛰쳐나올 것 같기도 하고."
달리는 것과 점프하는 것이 일상인 고라니의 다리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변종이 되기 전에도 뒷발차기는 매우 위협적인 공격이었건만, 변종으로 변한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부르르릉!
나는 망설임 없이 가속 패달을 꾹 밟았다. 고라니가 곧장 일어나서 도망가면 살 것이고, 주제를 모르고 버티면 육중한 차체가 놈을 짓누를 것이다.
여기서 시간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차량의 두꺼운 타이어가 놈을 뭉개 버리려는 순간.
[께에에······?!]
미친 척을 하고 있던 고라니가 화들짝 놀라면서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이 나왔던 수풀 속으로 후다닥 도망갔다.
부스럭!
가지에 붙어 있는 초록 나뭇잎만이 고라니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갔네요."
"말했잖습니까. 저거 엄살이라고. 자기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누구보다 빨리 도망가는 게 고라니거든요. 원체 겁이 많은 녀석들이라."
고라니가 도로에서 벗어난 덕분에 험비가 녀석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한세아도 핏물이 유리창에 팍 튀는 일이 생기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침부터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면, 먹은 것도 없는데 괜히 신물이 올라왔을 테니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핸들을 꺾었다.
우지직!
차량은 방향을 틀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차단봉을 밀어 부서트렸다.
덜컹!
차단봉에 연결되어 있던 차단기가 넘어지면서 타이어에 밟혔는지 차체가 한차례 흔들렸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병목안캠핑장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견인지역-주·정차금지]
나와 한세아가 타고 있는 차량은 너무 빠르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때 사람들의 산책길로 사용되었을 인도.
한때 가족들이 탄 차량들이 지나다녔을 차도.
하지만 현재는 군용 차량만이 외로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길목을 따라 하늘을 가릴 정도로 자란 나무들이 보인다.
해는 점점 높게 뜨고 있었으나 위를 메운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에 의해 주위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흔들리는 가지들 틈으로 간신히 내리쬐는 미약한 햇빛만이 유리창에 잠시 반짝였을 뿐.
옆에 계곡이 있는 탓인지 넝쿨처럼 줄기를 축 늘어트린 버드나무 하나가 가로등과 전봇대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 그마저도 일반적인 버드나무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어린이보호구역
SCHOOL ZONE (여기서부터 속도를 줄이시오.)
녹슨 표지판과 함께 아파트 단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흥화 브라운빌>
날카롭게 깨진 유리창, 그 안에서 펄럭이는 낡은 커튼, 기울어진 채 대롱대롱 달려 있는 실외기, 건물 전체를 감싼 넝쿨.
11층짜리 아파트에도 사람들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폐허로 변한 건물에는 나무 인간들이 몸을 숨기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을 법도 하건만. 그것들도 기이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수상한 느낌을 주었다.
분명 지도상으로는 여기서부터 훈련장 전까지는 아파트 단지가 줄지어 있었고, 중학교도 하나 있었는데 말이다.
차량의 배기음도 그리 작지는 않은데, 나무 인간들이 하나도 꼬이지 않다니. 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동에 주의를 더 기해야 할 듯싶다. 여기서 이동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니 그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세아씨, 뭐라도 보이면 바로 말해주십쇼. 저도 보긴 하겠지만 미처 못 보고 넘어가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
"네, 걱정 마세요."
경비실이 있는 단지 입구를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은 이리저리 넘어져 있는 오뚜기 주차콘과 잔뜩 부식된 차량들이 넝쿨에게 먹히고 모습. 그것의 줄기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인간의 흔적을 없애고 있는 광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철골에도 체액들이 영향을 미쳐 폭삭 주저앉게 만들기도 하겠지.
그럼 어찌어찌 살아남고 있는 사람들이 위험한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아, 그리고 현우씨. 아까 고라니 때문에 말하지 못한 게 하나 있는데."
불쑥 한세아가 총의 안전장치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 뭡니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혹여 멀쩡해 보이는 식당이라도 있다면 잠시 차를 멈춰 서 뭐라도 챙겨볼 심산이었다.
<숲속의 생! 막걸리> <수리산 호프·치킨> <창박골 막국수> <병목안 연탄구이>
식당 자체는 많았지만, 그뿐이었다. 단 하나도 멀쩡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끼기기긱-
내심 실망한 내가 핸들을 꺾자 험비는 방향을 틀어 좁은 길목으로 진입했다.
철컥-
"어제 현우씨가 닭은 못 난다고 그랬잖아요···."
난데없는 장전 소리에 흠칫 놀라 옆을 바라보니 한세아가 권총에서 꺼낸 탄알 한 발을 손가락으로 굴리고 있었다. 방금 내가 들은 소리는 빠진 탄창을 다시 끼우는 소리였다.
"······그거 아직 신경 쓰고 있었습니까?"
"자꾸 생각나는 걸 어떡해요. 아무튼! 만약 제가 날개가 있었다면 현우씨 말대로 날지는 못해도 활강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 저희가 그 다리 건널 때도 좀 더 쉽게 건널 수 있었을 테고···. 어차피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가는 거였잖아요."
"아니, 뭐. 그렇겠죠."
과연 활강만으로 200m에 달하는 거리를 넘을 수 있는가는 둘째 치고, 나는 한세아가 여태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에 일단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끝이 아니고 따로 있어요. 어제 새벽 내내 뭘 할 수 있나 곰곰이 생각해봤거든요? 지수씨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이능이 있고, 예린이도 요정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저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 한세아에게도 이능이 하나 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일행 중 가장 먼저 푸른 조각에 접촉한 것이 그녀였던 까닭이다.
비록 무의식적이라고 하더라도 푸른 입자를 일상 생활에 사용하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푸른 입자의 사용 능숙도는 지수보다 한세아가 한 수 위일 수도 있었다. 이능을 아직 발현만 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리고.
"지금 잠깐 직진 코스일 때 저 한번 봐봐요. 아니, 저 말고 이 총알이요."
한세아는 그러한 내 추측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파앗-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총알이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빨리 눈으로 보여 줄 것이라고 예상은 전혀 못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