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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14화 (215/497)

Chapter 214 - 214. 창박골 예비군 훈련장 (2)

우로 꺾인 길을 따라 들어가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연병장이었다.

정확히는 연병장 위를 덮은 가시 넝쿨 밭이었지만.

"···현우씨, 옷 단단히 입어야겠어요. 장갑은 필수고."

한세아는 가방에서 목장갑 한 켤레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곧바로 꼈다.

단순히 목장갑일 뿐이라 외부의 침입을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바로 가시가 피부에 닿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단 최대한 건물 앞까지는 가 보겠습니다. 가시들이 조금 크긴 하지만 타이어가 어떻게든 버텨줄 것이라 믿어 봐야죠."

험비에 탑승한 상태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넝쿨에 달린 가시. 차량에 달린 작은 유리창으로 바닥을 보면 넝쿨 줄기를 따라 길게 나 있는 손가락만한 가시들이 보인다.

비록 식물에 나 있는 가시에 불과할 뿐이지만, 군용 타이어에 구멍을 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그만큼 가시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일반 타이어가 아닌 군용이라 해도 구멍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부르르릉- 지지직- 뽀작!

타이어가 굴러갈 때마다 어지럽게 얽혀 있는 넝쿨들이 말려들어가며 붙어 있는 가시들이 이리저리 쪼개진다.

푸쉬이익-

짓이겨진 줄기와 부러진 가시에서 검은 체액들이 뿜어진다.

일반 넝쿨이 투명한 체액을 내뿜는 것과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스프링쿨러처럼 흩뿌려지는 검은 체액들은 불길함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섣불리 닿지 않는 것이 좋겠지.

끼이이익-

나는 강당 겸 생활관처럼 보이는 건물 앞에 험비를 세웠다.

"세아씨, 전에도 말한 부분이지만 위험해지면 총 바로 쏘십쇼. 총 소리는 나무가 막아줄 겁니다. 무엇보다 총알도 시험해 봐야죠."

"넵! 걱정 마세요!"

내 신신당부에 한세아는 걱정 말라며 권총을 들어 보였다. 물론, 총을 쏠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이 상책.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돌발 상황이 생길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때가 돼서 총을 쏠까 말까 고민하기에는 늦는다. 이렇게 미리미리 총을 쏴도 된다는 인식이 머리에 박혀 있어야 곧장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주변이 전부 산으로 둘러싸인 예비군 훈련장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덕분에 사방으로 퍼지는 사격음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막지는 못해도 적어도 멀리까지 퍼지는 것을 방지해주겠지.

덜컹-

나와 한세아는 차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내렸다.

둥근 파란 지붕을 가진 강당, 그 옆에 딸린 작은 교육장, 일렬로 세워진 컨테이너 칭고들, 매우 넓은 연병장 겸 주차장, 쓰러진 간이 천막들.

그리고 언덕 위의 사격장.

"세아씨, 우선 큰 건물부터 둘러봅시다. 여기 보고 나서 PX나 탄약 창고 확인하자고요. ···탄약고는 없을 확률이 크지만 일단 쭉 탐색하면 뭐라도 나올 겁니다."

나는 훈련장의 경계선을 따라 수북이 쌓인 바위, 나무, 흙더미 따위들을 보며 말했다.

이것들이 주변을 메우고 있는 것 또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탓일 것이다. 아마 지진과 폭우에 의해 산기슭 위에서부터 쓸려내려 온 모양이다.

훈련장 건물들은 우리가 지금껏 지나온 도시에 있던 건물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여전히 깨진 유리창 너머로 넝쿨들이 들어가 있었고, 짙은 풀냄새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다만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넝쿨에 큰 가시가 수없이 달렸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가시가 달린 넝쿨이라···.'

엄밀히 따지면 줄기에 가시가 달린 넝쿨은 처음 보는 개체가 아니었다. 예전에 예린이를 찾기 위해 수원 고등학교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도 가시 달린 넝쿨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때의 넝쿨에는 지금 나와 한세아가 보는 넝쿨과 달리 새끼손톱만 한 가시가 드문드문 나 있기만 했지만 말이다.

저주받은 시체들의 화원에 있었던 넝쿨과 동일한 종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물며 그보다 더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 않은가.

질퍽- 질퍽-

"바닥이 완전 진흙이네요. 어제 비 와서 그런가 봐요."

한세아가 신발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진흙들이 인정사정 없이 신발을 더럽혔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세아씨, 이것 좀 보십쇼."

고개를 끄덕인 나는 도끼로 넝쿨을 밀어내며 말했다. 한세아는 곧바로 내 옆에 착 달라붙어 넝쿨을 유심히 살폈다.

찌익-!

후두둑···

넝쿨은 외부 자극을 받자 가시 끝부분에서 검은 체액을 쏘았다. 가시에서 검은 체액을 내뿜는다는 것도 수원 고등학교에 있던 넝쿨과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질퍽-

혹여 튄 체액이 우리에게 닿지 않게 나와 한세아는 좀 더 뒤로 물러났다.

"독. ······일까요?"

"글쎄요. 잠시만 뒤로."

나는 찜찜한 눈으로 가시를 바라보는 한세아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와 동시에.

콰직!

도끼로 넝쿨을 일부분 잘라 내 분리시켰고,

화르르륵!

손에서 작은 푸른 불꽃을 곧장 쏘아 넝쿨을 불태웠다.

역시나일까. 예상대로 가시 넝쿨이 타오르면서 검은 입자들이 부스스 떨어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넝쿨은 푸른 불로 태우게 되었을 때, 단순히 하얀 재로 변할 뿐이건만.

마음 같아서는 연병장을 넘어서 훈련장 전체를 뒤덮고 있는 가시 넝쿨 밭을 모조리 태우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불가능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푸른 입자를 최대한 아껴야 하기도 했고.

휘이이······

가시 넝쿨이 타면서 생긴 회색 연기가 소소소 일어난 바람과 함께 허공에 어지럽게 수놓인다.

킁킁-

"응? 현우씨,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아요?"

손을 휘적여 연기를 밀어내던 한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도 맡아보려고 했지만, 냄새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였다.

부스럭!

예고도 없이 훈련장 끝자락에 있는 수풀에서 고라니가 튀어나온 것은.

"······!"

"저 녀석 아까 차로 쳤던 고라니예요!"

다 외형이 비슷하게 생긴 고라니인데 어떻게 새벽의 고라니와 동일한 개체라는 걸 한세아가 바로 알아차렸는지에 대한 건 둘째 치고, 중요한 것은 변종 고라니가 가시 넝쿨 밭에 스스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끼에에에엑!]

침을 질질 흘리고 잔뜩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고라니.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휘리리릭!

그리고 그런 고라니를 순식간에 붙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시 넝쿨. 생명체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바닥을 덮고 있는 줄기들이 우수수 일어나 날뛰는 고라니를 휘감은 것이다.

우직! 우드득!

[끼이이이이익!]

고라니는 자기 몸이 가시에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순히 발버둥만 칠 뿐이었다. 녀석은 빠져나가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넝쿨에 몸을 문대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단순히 방향 감각을 잃은 탓은 아닌 듯했다. 기이할 정도로 크게 확장된 고라니의 동공에는 큰 고통이 담겨 있었으니까.

찌지직!

가시들이 질긴 가죽을 인정사정 없이 긁어댄다. 송곳처럼 뾰족한 가시들은 고라니의 몸에 수많은 선을 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새빨간 핏물을 튀기면서.

그러다가.

푸욱!

수많은 가시들이 몸 깊숙이 박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내, 고라니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울룩불룩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부에 가스가 차는 것 같기도, 강제로 액체가 주입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이런 씹! 세아씨! 제 뒤로 오십쇼!"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한 내가 다급하게 한세아를 품에 넣고 몸을 돌리는 그 순간.

퍼-어어엉!

철퍽- 후두두둑-

등 뒤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흙만큼이나 질척이는 살점과 뼈가 사방으로 비산하는 소리였다.

"꺄아악!"

한세아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나를 꽉 안았다.

타타탓-

육중한 차체가 위에서 떨어지는 살점을 막아줄 것이라 판단한 나는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험비 뒤로 이동했다.

등을 맞대고 있는 차체에서 차가운 냉기가 전해진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뒤이어 머리를 잠식한 것은 고라니가 어째서 갑자기 넝쿨밭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는가 하는 의문. 하지만 그런 의문을 해결하는 것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내밀어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또옥···

또옥···

한차례 포식을 마친 넝쿨의 가시에서 다시금 검은 체액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스르륵- 스르륵-

수많은 줄기 중 일부는 흙 위에 떨어진 살점을 한데 그러모아 어느새 생긴 봉우리 안에 집어넣기에 바빴다.

휘이이이······

바닥에 가라앉은 비릿한 혈향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나와 한세아의 후각을 자극했다.

"후우···."

"···현우씨, 방금 고라니가 터진 거죠? 그, 가시에 찔려서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확실합니다."

"그럼······ 저희가 차 안타고 넝쿨 밭을 지났다면 저렇게 됐을 수도 있었겠네요."

한세아는 끔찍한 상상이라도 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하긴 지금 얼핏 보이고 있는 사방으로 튄 살점들이 형성한 분위기가 살벌하기는 했다.

그리고 푸른 입자를 몸에 두르고 있으니 고라니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한세아의 말마따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절대라는 건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다시 차타고 돌아가는 건···."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조심스럽게 복귀 의견을 내었지만,

"아뇨!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저 넝쿨이 위험하긴 해도 맨몸으로 가까이 가거나 함부로 자극하지만 않으면 될 거고, 오히려 저것 때문에 다른 나무 인간들이 없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빨리 털고 빨리 빠져나가요, 우리."

한세아는 고심 끝에 고개를 흔들면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 근처에 있는 건물들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탓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결국 남는 곳은 여기 훈련장뿐이었다.

식수는 충분했지만, 식량이 모자란 것이 우리의 처지다. 챙겨야 하는 입도 늘어났기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뭐라도 들고 가져가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앞장 설 테니 뒤따라 들어오십쇼."

"넵! 넝쿨이 고라니에게 정신 팔렸을 때 얼른 들어가죠! 능력에 관해서 아직 말하지 못한게 하나 더 있는데, 나머지는 털면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아직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찌그러진 철판을 뒤로한 채,

경고문

이 지역은 군 작전 지역이므로 허가되지 않은 인원의 무단출입 및 사진 촬영을 금함.

-0000부대장-

나와 한세아는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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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에 들어갈 삽화 완성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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