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5 - 215. 창박골 예비군 훈련장 (3)
끼기긱······
나와 한세아는 뒤로 쓰러진 철문을 밟고 건물 내부로 서둘러 들어갔다. 안쪽의 모습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 바닥에 깔린 흙 알갱이들, 건물 벽면을 따라 붙어있는 가시 넝쿨, 가시에 걸려 있는 전투 조끼와 군복들.
군인들이 살아 있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군복만 남아 있는 이유는 김청수의 형이 그랬듯이 몸이 녹아 내린 탓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 않고서야 옷만 달랑 남아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럼 그의 형은 여기를 맨몸으로 통과했다는 말인가?
험비 한대와 약간의 식량만 겨우 챙겨서?
대대나 중대 규모의 부대가 항상 상주하는 곳이 아닌 단순히 예비군 훈련장임에도 불구하고, 험비를 타고 다니는 지휘관이 있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순찰과 탐방이라는 명목으로 한 번씩 왔다가 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대부분은 친분이 있는 지휘관들끼리 차를 얻어 타고 오는 경우였지만.
그리고 결국 김청수의 형도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통과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는 셈이었다.
"휴우···, 현우씨. 이건 제 생각인데요. 가시 넝쿨들 푸른 불로 태우면 안될 것 같아요."
바싹 내 뒤에 붙어 있는 한세아가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가시 넝쿨 밭을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연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고 했었죠?"
"맞아요. 묘하게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었어요. 확실해요. 게다가 푸른 조각 안에 입자도 줄어들었다구요."
그래, 냄새.
내가 넝쿨 줄기를 일부분 잘라 푸른 불로 정화를 했을 때,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과 함께 희미한 냄새가 나긴 했었다.
한세아의 말처럼 달짝지근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코를 불쾌하게 건드리는 향이 퍼지긴 했다는 말이다.
그 냄새가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친 고라니가 수풀 속에서 뛰쳐나와 넝쿨 밭에 곧장 몸을 던져 넣었었다.
그리고 한세아가 가진 푸른 조각의 입자 잔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검은 입자가 무슨 짓을 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러한 점을 따지면 푸른 입자가 고라니처럼 정신에 혼란을 주는 영향을 제거했다는 말이 되겠지.
만약 우리에게 푸른 입자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푸른 불은 봉인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효과적으로 넝쿨을 태울 수 있기야 하겠으나 그것이 지속해서 푸른 입자를 소모시키고, 주변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예상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상황이 급박하면 상관없이 불로 전부 태워 버리긴 할 것이다. 그래도 그전까지는 최대한 도끼와 권총으로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듯싶었다.
"현우씨, 저기 문 열려 있는데 한번 들어가 볼까요?"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하던 한세아가 비스듬히 열린 문 너머를 가리켰다.
여기서도 얼핏 보이고 있는 좁은 방 안에는 낡은 컴퓨터와 의자, 오래되어 때가 탄 에어컨과 프린터기 하나가 설치가 되어 있었다.
일종의 행정실을 담당하던 방인 듯했다.
"빠르게 둘러보고 나옵시다. 아마 저기서 얻을 건 없을 겁니다."
나는 앞장서면서 몸을 천천히 풀었다.
끼익···
도끼 끝으로 문을 밀어 열자, 구석에 있는 하얀 철제 캐비닛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온다.
"어?! 현우씨, 저거!"
한세아가 반색을 하며 가리킨 것은 굳게 닫혀 있는 총기 보관함이었다.
하지만.
"저건 못 씁니다. 저걸로 사격하면 역으로 우리가 다칠 걸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총기보관함 안에는 당연히 총기가 여러 정 들어 있었지만 내가 그다지 기뻐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구멍이 송송 뚫린 보관함에 들어 있는 총기가 멀쩡할 리가 없었으니까.
바깥에 방치된 차량들도 잔뜩 부식이 되어 고철이 되었건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건물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게다가 어김없이 넝쿨이 자라 있기까지 했다.
덜컹- 덜컹-
"아···, 정말 총이 엄청 녹 쓸어 있네요. 상태 보니까 손질로 감당이 안 될 것 같고···. 하긴, 당연하겠죠. 건물 안이라고 부식이 되지 않을 리는 없는데 말이에요. 아휴, 아까워라. 여기 안에 대충 3정 정도 들어 있는데···. 이거 가져가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보관함을 수차례 흔든 한세아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총기보관함을 흔들 때마다 안에서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아씨, 어차피 이건 기대도 안 했어요. 제가 찾는 건 따로 있거든요."
나는 한세아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네? 저희 이런 거 주우려고 온 거 아니었어요?"
"비슷하긴 한데, 좀 다릅니다."
일반적인 군부대였으면 나무 인간으로 변한 군인들을 처리한 후 곧장 탄약고부터 갔겠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이곳이 예비군 훈련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비군 훈련장에는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물품들이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침 3월 초에 세상이 변했으니, 당시 훈련장에서는 훈련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리하고 있던 예비군 물자를 옮겨 놓기 시작했겠지. 정확히는 그랬기를 바랐다.
바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군인들의 흔적들은 아마도 나름 군시설이었기에 이곳에 상주했었던 기간병들의 흔적일 가능성이 컸다. 혹은 외부에서 파견된 인원들이거나.
비록 훈련기간에만 개방되는 훈련장이라고는 하나 건물이나 사격장을 유지 및 보수하는 인원들이 있어야 했을 테니까.
그들이 죽은 것이 안타깝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노리는 것은 하나였다. 바로 그들이 관리하고 있던 예비군 물자 말이다.
"이런 보관함 말고 다른 곳에 따로 포장된 총기들이 놓여 있을 겁니다. 그걸 찾아야 해요. 총기 자체는 오래 됐을지 몰라도 진공 포장 전에 확실하게 총기수입하고 보내니까 상태는 오히려 나을 거고요."
"그런 게 있었구나···. 알았어요! 그럼 얼른 나가서 우리 같이 찾아봐요!"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휘날리는 먼지만 옷에 잔뜩 묻힌 채, 행정실에서 나왔고 옆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양측으로 자리를 잡은 나무판자로 된 침상, 다닥다닥 붙어 있는 관물대, 어지럽게 열려 있는 서랍들.
이번 방은 내무반이었다. 방문 옆에 달려 있는 팻말에 다른 표식은 없었지만, 아마 이 장소를 휴식실 겸 생활관으로 썼던 것 같았다.
개인 침대가 아닌 침상인걸로 보아 하니 현재 나와 한세아가 있는 건물도 원체 오래된 것이라 굳이 바꾸진 않았던 모양이다. 애초에 사용하는 인원도 적으니 바꿀 필요성을 더욱이 느끼지 못했겠지.
칠이 벗겨진 관물대에는 잔뜩 헤진 상태의 군복과 활동복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회색의 석재 바닥에는 끈이 꽉 묶인 전투화들이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었다.
휘이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비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잔뜩 들어왔는지 내무반에는 물때와 먼지가 짙게 깔려 있었다.
"세아씨, 혹시 지수 발 사이즈 아십니까?"
나는 넝쿨을 피해 가며 그나마 새것처럼 보이는 군화 한 켤레를 주워들었다.
워커는 겉만 더러워 보였을 뿐, 속은 멀쩡했다. 지수가 신고 있는 신발과 사이즈가 맞다면 하나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지수에게는 예비용 워커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아마 240? 그 정도 될 걸요?"
한세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내가 들고 있는 군화의 사이즈는 240을 훌쩍 넘는 280이었다. 앞뒤로 5정도의 사이즈는 꽉 조인 끈으로 얼추 조정할 수 있다고 해도 차이가 40이나 나서야 예비용으로 쓰기에는 쓸모가 없었다. 아쉽지만 다시 워커를 내려놓았다.
억지로 신으려면 신을 수야 있겠지만, 그 탓에 괜히 발에 물집이라도 잡히면 낭패지 않은가.
"그보다 현우씨! 저 어때요? 어울려요?"
옷걸이에 걸려 있는 군복을 하나 꺼내 자기 몸 위로 덧대어보는 한세아.
"······세아씨가 여군이었으면 다른 사람들 정신 못 차렸겠는데요."
"현우씨도요?"
"아니, 뭐 저야 이미···."
히히 웃는 한세아의 모습에 괜스레 민망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기 마음을 내게 고백한 이후부터 알게 모르게 꾸준히 매력을 어필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미 넘어갔건만.
"근데 이거 입지는 못하겠어요. 지퍼가 안 올라가요."
한세아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얼굴만 봐도 좋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이내 지퍼를 닫는 시늉을 했다. 중간까지 올라간 지퍼는 그녀의 가슴에 걸려 끝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군복 자체 사이즈가 그리 작지는 않아서 억지로 올리면 잠글 수야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면 숨 쉬는 게 많이 답답하겠지.
"알았으니까 위로 올라갑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제일 상태 괜찮은 군복 한 벌만 챙기고요."
한층 더 민망한 기분이 든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가만히 두다가 한세아가 어디까지 행동할지 몰랐던 까닭이었다. 큰 불로 크기 전에 진압해야 할 듯했다.
이윽고.
"에이, 알았어요."
나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한세아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 높은 층수가 아닌, 총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1층을 전부 탐색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당연하게도 2층뿐이었다.
1층의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당이 있었으나 거기에는 오로지 넝쿨만이 존재했기에 더 둘러볼 필요가 없었다.
저벅- 저벅-
회색으로 변한 계단 타일을 밟으면서 위로 올라가자 또 하나의 철문이 보였다.
[영상 시청 교육장]
하얀 플라스틱 팻말이 기울어진 채 나와 한세아를 마주 보고 있었다.
꾸드득···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
"세아씨, 내부에 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봉오리일 가능성이 커요. 예전에 저랑 지수가 변종 넝쿨을 조우했었다는 이야기해준 거 기억나시죠? 당장 연병장에도 봉오리가 있었잖습니까."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세아에게 작게 속삭였다.
"네네, 기억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요?"
"아뇨, 한번 보기는 할 겁니다. 2층에 있는 방도 여기가 유일하기도 하고요."
화장실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건물 벽면이 무너져 입구를 막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음······. 알았어요. 저도 마음의 준비 하고 있을게요."
한세아는 총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럼 문 열겠습니다."
"넵···!"
한 손에 도끼를 강하게 쥔 내가 조심스럽게 교육장 문을 연 순간,
휘리릭!
가시 넝쿨의 줄기 다발들이 문이 열리면서 생긴 틈을 지나 우리에게 곧장 쇄도했다.
쐐애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