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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17화 (218/497)

Chapter 217 - 217. 창박골 예비군 훈련장 (5)

"세아씨!"

나는 봉오리에서 체액이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황급히 그녀를 뒤로 물렸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었다.

"괜찮습니까?!"

"넵···! 괘, 괜찮아요···! 아흐······. 퉤퉤!"

한세아는 시야를 가리는 끈적한 체액들을 닦아내며 겨우 답했다. 나 또한 그녀가 눈을 뜰 수 있도록 얼굴에 달라붙은 점액들을 손으로 밀어주었다.

그래도 그나마 재빠르게 대처했기에 상체만 젖는 수준에서 그쳐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한세아는 체액을 전부 뒤집어쓰고 말았을 것이다.

촤르륵-

그녀의 얼굴에 있는 점액들이 자리를 옮겨 내 손에 치덕치덕 엉겨 붙는다.

점도는 일반 넝쿨 체액보다 높았지만 그것들과 성분 자체는 다르지 않는 듯했다. 특히 검은 체액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한세아가 가지고 있는 푸른 조각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위험한 성분이 들어 있지는 않다는 뜻이리라.

"이게 뭐야······."

살결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체액이 주는 불쾌함에 진저리를 치는 한세아. 그녀가 머리를 흔들 때마다 점액질이 기다란 세로선을 그리며 또옥 또옥 떨어졌다.

"미안합니다, 세아씨.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니예요. 그냥 운이 안 좋았던 거죠. 저랑 현우씨는 충분히 떨어져 있었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마세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던 한세아는 내가 손을 상체로 옮기는 순간, 신음을 내뱉었다.

"흐앙! 혀, 현우씨. 도와주는 건 좋은데 거기는 조금만 살살 만져 주세요···. 너무 세게 잡으면 아파요···."

그녀는 몸을 배배 꼬았다. 능글맞은 태도처럼 보였으나, 이상하게 몸이 바싹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

말문이 턱 막힌 내가 슬그머니 손을 떼자 한세아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에는 미약한 안도감이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까 군복 챙겨 와서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투명한 체액이 한세아를 적신 탓에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이 살에 그대로 달라붙었고, 살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가슴이 더 부각되는 모습에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민망했다.

"네? ···아."

한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내 시선이 흘깃흘깃 거리는 곳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확 붉혔다.

팔을 들어 가슴팍을 가렸지만 그런다고 가려지는 크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아래에서부터 들어 올려진 듯한 형태에 훨씬 낯부끄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

그녀는 내가 몸을 돌리고 있는 사이 조용히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묘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지이익-!

톡톡-

지퍼가 위로 올라가는 소리를 끝으로 한세아는 다 갈아입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최대한 폼이 넉넉한 거로 챙긴 덕분에 지퍼를 무사히 잠글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자, 그럼 이제 이 녀석 입 좀 벌립시다. 이유는 몰라도 봉오리가 포장된 총기류를 입에 넣고 있었던 것 같거든요."

얼추 상황이 진정되었다고 판단한 나는 도끼로 봉오리를 가리켰다.

"확실히 입에 뭐가 들어 있긴 하네요! 현우씨 말대로 총기면 좋겠어요."

한세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평소에 막 달라붙던 태도와 달리 지금 그녀의 움직임은 소심하게 변해 있었다.

급속도로 수분이 빠져나가 엉망으로 찌그러진 모양을 취하고 있는 봉오리는 예전에 나와 지수를 옮기던 봉오리가 죽은 것과 동일한 모습이었다.

찌직- 찌지직-

나는 혹여 체액이 한차례 더 쏘아질까 하는 마음에 최대한 멀찍이서 도끼날로 쭈글쭈글하게 변한 봉오리를 찢었다.

철퍽- 철퍽-

내부에 고여 있던 체액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햇빛을 반사시키는 비닐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기 한점 없는 비닐팩, 검은 물체를 둘러싼 기름 종이, 언뜻언뜻 보이는 총구와 개머리판.

이제는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있었다.

봉오리 안에 들어 있던 것이 총기라는 것을.

"와! 현우씨! 총이예요!"

얼굴을 환하게 만들며 기쁨을 표출하는 한세아.

"음···. 세아씨, 이 중에서 멀쩡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들만 따로 빼서 가져갑시다."

"넵!"

나와 한세아는 비닐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모든 비닐팩이 무사하지는 않았다. 봉오리가 입에 물고 있었던 것들이라 비닐이 녹아내린 부분도 있었고, 그러한 것들은 어김없이 부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안에 들어 있던 포장팩들을 하나씩 꺼내 보니 체액이 고이는 하단부에 깔린 진공 포장팩은 무사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

그나마 무사한 포장팩들은 위쪽에 놓여 있던 것들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건질 수 있었던 총기는 두 정뿐이었다.

어림잡아 스무 정 정도 있었건만. 간신히 두 정만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하나도 못 건지는 것보다 훨씬 낫기는 했다.

"이건 무슨 총이예요?"

한세아가 비닐에 묻은 체액을 털어내며 물었다.

"m-16이라는 소총입니다. 아까 밑에 있었던 잔뜩 부식된 총기는 k-2고요."

"응? 둘이 다른 총이었구나···."

"그야 지금 우리가 구한 건 예비군용으로 보관된 것들이고, 밑에 있는 건 현역용이니까요. 세아씨, 그거 들고 이제 나가죠. 이 건물에서 둘러볼 곳은 더 없어요. 총기도 당장 못 쓰니까 챙기기만 합시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답했다.

원래 목표였던 총기를 구했으니 이곳에 볼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부식 방지용으로 덕지덕지 묻은 기름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소총을 사용할 수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탄약이 없었다.

"남은 건 컨테이너 창고들뿐이네요."

"네, 아마 컨테이너 중 하나가 PX일 겁니다. 거기에 식량이 남아 있기를 바래야죠. 그리고···."

"그리고···?"

"아닙니다. 일단 나가면서 말해드리겠습니다."

총기에 이어 내가 하나 더 바라는 것은 탄약이었다. 일반 군부대처럼 탄통들이 쌓여 있지는 않을 것은 분명했다.

다음날 사격 분량을 미리 옮겨 놓았느냐 아니면 매뉴얼대로 당일 옮기려고 했느냐의 차이가 창고에 탄통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르겠지.

그러니 확인 전까지는 그것이 확실하게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제발 있기를 바랐다.

마음 놓고 쓸 양은 되지 못하더라도 기껏 구한 총에 맞는 총알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벅- 저벅-

나와 한세아는 가시를 밟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세아씨, 이제서야 말하는 건데 총알 위력 대체 뭐였습니까? 무슨 에너지파처럼 나가던데."

나는 봉오리가 형성한 넝쿨벽을 강제로 뚫어 버리는 광경을 회상했다.

푸른 섬광이 궤적을 그리면서 넝쿨벽을 뚫은 것으로도 모자라 봉오리를 절반 넘게 뜯어 버리는 위력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도 깜짝 놀랐다구요. 평소처럼 쐈는데 평소랑 결과가 너무 달라서요. 근데 여러 번은 못 쏴요. 반동이 크지만 그건 사실 별 문제가 안 되고, 가장 큰 문제는 총이 너무 과열된다는 거예요."

한세아는 권총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가 총을 쏜 직후, 실제로 총이 뜨겁게 달궈져서 손대기 힘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또 다른 문제는 푸른 입자 소모량이 너무 심하다는 거? 쏘고 나서 보니까 알게 됐는데, 사격을 할 때도 만만치 않은 푸른 입자가 소모되더라구요. 한 20% 정도? 날아갔었어요."

"그렇게나 많이요?"

"그렇다니까요. 진짜 급한 상황 아니면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 같아요. 내구도가 대폭 깎이기도 하구요."

"뭐, 푸른 입자 소모량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어차피 제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옆에 있는 이상 푸른 입자가 부족할 일은 없을 테니까.

물론, 한창 싸우는 중일 때면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강화된 총알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 위기를 벗어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그렇죠! 항상 제 옆에 현우씨가 있을 거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건만. 뭔가 한세아가 말하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장난스레 웃는 것도 그러한 느낌에 한몫 더해주고 있었다.

"크흠!"

나는 괜스레 헛기침하며 손을 들어 입단속을 시켰다. 이제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되니 주변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휘이이이···

산기슭을 훑은 바람이 이번에는 나와 한세아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바람에는 짙은 풀 냄새와 미약한 혈향이 담겨 있었다.

아직 고라니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하긴, 우리가 건물을 탐색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변종 고라니가 죽은 장소에 있던 또 하나의 봉오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로 향하는 움직임을 보여 주었던 봉오리. 아마 수풀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창고로 이동한 듯했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몸을 낮춰 땅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들이 없는지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이윽고, 나와 한세아는 총기가 담긴 가방을 고쳐 매며 강당 건물 옆자락에 붙어 있는 컨테이너 창고로 향했다.

"저기 자물쇠가 달려 있는 곳부터 가 봐요 우리."

한세아는 문고리를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를 가리켰다.

자물쇠가 걸려 있는 컨테이너 창고들은 총 5채 중 3채.

나머지 2채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텅 비어 있는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니 구태여 갈 필요는 없겠지.

무언가 물자가 남아 있으려면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은 곳으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누가 열려고 했었나 봅니다. 근데 결국 열지는 못했네요."

가까이 접근하니 두꺼운 자물쇠에 여러 흠집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돌로 내려치기라도 한 듯 움푹 패인 곳도 있었다.

캉!

있는 힘껏 내려친 도끼에 의해 한 방에 박살 나는 자물쇠.

"들어갑시다."

"넵···!"

나와 한세아는 곧장 문을 열고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와."

우리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간이 선반에 과자, 음료수, 생필품 따위의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정리되지 않고 바닥에도 마구잡이로 굴러다니고 있기는 했으나 이 정도면 양반이다.

"현우씨! 여기 옷도 있어요!"

한세아가 상자에서 집어 든 것은 흔히 로카티라고 불리는 검은색 티셔츠였다. 그녀는 사이즈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휙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현우씨, 잠깐 나가 있어요. 저 이걸로 갈아입을래요."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라 너무 더워서 그래요. 이거 재질 보니까 입으면 엄청 시원할 것 같은데···."

실제로 한세아는 땀으로 범벅된 상태였다. 긴장감과 줄기를 피하고자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생긴 체력 소모 탓에 열이 잔뜩 오른 모양이다.

"여기 창고 다 털 때까지만 편하게 입고 싶은데,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죠. 그, 다 갈아입으면 부르십쇼. 전 나가 있겠습니다. 아니다, 차 끌고 여기 가까이 댈 테니까 그전까지는 갈아입으십쇼"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컨테이너 바깥으로 나갔다.

부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차량을 끌고 돌아오자,

"현우씨! 이제 이거 같이 옮겨요!"

창고 내부에서 한세아가 타이밍 맞게 나를 불렀다.

옮기는 것이 산더미였기에 나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보인 그녀의 모습에 무심코 감탄사가 나왔다.

"오······."

가슴팍에 새겨진 R.O.K.A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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