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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18화 (219/497)

Chapter 218 - 218. 창박골 예비군 훈련장 (6)

"······사이즈가 좀 작은 것 같습니다, 세아씨."

나는 괜스레 침을 삼키며 한세아의 팔쪽에 붙은 태극기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약간 스판 같은 느낌이 있어서 답답하거나 하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바람이 솔솔 통하는 게 시원해요! 어깨에 딱 맞기도 하구."

한세아가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앞으로 쓱 늘어난 티셔츠 너머로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녀의 말처럼 답답해 보이지는 않았다.

쿨론 소재로 이루어진 옷이니 당연히 신축성이 좋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재질이 늘어나서 바람구멍이 벌려지는 것은 예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보여도 상관없는지 몰라도 확실한 것은 그녀가 더위가 한결 가신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 빨리 정리해서 얼른 차에 실자구요!"

기세를 회복한 한세아가 내 어깨를 톡톡치며 작업의 시작을 알렸다.

"어휴, 알겠습니다."

자꾸만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한세아 때문에 나날이 한숨이 늘어만 갔다. 이러다가 언제 한번 크게 사고 치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숨을 내쉬며 PX 내부를 둘러보았다.

컨테이너 천장에 있는 불 꺼진 형광등, 구석에 설치된 오래된 에어컨, 간이 카운터, 철망이 설치된 유리 창문, 한쪽 벽에 설치된 금속 매대, 그곳에 쌓여 있는 온갖 먹거리들, 선반 상단과 하단을 차지한 휴지 같은 생필품들.

비록 절반 이상이 바닥을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상자째로 엎어져 있었기에 건질 수 있는 것들은 상당해 보였다.

무엇보다 휴지나 치약 같은 생필품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본인의 청결에 신경을 많이 쓰는 지수도 한아름 들고 간 생필품들을 보면 많이 기뻐할 듯했다.

그런 것들은 지속해서 꾸준히 소모되는 소모품이기 때문에 금세 바닥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근데 뭔가 양이 좀 적은 것 같기도 하고······.'

컨테이너의 크기에 비해 들어 있는 물품들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는 것은 관리병이 물품을 보충하기 전에 안타깝게도 사고를 당했다는 의미이리라.

누가 털어간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깨진 유리창이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문 또한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지 않았던가.

그나마 남아 있던 것은 자물쇠를 부수려고 한 흔적뿐.

아마 그러한 자국을 남긴 사람은 김청수의 형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아닐 가능성이 있긴 해도 일단은 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김청수의 형 또한 나와 한세아처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왔을 터인데. 창고를 코앞에 두고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넝쿨의 가시에 긁혀 차 한대만 겨우 끌고 캠핑장으로 돌아갔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에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결국 가시의 독에 의해 몸이 녹아 죽기까지 했으니 안타까운 마음은 한층 더해 갔다.

나는 습기에 눅눅해진 노란색 박스를 집어 들었다.

부스럭!

안에 들어 있는 개별 스틱들이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이 상자는 예린을 포함한 아이들이 매우 좋아할 것 같은 초코 가루 스틱이었다. 못해도 2~3달은 넉넉하게 먹을 분량이었다.

한 상자당 20개씩 들어 있고, 그런 상자가 세 상자나 있었으니 말이다.

'···근데 우유가 없는데, 이거 그냥 물에 타 먹어도 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물에 타먹어보고 정 이상하면 아이스티를 타서 마시면 되지 않겠나.

나는 그리 생각하며 옆에 있는 아이스티 박스를 집어 들었다.

"아, 현우씨. 저기 아이스크림 냉동고 문은 열지 마세요. 아까 보니까 물이 녹은 것들만 있어서 괜찮을 것 같기는 해도 괜히 찜찜하잖아요."

상자를 주워들 때마다 희희낙락한 기색이 얼굴에 더해지고 있던 한세아가 불쑥 말했다.

그녀는 말하는 와중에도 손을 멈추지 않았고, 상자를 차곡차곡 바깥에 쌓아두는 중이었다. 나중에 한 번에 차로 옮길 심산인 듯했다.

"네네, 저번에 원룸 털 때 말해주신거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걱정 하지마십쇼."

실제로 냉동고 안을 보니 뿌옇게 변한 유리 너머로 얼음이 녹아 물이 고인 것이 보였다. 그동안 냉동고 문이 열리지 않은 덕분에 물이 증발하지 않고 남은 것이다. 자잘한 먼지들이 둥둥 떠다니는 고인 물은 미묘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쿵!

나와 한세아는 구슬땀을 흘리면서 PX에 있는 물자들을 하나씩 험비로 옮겼다.

발걸음이 왔다 갈 때마다 허전했던 차 내부가 잡다한 물자로 차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주었다.

다만 우리가 유일하게 챙기지 않은 것들은 주로 컵라면류였다.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기도 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뚜껑을 따서 확인도 해 보았으나 곧장 코를 자극하는 이상한 냄새가 났던 까닭이었다. 덕분에 입맛이 싹 사라지고 말았었지.

먹으려면 어찌 먹을 수야 있겠지만, 다른 식량들이 충분히 생긴 시점에서 굳이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괜히 먹었다가 탈이라도 난다면 그게 더 손해였다.

어지간히 사소한 물건조차 챙기는 한세아도 컵라면 면을 챙기지는 않았다. 대신 분말 스프와 건더기 스프를 챙겼을 뿐. 그마저도 분말이 정도 이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기까지 했다.

자신 혼자 먹는 것이 아닌 아이들까지 고려해야 하니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별을 철저하게 하는 그녀였다.

"읏차···, 얼추 다 챙긴 것 같죠?"

행복한 눈으로 상자를 손으로 쓸어내리는 한세아.

"더 가져갈 것도 없습니다, 세아씨."

나는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한 PX 내부를 흘깃 바라보며 답했다. 안쪽은 우리가 분리해서 버린 상자와 온갖 비닐 포장지로 가득 찬 상태였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니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어쩌겠는가.

분리수거를 한다고 해도 그것들을 수거하는 사람들이 오는 것도 아니고, 곱게 봉투에 전부 쑤셔 박는다고 해도 결국은 쓰레기 봉투 하나만 더 늘어날 뿐이건만.

"근데 그게 없네요."

"뭐가 없습니까?"

"전투 식량이요. 한 번쯤은 보고 싶었거든요. 맛도 궁금하고, 듣기로는 안에 이것저것 다양하게 들어 있다던데."

"아, 그건 여기서 취급 안할 겁니다. 일반 군부대가 아니라서 취사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부식 창고도 없으니까요."

그래, 훈련장은 단순히 그날그날의 예비군 훈련을 처리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취사장도 대부분 존재하지 않았고, 식사는 도시락으로 대체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전투 식량이나 각종 부식들을 보관하는 부식 창고 또한 대부분 없다고 보면 되었다. 어지간한 것들은 PX에서 해결하면 되니까.

"그럼 이제 남은 건··· 탄약뿐이네요?"

전투 식량이 없다는 소리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한세아는 다음 목표를 노렸다.

어깨가 뻐근해졌는지 손으로 툭툭 치는 그녀를 대신해서 나는 한세아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말랑한 피부가 손에 착 감겼다.

"흐아···."

"그렇긴 한데 솔직히 탄약이 있을 거라고는 장담은 못합니다."

"그렇구나···. 흐앗! 핫···! 거기 좀만 더 눌, 러 주세요···."

"여기요?"

"네헷···!"

신음을 흘리면서 갑작스러운 마사지를 즐기는 한세아. 처음에는 좀 놀라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 풀리는 근육에 얼굴도 풀어지는 그녀였다.

"우리 일단 다른 컨테이너들도 다 둘러봐요. 아, 덕분에 어깨 많이 풀렸어요. 고마워요, 현우씨."

다시 탐색 모드로 돌아간 한세아는 나를 꽉 안으며 감사를 표했다. 말랑한 감촉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바보같이 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예비군 훈련장의 PX에서 많은 소득을 얻은 나와 한세아는 PX 자물쇠보다 더 큼지막한 자물쇠가 걸려 있는 컨테이너 창고 앞으로 다가갔다.

캉!

하지만 내 도끼 앞에서는 자물쇠 정도야 무용지물. 큰 수고없이 손쉽게 딸 수 있었다. 정확히는 따는 것이 아닌 그냥 부셔버리는 것이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문만 잘 열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끼이익······

녹슨 경첩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

'제발 있어라···. 뭐라도 나와라.'

나와 한세아는 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서서히 열리는 문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설프게 깔린 장판, 매우 텁텁한 공기,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낡은 책상과 의자, 컨테이너를 반으로 가르는 철망.

그리고.

"어?! 현우씨, 저거!"

철망 너머 구석에 홀로 놓인 탄통.

"······!"

나는 도끼로 길목을 막고 있는 철망을 해체해 길을 텄다.

캉! 캉! 캉!

-철그럭!

몇 번의 도끼질에 넘어가는 철망.

우리는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가 탄통을 집어 들었다.

덜그럭! 덜그럭!

안에 무언가 들어있는 게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묵직하고, 내용물이 꽉 찬 느낌을 줄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손을 휘적거려 먼지를 밀어내는 것과 동시에 탄통 손잡이를 잡았다.

컨테이너 창고 자체가 꽉 막혀 있었다는 것과 탄통의 봉인도 제대로 되었다는 점을 감안 하면, 부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덜컹!

어찌나 꽉 닫혀 있었는지 순간 가해진 힘으로 입구가 크게 들릴 정도로 확 젖혀진 손잡이.

"하아······."

통 안쪽을 본 나와 한세아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쉬움을 담은 것이 아닌 생각처럼 일이 잘 풀려서 나온 기쁨의 한숨이었다.

"총알···! 탄이예요, 탄! 여기 총기수입 도구도 있어요!"

한세아가 도구 세트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면서 기쁨을 표출했다. 멀쩡한 총기에 이어 멀쩡해 보이는 탄을 발견하니 매우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20발짜리 탄창에 우상탄으로 올라와 있는 5.56미리 총알.

예비군 사격은 10발로 진행하니 한 탄창당 10발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

그리고 그런 탄창이 어림잡아 13개 정도.

실탄 사격 훈련을 위한 분량을 따로 빼놓았다기에도 모호하고, 이게 전부일 거라는 것도 이상하다.

그런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어째서인지 봉인 씰이 풀려 있고, 손잡이가 덜렁거리는 탄통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탄통에는 오로지 총알만이 한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 탓인지 몰라도 탄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슬쩍 한 발을 꺼내 손으로 흔들어 보니 부스스 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새롭게 발견한 총알들은 사용하면 안 될 듯했다.

"세아씨, 아깝지만 탄창에 든 것만 챙깁시다. 저기 널린 것들은 쓰면 안 될 것 같아요."

"진짜 너무 아까운데··· 뭐 어쩔 수 없죠."

"탄통은 제가 들고 갈 테니 세아씨는 총기수입도구 충분히 들고 와주십쇼. 아, 방독면도 몇 개 챙겨 주시고."

컨테이너 내부에 설치된 철망 옆에 책상과 의자가 있는 걸 보면 이곳에서 항상 대기하던 인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 잡다한 물품들이 같이 놓여 있는 모습은 한꺼번에 관리하기 위함인 것 같고.

'뭐, 군대가 다 그렇지.'

이런 식으로 대충 관리하는 건 매뉴얼이 아니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뭔들 못하겠는가. 그 덕분에 우리가 물품을 무사히 챙길 수 있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넵···!"

나와 한세아는 또다시 짐을 한아름 들고 험비로 복귀했다.

"알차게 털었네요! 이제 캠핑장으로 복귀만 하면 되겠어요. 애들이 많이 좋아하겠죠? 초코바 같은 건 좀 많이 녹긴 했지만 먹기에는 이상이 없으니까 괜찮고. 사탕도 비슷한 상태지만 이것도 먹을만 하구요."

"그럼요. 돌아가면 제가 총 잡는 자세랑 기본 구조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마 총기에 기름이 꽤 많이 묻어 있는 상태라 아주 박박 닦아야 할거예요."

"알았어요! 우리 같이 손질해요! 겸사겸사 쏘는 방법도 알려주면서!"

배시시 웃는 한세아를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아, 근데 능력 또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니까 그 얘기는 못 들은 것 같아서요."

"그···건··· 나중에 제대로 필 수 아니, 쓸 수 있을 때 말해 줄게요. 아직 어떻게 쓰는지 잘 몰라서···."

"일단 알겠습니다. 궁금하지만 기다리죠,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따로 준비 기간을 가질 정도로 당장 보여 줄 수 없는 능력이 무엇인지 매우 알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떼를 써서 한세아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준비가 되면 먼저 보여 준다고 했으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게 한세아가 말하는 착한 아이가 하는 행동일 것이다.

이윽고.

부르르릉-!

우리는 식량과 물자를 가득 실은 험비를 끌고 캠핑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출발했다.

중간에 넝쿨 변종과 싸우는 일이 있었으나, 그 일을 제외하고는 상황은 내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복귀 또한 차량으로 이동하는 덕분에 빠르게 돌아갈 수 있겠지.

역시 튼튼한 차량은 이렇게나 큰 도움이 된다.

수월하게 짐을 옮기는 수단으로서.

빠르게 목적지와의 거리를 좁혀주는 수단으로서.

단단한 차체로 그나마 안전한 이동을 보장해주는 수단으로서.

디젤 엔진이라 소음이 좀 크다는 옥의 티가 있지만 그 정도는 우리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범위 내 였다.

나와 한세아는 앞으로 어떻게 이동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병목안 캠핑장으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캠핑장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

"거짓말쟁이! 형은 거짓말쟁이야! 엄마랑 아빠 꼭 돌아올 거라고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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