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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24화 (225/497)

Chapter 224 - 224. 흰개미 (3)

쿵-!

거대한 변종 흰개미의 몸체가 힘을 잃고 쓰러진다.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던 머리는 일직선의 푸른 섬광에 의해 통째로 사라진 후였다.

찌르르···르······

푸른 섬광은 선두에 있던 놈을 처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뒤이어 들어오려던 흰개미마저도 관통했다. 각도가 조금 비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이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철퍽!

후두둑-

변종 흰개미가 주저앉은 충격을 받은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바닥은 어느새 잔뜩 고인 끈적한 체액으로 인해 진흙이나 다름없게 된 상태.

"앗뜨뜨!"

단 한 방으로 변종 흰개미를 처리한 한세아는 들고 있던 총을 다급하게 던지듯 내려놓았다.

권총은 어두운 곳에서 한눈에 보일 정도로 흰 연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무리를 한 총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강화 탄환을 연이어 쏘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세아씨! 머리 숙이십쇼!"

나는 급하게 일어나 소리쳤다. 그녀가 눈앞의 흰개미를 처리해 위기를 회피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긴 하지만 상황 자체가 끝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저도 준비 끝났다구요!"

그러나 한세아는 오히려 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가져온 소총이 들려 있었다.

어쩐지 험비 안에서 아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더라니, 아무래도 총을 쓰기 위해 총기수입을 했던 모양이다. 지수가 간단하게 닦아 놓기는 했어도 여전히 기름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으니까.

"현우씨···! 이거 그냥 제 마음대로 다 쏠게요!"

"장전은요?!"

"탄창 결합했고, 장전 손잡이 잡아당겼고, 조정간 단발로 바꿨어요!"

"자, 잘했습니다! 바로 쏘십쇼!"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대답했다. 분명 사용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한세아가 알아서 잘해주리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콰직!

그리 생각하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은 도끼에 또 한 마리의 흰개미가 목숨을 달리했다. 두꺼운 키틴질 외갑이 아닌 탄력 있는 외골격이 갈라진 사이로 체액이 펑펑 쏟아진다.

탕! 탕! 탕!

등 뒤에서 산을 울리는 사격음이 들린다. 한세아가 몰려드는 흰개미 떼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탄이 지나감에 따라 구멍이 송송 뚫리는 흰개미들.

착실하게 수를 줄여나가고 있건만. 놈들은 아직도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무리하며 차량에 탑승하려고 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의 집게 힘을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면 시동도 제대로 걸지 못한 상태에서 무력하게 공격을 받지 않았겠는가. 그것도 공격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겠지.

바로 그때.

[까아아악!]

기절해 있던 까마귀가 머리를 푸르르 털며 울음소리를 냈다. 귀를 자극하는 총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됐나 보다.

"까악아···!"

김청수가 여유가 없는 나, 지수, 한세아를 대신해서 차량 바깥으로 나와 까마귀를 묶고 있는 줄을 풀어 주었다. 어차피 도망치기에는 글렀다고 판단한 것인지, 까마귀를 풀어 우리에게 합류를 시키려는 심산인 듯했다.

"형 누나들을 도와줘!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아픈데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

[······깍]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까마귀는 김청수의 말을 듣고는 외마디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녀석은 이내 총총 뛰는 걸음으로 변종 흰개미에게 접근하는 것과 동시에 부리로 놈들의 몸을 찢어놓기 시작했다.

까마귀가 망설임 없이 병정 흰개미를 부리로 쪼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일인 것처럼.

밤마다 나가서 뭘 먹고 돌아오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흰개미를 주식으로 먹어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녀석이 아이들을 구해 달라는 이유 또한 흰개미 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까닭이었겠지.

녀석 나름대로 수를 줄이려고 했던 것 같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을 터다.

차라리 처음부터 변종 흰개미의 존재를 알려 줬더라면 좋았겠으나 이미 시기를 놓쳤다. 여기서 까마귀를 원망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허억- 허억-."

그래도 까마귀의 도움 덕분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들어 네 방향을 제대로 막을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까마귀 혼자 캠핑장 아이들을 지켰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우리가 등지고 있는 험비만,

아이들이 타고 있는 차량만,

밤이 끝나고 해가 뜰 때까지만 지킨다면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내가 그리 생각한 것은 까마귀가 낮이 되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 되었든 간에 낮이 되면 흰개미들의 기승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요 이틀 사이에 까마귀가 제대로 복귀하지 않은 것은 낮이 되었어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걸 시사하고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믿을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콰득!

"으윽···! 저리 비켜!"

짤깍거리는 집게를 피해 바닥을 구르는 지수. 그녀는 도끼를 위로 쳐 올리며 주제를 모르는 변종 흰개미의 머리통을 반으로 갈랐다.

철퍼덕!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체액과 함께 흰개미가 쓰러진다.

"하아, 하아, ···아저씨. 이상해. 이상하다고."

"후우, 뭐가? 후우···."

"이것들이 자꾸 집요하게 험비만 노리고 있단 말이야. 정확히는 까마귀도 포함이지만. 하아, 하아···. 그래서 그런가 하아- 나랑 아저씨를 노리는 건 확연하게 수가 줄었어. 아, 세아 언니도 같이."

나는 지수를 재빨리 일으켜 세우며 생각했다.

'까마귀랑 차량을 주로 노린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나, 지수, 한세아에게 달려드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변종을 처리하는 것에 급급해진 나머지 이제서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대체 무슨 차이가 있길래? ······잠깐만.'

나, 지수, 한세아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까마귀, 박채연, 박수린, 김대현, 최민수가 가지고 있는 것.

다람쥐 형제를 제외하고, 그나마 눈에 띄는 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날개밖에 없었다.

"······날개?"

"뭐? 뭔 소리야?"

달려드는 흰개미를 처리한 지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되물었다.

지수의 머리칼과 옷은 끈적한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주무기인 소방 도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모습은 싸움이 장기전에 돌입했다는 걸 알려주었다.

"날개! 이것들 날개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이것들.

전부가 날개를 노리고 있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를 엄청 파닥이지도 않았는데 뜨긴 뜨더라구요.'

저번에 한세아가 말해주었던 건 신기한 날개를 말이다.

당장 차량에 시동을 걸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무방비한 상태가 된 험비는 흰개미들의 집게 힘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문짝을 쉽게 뜯어버릴 수 있는 집게였으니까.

"세아씨! 흰개미들이 아이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절대 가까이 못 오게 하십쇼!"

"이미 그러고 있어요······!"

탄창을 갈아 끼운 한세아가 답했다.

탕! 탕! 타앙-!

그녀가 흰개미들을 조준할 때마다 총구에서 빛이 뿜어지고, 놈들의 몸체가 터져 나간다.

그래, 우리가 하는 일은 바뀌지 않는다.

눈앞의 변종 흰개미들을 죽여야만 하는 것은 동일했다.

내가 푸른 불을 피워 도끼에 다시 휘감은 그 순간,

"형! 넝쿨! 넝쿨 잘라요! 아니, 불태워 버려요!"

쉴 새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던 김청수가 고개를 휙 들며 외쳤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나무뿌리에 호스처럼 달려 있는 넝쿨 줄기였다.

"제 생각이 맞다면 이 흰개미들 저 넝쿨 자르면 죽을 거예요! 이것들은 수분 저장 능력이 없을 테니까! 줄기 자르고 좀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고요!"

"······!"

나는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찢어진 갑피, 겉면에 맺히는 체액, 꿈틀거리는 넝쿨.

흰개미들의 키틴질 껍데기는 우리가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체액을 뿜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빠져나가는 체액보다 넝쿨에서 주입되는 수분이 많은 덕분에 그리 큰 피해가 아니었을 따름이었다.

'하늘이 좀 더 밝았으면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내가 바보였다. 확실하게 한 마리씩 처리한다는 것이 되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이제서라도 깨달은 만큼 자책보다는 뿌리에 걸쳐진 넝쿨을 빨리 자르는 것이 나으리라.

"지수야! 들었지?!"

"하아, 어! 저거 줄기 다발 잘라버리면 된다는 거잖아! 흐읍-! 언니! 좀만 더 버텨요! 제가 넝쿨 자르고 오는 동안에만요!"

"알았으니까 얼른 가요!"

"아저씨는 여기 남아! 나 혼자서도 충분해!"

이윽고, 지수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도끼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짤깍- 짤깍-

점액이 묻어 있는 집게를 움직이는 변종 흰개미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콰드득!

그리고 놈은 말없이 휘둘러진 도끼날에 의해 집게가 부서진 채 주저앉게 되었다. 움푹 패인 부위에서 체액이 거세게 뿜어지는 것은 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흐압!"

푸른 스파크를 두르고, 번번이 앞을 가로막는 흰개미들을 단숨에 제친 지수는 첫 번째 넝쿨을 끊을 수 있었다. 빠른 이동이 가능한 그녀였기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였다.

끼리리리릭!

마치 감각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넝쿨은 줄기에서 끈적한 체액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후두둑- 후두둑-

줄기에서 체액이 뿌려질 때마다 그것과 연결되어 있던 변종 흰개미들이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갔다.

찌르르······!

배를 흔들어 울리는 진동으로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려는 흰개미들은 이내 전력 부족이 온 기계처럼 축 늘어지게 되었다. 안에 차 있던 수분이 점차 빠지면서 흰색이었던 외피가 점점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수는 그 광경을 보면서 헛구역질을 하려는 것도 잠시, 다음 목표인 두 번째 나무뿌리를 향해 바로 움직였다.

땅에서 솟은 나무뿌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넝쿨이 걸쳐져 있는 뿌리는 총 3개. 그러니까 지수가 끊어야 하는 줄기 다발은 2개라고 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녀처럼 목표를 바꿔 넝쿨 줄기를 주로 노렸다. 서로 선으로 연결된 상태였으니 푸른 불을 가져다 대면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처럼 옮겨 붙었기 때문이었다.

느리더라도 다수를 한 번에 죽이려면 이렇게 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않은가. 이제 체액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바로 그때.

쿠웅-!

두터운 나무뿌리가 다시금 험비를 밑에서부터 쳐 올려 차량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붕 뜨게 만들었다.

"헉! 아저씨! 언니! 피해!!"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솟은 그것은 우리가 대비를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다급한 상황에 맞지 않게 복부를 간지럽히는 부유감이 느껴진다. 용솟음하듯 비산하는 흙과 점액질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흙먼지 사이로 멀리 튕겨 나가는 김청수와 까마귀가 보여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지지지직!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한세아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는 것뿐. 이것만 해도 한계였다.

쿵! 텅- 터텅-!

끼기기긱!

현실감없이 퉁퉁 튕기던 차량이 기껏 세운 것이 무색하게 옆으로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꺄아아아아!"

"으아아! 형아!"

"오빠야······!"

박채연, 박수린, 김대현, 최민수, 예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끄이익···! 이 손 놓으면 아, 안대에-!"

차량 내부에 설치된 손잡이 기둥에 간신히 몸을 걸칠 수 있었던 예린이 아이들을 겨우 붙잡았다.

미끌-

아이들은 어떻게든 손잡이와 예린의 손을 잡아 버티려고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동안 무리를 해왔던 몸이다.

아직 체력이 충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기에 아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떨어지고 말았다.

개미지옥 같은 저 구멍 속으로.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눈 깜빡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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