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6 - 226. 흰개미 (5)
"제가 먼저 내려갈 테니 조심해서 따라오십쇼."
나는 앞으로 우리가 내려갈 구멍을 살펴보며 말했다.
구멍은 수직으로 끝없이 파여 있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일 정도로 초입 부분이 'ㄴ'자로 꺾여 있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로프를 묶고 레펠하듯 내려가지 않아도 되었고, 까마귀가 따라 들어올 수 있기도 했다.
"세아씨, 저희 방독면 챙긴 거 다들 나눠줬죠? 예린이가 바람을 감아주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 그것도 따로 준비했으면 좋겠는데."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밑에 아이들 몫까지 가방에 챙겨 왔어요. 일단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겼다구요. 방독면도 좀 많이 챙겨 와서 급할 때는 그냥 버려 버리면 돼요."
"잘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내려가겠습니다."
딸깍-
나는 손전등을 키고 아래를 비추었다. 아래가 'ㄴ'자로 꺾여 있다고는 하나 내려갈 때 발디딤판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툭- 툭- 탁-
신발로 수차례 건드린 결과 괜찮다는 판단이 선 나는 한 발 크게 내려 나무뿌리 혹은 흙벽에 돌출된 부분에 무게를 실었다.
부스스···
뭉쳐 있던 흙 알갱이들이 자잘하게 부서져 벽면을 타고 밑으로 떨어진다.
후두둑-
입에 문 손전등이 통통 튀기는 모래들을 비춘다.
"후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애초에 수직으로 된 통로의 길이가 짧은 편이었기에 빠르게 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흰개미 굴의 천장, 벽면, 바닥을 가리지 않고 혈관처럼 퍼져 있는 넝쿨 줄기들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없이 꿀렁거리는 모습은 줄기 안쪽에 있는 액체들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손전등 빛을 반사시키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초코바 포장 비닐.
위로 솟구친 나무뿌리에 맞은 차량이 옆으로 넘어질 때, 안에 보관하고 있던 간식거리들의 일부가 굴 안쪽으로 떨어진 모양이다.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놓여 있는 그것들은 아이들이 지나간 길을 표시해 둔 것처럼 보였다. 동화 속 남매가 그러했듯이.
'···통로를 지키는 흰개미가 없어.'
이제는 일자로 쭉 뻗어진 길목을 향해 손전등을 끝까지 비춰 보아도 중간에 걸리는 형체들이 없었다. 깔끔하게 앞으로 뻗어 나아가는 빛은 흰개미들이 없다는 걸 알려주었다.
놈들이 기습을 노리고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에 나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래도 당장 보이는 건 없으므로 나는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에게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저씨!"
지수를 필두로 나머지 일행들이 차례대로 흰개미 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수는 아주 잠깐 동안 나를 보지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호들갑을 떨며 내 몸을 만지작거렸다.
"얘가 왜 이래? 그만 만지고 나랑 같이 앞이나 경계하자."
"칫.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건데!"
내가 밀어내자 툴툴거리는 지수.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그녀는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내게 심심한 장난을 치는 건 그녀 나름대로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이었다.
"현우씨, 까마귀까지 다 내려왔어요. 이제 가기만 하면 돼요. 근데 부탄가스는 왜 챙긴 거예요? 그것도 호일에 잔뜩 감싸기까지 해서."
"아, 혹시 그걸로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응? 어떻게요?"
"부탄가스에 끼운 캠핑용 토치로 미리 불을 붙여서 던지고 세아씨가 그걸 맞추면 됩니다. 뭐, 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지만요."
사방이 뻥 뚫린 공간에서는 작은 부탄가스를 터트린다고 해서 나무 인간들에게 큰 살상력을 입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내가 노리는 것은 폭발의 위력이 아닌 그 폭발을 잡아먹은 포자 덩어리였다.
지상에서는 그저 큰 포자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공간이 한정되고 일정한 구멍이 뚫려 있는 이곳에서는 훌륭한 장애물이 되지 않겠는가.
새어 나오는 가스에 불이 붙기 위해서는 주변에 퍼진 가스 농도와 산소 농도를 엇비슷하게 맞춰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그건 예상치 못한 사람이 해결해주었다.
유령 혹은 요정을 보는 예린이 푸른 가루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바람을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린이 푸른 가루를 뿌려 우리 몸에 신선한 공기를 전해주는 바람을 휘감아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막아야 하는 구멍에 바람벽을 형성해서 인위적인 밀폐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아이는 가루를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있다고, 해볼 거라고 말해주었었다.
물론, 이 또한 관리사무소 구석에 박혀 있었던 토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없었더라면 일반 부탄가스통으로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조건이 요구되었을 테니까.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터질 걸 감안 해서 좀 멀리 던지기는 할 거지만, 막 엄청 멀리까지 던지지는 않을 겁니다. 전 세아씨 사격 실력 믿고 있어요."
"넵···."
내 계획을 간단하게 들은 한세아는 부담 백 배인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예린은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우며 대화를 같이 듣고 있는 중이었다.
[까아아악-]
그런 아이의 뒤에 있던 까마귀는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자 작지만 긴 울음을 내뱉었다. 통통 튀며 한 발자국 앞으로 걷는 걸 보니 이제 앞으로 가자는 의미인 듯했다.
"그래그래. 알았어. 다들 마음 단단히 먹고 갑시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끝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어두워지는 굴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잘그락- 저벅- 잘그락- 철퍽-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바뀐다.
뚝- 뚝-
굴 천장에 맺힌 물방울들이 아래로 떨어져 부서진다.
살아가는데 습기가 필수인 흰개미들인 만큼 굴 깊숙이 들어가게 되니 주변이 점점 습해지고 있었다.
천장을 타고 자란 넝쿨에서는 물들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바닥은 흙과 수분이 섞여 질척거리게 되고 있는 것이다.
예린이 휘감아준 바람 덕분에 습기 가득한 공기를 그대로 들이쉬지 않아도 되었다. 만약 아이가 아니었다면 역겨운 공기를 마시며 이동했을 거라는 끔찍한 상상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간혹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을 때는 매우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흰개미의 체액과 달리 단순한 물인 걸 알게 된 지금도 그러한 기분은 변하지 않았다. 벽면이 점점 끈적하게 바뀌고 있는 것이 그러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한몫하고 있었고.
어찌 되었든 이 굴은 사람을 잔뜩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 한세아, 김청수의 꼴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특히 지수와 예린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옷과 꼬리의 털이 습기를 점점 머금고 있었으니까.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미간이 찌푸려진 그녀들의 표정은 지수와 예린의 불쾌지수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걸 알려주었다.
뭐라도 걸리면 바로 묵사발을 내겠다는 생각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에서 마구 뿜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모두의 불쾌감이 치솟고 있는 와중에 상태가 제일 나은 것은 까마귀 혼자였다. 새들은 기본적으로 깃털에 물이 침범하지 않도록 기름기를 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가 아는 흰개미 특성이랑 크게 다르지 않네요."
바싹 뒤따라 오던 김청수. 자신이 아는 정보가 지금도 유효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대조하고 있었던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통로를 보면 이상하게 끈적거리고 나무 조각 같은 게 붙어 있죠? 이건 흰개미들이 자신들 침이랑 잡다한 나무 파편들이랑 섞어서 굴을 보수한 흔적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진흙같은 길 만들어진 거죠."
"그럼 변종이 되었어도 습성이나 생태 같은 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거구나."
"네, 지금으로선 그런 것 같아요. 만약 그렇다면 굴에 들어오기 전에 제가 말한 계획이 통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구요."
그래,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김청수가 가진 정보를 토대로 삼아 무사히 탈출할 계획까지 세우고 들어온 것이다.
"그럼 처음에 말했던 그것만 죽이면━"
나는 계획의 유효성을 일행에게 알려주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
"다들 쉿!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러니까 무기 들고 대비해."
쉴 새없이 귀를 이리저리 쫑긋거리던 지수가 손을 확 들며 신호를 보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손에 들고 있는 각자 무기들을 더욱 더 꽉 쥔 채 앞으로 나아갔다.
일직선으로 된 굴은 점점 곡선형으로 완만해지다가 좌우로 갈라진 길목을 드러냈다. 아니, 양측에 있는 여러 개의 방과 여전히 중앙을 가르는 길목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나무가 갉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우욱···."
"···저 토할 것 같아요, 현우씨."
"······참아주십쇼, 세아씨."
[······깍!]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사이에 까마귀는 혼자 눈치 없이 눈을 빛내며 입맛을 다셨다.
사각사각-
꾸륵-꾸르륵-
그렇게 첫 번째로 도착한 방은 얇은 막 내부에 있는 유충이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알로 가득 찬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