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7 - 227. 흰개미 (6)
꾸르륵- 꾸르륵-
손전등 빛을 살며시 내부로 비추자 보이는 것은 하얀 알과 일개미들이었다.
공동 안에 하얀 알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소수의 일반 흰개미들이 빨빨 거리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그것들은 굴의 벽면을 보수하거나 알을 더듬어 상태를 확인하는 등 여러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일개미들의 외피에는 어김없이 넝쿨이 박혀 있었고.
굴 내부가 습기로 가득 차 있어도 전선처럼 연결된 넝쿨이 여전히 필요한 모양이다.
일개미들 전부가 일하는 건 아니었다. 그 중 일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으니.
20% 정도가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고 하더니 그러한 현상이 변종이 되어서도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
"······"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는 침묵을 유지했다.
아직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변종 흰개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인 것도 있지만, 쉴 새없이 꿈틀거리는 알 주머니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수원역 지하도에 있던 도롱뇽 변종의 알도 기억나긴 했으나 그보다 더 강하게 머리를 잠식한 것은 수원고등학교에 있었던 먹이 주머니들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광경이 뒤이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모습에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덜 녹은 시체.
구역질 나는 액체.
코를 자극하는 썩은 내.
그렇게 보이기 시작한 까닭은 현재 상황이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리라. 예린을 잃어 버렸었던 그때와 아이들을 놓쳤던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와 지수가 예린을 구했던 것처럼 우리가 끝내 아이들을 무사히 구하는 결말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형, 그냥 지나가면 돼요. 여기에 동생들이 있을 리가 없어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김청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가자고? 확인 안 해도 되겠어?"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래도 첫 번째 방에 있을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빠르게 확인만 하는 거면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기도 하고.
"여기는 확실하게 없어요. 날개가 필요한 것이 맞다면 제 동생들은 아마 여왕 개미 방에 있을 거예요. 이런 알 방이 아니라요. 여왕 흰개미는 흰개미 집단의 유전자를 조율할 수 있으니까."
"······."
"그러니까 우리는 병정 개미들이 몰려 있고, 굴 벽면이 다른 곳보다 훨씬 딱딱한 곳을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저런 일개미들은 공격 능력이 거의 없으니 큰 위협이 되지도 않을 거고요."
김청수는 흰개미들 중 생식충을 제외하면 눈이 대부분 퇴화되어 있다고 이어서 설명했다.
지금 우리 몸에는 흰개미들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으니 웬만해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며, 특히 일반 흰개미들은 공격 능력이 전무하기에 모든 개미들의 먹잇감 취급을 받았었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김청수의 말마따나 일개미들은 집게가 있긴 했지만, 병정 개미의 집게처럼 딱딱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하얗고 불투명한 집게는 말랑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 하나 더 알아낸 게 있어요. 훨씬 더 위협적인 개미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어째서 진짜 개미도 아닌 흰개미가 변할 수 있었는지요. 추측이긴 하지만 저기 보세요."
그는 알 하나를 가리켰다. 김청수가 가리킨 알은 안에서 울룩불룩 솟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모두가 긴장한 시선으로 알을 노려보고 있을 때.
부우욱- 철퍽-
때마침 막이 찢어지며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일개미 하나가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여타 흰개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찌이이익-
후두둑- 후두둑-
막 태어난 놈은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으나, 체내에 담긴 체액을 외골격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철푸덕-
진흙같은 바닥 위에 끈적하고 하얀 체액이 스멀스멀 뒤덮인다.
간혹 경련하기만 할 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은 그것이 태어난 것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퉁- 투퉁- 퉁-
동족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일개미들은 배를 떨어 진동 소리를 내더니 이내 죽은 일개미를 끄집어내어 어딘가로 끌고 사라졌다.
지직- 찌이익-
철퍽- 철퍽-
그러다가 공동 구석에서 갑피가 찢어지고 안에 고여 있던 체액이 모조리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은 동료를 뜯어먹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저걸 가리킨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곤충이 거대화된 형체를 유지하려면 그만큼 외골격의 강도가 높아야 하거든요. 외골격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면 저렇게 몸이 무너져서 죽는 거죠. 아마 그래서 다른 개미 종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알에서 나오자마자 다 죽고 마니까."
"······? 뭔가 말이 안 맞는 것 같은데. 그럼 저 흰개미들도 다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원래는 그게 맞죠. 흰개미는 외골격이 엄청 약하니까요. 근데 오히려 그것 덕분에 살 수 있었나 봐요. 얇은 껍질인 만큼 탄력성이 생긴 것 같거든요. 지금도 간신히 돌아다니고 있는 일개미들 보면 꼭 물이 꽉 찬 풍선 같잖아요?"
실제로 지상에서 나와 지수가 병정 개미들을 도끼로 내려쳤을 때, 펑 터지는 느낌이 전해져 오기는 했다. 찢어진 장갑 사이로 하얀 체액이 울컥울컥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고 말이다.
게다가 우리가 건드리지 않아도 장갑이 갈라져서 저 혼자 체액을 뚝뚝 떨어트리는 개체도 상당수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아남은, 적어도 짧은 순간이라도 살 수 있었던 흰개미들은 한 번 더 변한 것 같구요. 세 쌍의 다리를 보면 그 부위만 특히 강도가 높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 덕분에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전문가는 아니라서 알아낸 건 이 정도가 끝이네요."
아이러니하게도 껍질이 약해서 살 수 있었다는 흰개미들. 그러나 이어지는 추측은 우리에게 결코 유리한 내용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생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흰개미들이 더 오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변하는 것 같다는 말이었으니까.
실제로 지금 변종 흰개미의 모습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그 어떤 곤충도 빠지는 체액을 보충하기 위해 몸에 넝쿨을 박아 수분을 보충하지는 않는다. 누가 바퀴목에 속하는 벌레 아니랄까 봐 생존력이 강했고, 변이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변종 흰개미들은 인간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말겠지.
그러니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하도록 중간에 막을 필요성이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어쨌든 이 방에는 애들이 없을 거라는 거잖아. 그럼 일단 다시 앞으로 이동하자. 시간 아까우니까 대화는 가면서 하고."
지수가 손을 흔들어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그녀는 전방을 가리키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이윽고, 알 방에서 나온 우리는 좀 더 깊숙한 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두두둑-
위에서 굳지 않은 흙 알갱이들이 부스스 떨어져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푸시이익···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넝쿨 줄기에서 나오는 것들이 바뀐다. 여전히 분무기처럼 물이 흘러나오긴 했으나, 바람을 내뿜는 줄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습도가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게 하고, 온도가 필요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유지하는 일종의 환기 장치 같았다.
고작 넝쿨이 말이다.
휘이이이···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의 몸 주위에는 아직 예린이 휘감아준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주변 환경이 달라지고 있어도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있으나 바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어찌어찌 숨을 쉴 수 있을 듯했다.
'물론, 바람이 사라지지 않는 게 제일 낫지만.'
넝쿨에서 나온 바람인 만큼 그것이 인간에게 유독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방독면을 챙겨 오긴 했어도 정화통이 유독 가스를 충분히 걸러줄 수 있는지 걱정되기도 했고.
툭- 툭-
나는 도끼날로 벽면을 건드려 강도를 체크해 보았다. 흰개미들의 침과 섞여 굳은 나무 조각들이 몇 번 버티다가 허물어진다.
"청수야, 벽이 딱딱한 곳을 찾으라고 했지?"
"네, 형. 여왕개미 방은 중요한 곳이라 특히 보강을 많이 해 놓거든요."
"근데 일개미가 많이 보이지는 않네요. 뭔가 엄청 사방에서 득실득실거릴 줄 알았는데. 걸을 때마다 길을 틀어막기도 하면서요."
한세아가 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예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아직 군체가 불안정하다는 증거예요, 누나. 초반에 병정 개미들 위주로 뽑다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때부터 일개미들을 주로 뽑는 게 흰개미들 특성이라서요."
"그래서 병정 개미가 그렇게 많았던 거구나. 알 방에 있는 일개미 수가 적은 건 그래서 였던 거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봐야죠. 아마 형 누나들이 지상에서 죽인 병정 개미들은 입구 쪽에 배치한 개미들일 거고요. 나머지는 싹 다 여왕 개미 방에 있을 거예요."
"후우···,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수가 좀 적었으면 좋겠다···."
지수는 지상의 사투를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소소 일어난 꼬리의 털에 의해 그녀의 그림자가 두꺼워졌다.
바로 그때.
"······!"
우리는 바닥에 놓인 깃털 하나를 발견했다. 체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기는 했어도 깃털의 색이 흰색이라는 걸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거 수린이가 남긴 것 같은데."
지수가 깃털을 주우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흰개미굴에 깃털을 놓을 수 있는 존재는 아이들이 유일했다.
굴에 빠진 직후, 병정 개미들에게 끌려가면서 자신들이 지나친 경로를 알려주기 위해 남긴 흔적인 듯했다. 그것도 자기 깃털을 뽑으면서 말이다.
아이들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생각에 일말의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조급함이 마음을 잠식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있는 방향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으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살아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 아이들을 찾아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왕 개미방의 위치를 특정해내야만 했다.
"지수야, 벽 두드리면서 가자. 너무 세게는 말고 적당하게."
나는 김청수에게 주운 깃털을 건네며 지수에게 말했다. 깃털을 건네받은 김청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깃털을 조심히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알았어. 딱딱한 부분 찾으면 된다는 거잖아."
도끼를 치켜 드는 지수. 그녀는 이내 통로 벽을 향해 도끼로 약하게 건드렸다.
이윽고.
툭··· 툭···
나와 지수가 번갈아 가며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굴에 울린다.
찰박- 찰박-
둔탁하게 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걸었다.
아이들이 있을 저 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