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8 - 228. 흰개미 (7)
툭-
부스스···
벽면을 건드리는 도끼날에 의해 살짝 부서져 떨어지는 나무 조각들.
"···우리 얼마나 들어온 걸까요?"
그 모습을 보던 한세아가 손전등을 앞뒤로 비추며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전방과 후방 모두 손전등 빛이 닿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주변에 빛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지수, 한세아가 들고 있는 손전등뿐이었던 탓에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나 걸어왔는지 추측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굴이 묘하게 곡선으로 꺾여 있는 것도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한몫하고 있었고.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끈적한 흙탕물과 바닥을 장식한 진흙. 그리고 혈관처럼 꿈틀거리는 넝쿨 줄기 밖에 없었다.
"후우···, 그러게 말입니다. 꾸준히 걸었으니 이제 슬슬 뭐라도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는 지수의 귀에 묻은 흙을 대신 털어 주며 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만 알 수 있었어도 대충 추정을 할 수 있었을 것 같건만,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멀쩡한 시계는 둘째치고, 멀쩡한 시계 건전지를 구하기가 특히 쉽지 않았으니까.
"······."
까마귀 등에 올려진 드럼통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점검하고 있던 예린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기름통 위에 푸른 가루를 살짝 뿌렸다.
휘이이···
이내 한 줄기 바람이 상승 기류를 형성하며 드럼통에 휘감긴다.
"예린아, 뭐 한 거야?"
귀를 자극하는 바람 소리에 지수가 뒤로 돌아 예린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가 귀를 털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잔여물들이 남아 있었는지 머리를 푸르르 털었다.
우리 또한 이번에는 아이가 무엇을 한 것인가 궁금한 건 마찬가지. 일행의 시선이 아이와 까마귀에게 향했다.
"어··· 이거 통이 많이 무거워 보여서 이러면 도움이 될까 한번 해 본 거야. 위로 올려주면 좀 가벼워질 것 같아서."
"아."
그러고 보니 굴로 내려올 때, 차고에 있던 기름통을 들고 내려왔었었다.
200리터 드럼통에 기름이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해도 무게는 만만치 않다. 거진 80~100kg에 달하겠지.
그동안 임시방편으로 까마귀 등에 실어놓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주변을 경계하느라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의도치 않게 녀석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들게 하는 부담을 준 셈이다. 차례를 바꿔 주지도 않고.
본래라면 번갈아 가면서 들려고 한 것이 원래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우리 모두가 아이들을 구할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던 탓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굳이 구차하게 변명을 하자면 까마귀가 힘든 티를 전혀 내지 않아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예린을 제외한 모두라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굴에 들어온 순간부터 소리 내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던 녀석.
날개의 부상이 아직 아물지도 않았을 터라 힘든 건 매한 가지였을 텐데, 하여간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할 듯싶었다.
'···하긴.'
그동안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무리를 해온 그 성정이 어디 가겠는가.
한숨을 푹 쉰 나는 지금이라도 짐을 넘겨 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까악]
까마귀는 오히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내 손길을 피했다. 묘하게 드럼통이 멀어진 걸 보아하니 자신이 계속 들고 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했다.
그리고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녀석은 부리를 예린에게 조심스럽게 비볐다.
"······!"
아이는 순간 훅 다가온 검은 부리에 놀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심한 표정으로 부리를 매만졌다. 좋지 않게 시작했던 첫 만남이었지만 이제는 둘의 사이가 원만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까악아, 진짜 미안해. 조금만 더 힘 써 줘. 동생들 구할 때까지만."
김청수는 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꽉 묶인 밧줄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까마귀의 깃털을 정리해주었다.
끄덕-
울음소리 대신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까마귀. 녀석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김청수에게 부리를 비볐다.
툭-툭-
"······얼른 가자. 가서 빨리 구해야지."
지수가 굴 벽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윽고.
찰박- 찰박-
우리는 다시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길은 점점 복잡해져 갔다. 천장, 바닥, 벽면을 가리지 않고 구멍이 크게 뚫려 있기도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번번이 다리가 멈출 때마다 길을 알려 준 것은 까마귀였다. 녀석이 부리로 방향을 알려 준 것이다.
그것이 맞는 길이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차피 어느 한 곳을 골라야 했고, 우리는 녀석이 알려 준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띄엄띄엄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흰색의 깃털의 존재가 그러한 판단에 힘을 실어 주었다. 흰색의 깃털이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해당 경로를 지나쳤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그렇게 여러 갈림길과 방을 지나치면서 보이는 것은 대략 대여섯 마리의 일개미들이 벽면에 달라붙어 머리에 달린 집게로 나무뿌리를 베어 물고 있는 광경이었다.
굴 내부 공간을 넓히기 위해 확장 공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침입자에게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일개미들을 우리는 그냥 지나쳐갈 뿐이었다.
하나하나 다 상대하다가는 괜히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꼴이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눈을 돌릴 틈은 없었다.
"크흠! 형, 그거 알아요?"
김청수가 살 혹은 체액이 빵빵하게 차오른 변종 흰개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뭘?"
"저 흰개미들이 식용 가능한 곤충이라는 걸요. 여왕 개미도 먹고, 일개미도 먹고, 병정 개미도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
뜬금없는 그의 말에 말문이 턱 막힌 나는 한순간에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것들의 살점을 입에 넣고 씹는다는, 그런 끔찍한 상상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역겨운 상상이 머리를 잠식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이 씨···. 우욱-. 야, 김청수. 너 예전에 눈치가 없다는 말 듣고 살지 않았냐? 그런 말을 꼭 지금 해야겠어?"
지수가 꼬리 털을 곤두세우며 김청수를 나무랐다.
그의 말을 들은 예린과 한세아는 조용히 입을 가렸다. 그러나 가려지지 않은 눈가는 그를 향해 다양한 욕을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깍]
모두가 질색하는 와중에 조용히 입맛을 다시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
이 중에서 흰개미의 맛을 아는 건 녀석 혼자였다. 그러나 전혀 부럽지 않았고, 그 맛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죄송해요, 누나. 그냥 농담 한번 해 본 건데···."
"너는 어디 가서 농담으로 웃길 생각은 하지 마라."
"아니, 근데 저것들 진짜 먹을 수 있━"
"아, 쫌!"
지수가 역정을 내며 도끼를 휘둘렀다.
김청수에게 휘두른 것은 아니고 올바른 경로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벽을 두드려 왔던 걸 똑같이 한 것뿐이었다. 강도가 달라지는 부분을 찾아서 여왕 개미의 방을 특정해야 하니까.
···전보다 힘이 살짝 더 들어간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도끼와 벽에 맞닿은 순간.
···캉!
"······!"
굴을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에 우리는 화들짝 놀라며 벽면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소리가 바뀌어 들렸던 까닭이었다.
여태까지 나무 조각과 흙들이 떨어져 내리기만 했건만. 이번에는 역으로 도끼날을 살짝 튕겨 내기도 했다.
"거의 다 왔나 본데?"
벽면의 강도가 단단해졌다는 것은 여왕 개미의 방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말이었다.
흰개미 굴의 가장 중요한 장소를 지키기 위해 다른 방과 다르게 주변 벽의 내구도를 많이 높여 두었을 것이다라는 김청수의 설명이 맞다면, 이 앞에 그것의 방이 있으리라.
바로 그때.
"···아저씨! 앞쪽에 병정 개미들 소리가 엄청 많이 들려! 완전 바글바글! 그러니까 다들 준비해!"
지수가 도끼를 치켜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는 금안을 빛내며 전방을 강하게 경계했다.
철컥-
권총과 소총을 점검한 한세아가 손전등으로 통로를 멀리 비추자, 빛이 좁은 입구를 지나 순식간에 탁 트이는 공동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 내부가 한순간에 밝아진 빛으로 훤하게 밝혀지는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현우씨, 저 이번에는 진짜 토할 것 같아요."
"······저도 그럴 것 같으니까 말 시키지 마십쇼."
나와 한세아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옆에 뒤따라 오던 예린, 김청수도 곧 우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우욱···!"
남들보다 감각이 뛰어난 지수는 전방의 모습을 감당하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역겨운 광경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까마귀 혼자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입맛을 다셨다.
알 방을 지나 통로를 쭉 따라가니 우리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세 자릿수를 가뿐하게 넘는 커다란 병정 개미들과 공동의 공간을 절반 넘게 차지한 거대한 살덩어리였다.
꾸르륵- 꾸르륵-
내장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꿈틀거림이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투두툭- 툭-
허여멀건한 알들이 꽁무니에서 계속해서 떨어진다.
···수십 개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