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9 - 229. 흰개미 (8)
꽁무니에서 끊임없이 허여멀건한 알들이 떨어진다.
샤사사삭-
여왕 개미가 낳은 알들은 이내 다가온 일개미들이 하나씩 집어 어느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마 여태 우리가 지나온 방들 중 하나이거나 여왕 개미방 뒤편에 있는 또 다른 방일 것이리라.
"···청수 네 말대로 병정 개미들이 다 저기 모여 있네."
나는 방을 빼곡히 메운 변종 흰개미들을 보며 말했다.
놈들은 배가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여왕 개미 주변을 검은 집게를 짤깍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손전등 빛이 닿지 않는 저 너머에도 빈 공간이 있는 듯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는 곳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말했잖아요. 입구 쪽에 없으면 나머지는 전부 여왕 개미방에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여기 있는 것들은 지상에서 상대했던 흰개미들하고 조금 다를 거예요. ···좀 더 단단하고, 좀 더 질기겠죠. 늙은 개미들이 아니라 젊은 개미들로만 호위를 채우니까요."
잔뜩 긴장한 김청수가 주먹을 쥐었다 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여왕 개미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좁은 입구 너머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변종 개미들은 나, 지수, 한세아, 까마귀가 지상에서 상대했던 변종 개미들과 조금 달랐다.
넝쿨 줄기가 얇은 키틴질 장갑을 뚫고 박혀 있다는 것을 동일했지만, 저마다의 외형에 차이가 있었다.
쉴 새없이 짤깍거리는 집게 턱은 눈에 띄게 두터워졌으며, 걸을 때마다 체액에 의해 출렁거렸던 껍질은 온전한 제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모습이었으니까.
김청수가 말한 젊은 흰개미라는 이유도 있겠으나 그것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종 흰개미들이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했다.
"근데 왜 저희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요? 이렇게 바로 앞까지 왔는데 말이예요. 눈이 퇴화했다고 해도 진작에 저희가 굴에 들어온 걸 알아차렸을 텐데요."
지금까지 우리가 의아했던 점을 꼬집는 한세아의 물음.
"마개 전략···이라고 있어요. 좁은 입구를 집중적으로 막아서 피해를 줄이는 게 흰개미들 특성이거든요. 그게 피해를 상당히 줄여서 결국 집단이 번성하게 된다나 뭐라나. 여기까지 올 동안 공격을 받지 않은 건 저도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
"저기 보시면 방은 엄청 넓은데 입구만 특히 좁잖아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 통로보다 더요."
그녀의 물음에 답하는 김청수.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부탄가스통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아 누나 말처럼 이 굴은 이미 우리의 침입을 눈치챘어요. 그러니까 저 입구에 발을 들이밀면 그때부터 시작일 거예요. ···아마도. 생식충들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눈이 퇴화했다고는 해도 배를 두드려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페로몬도 일부 사용하기도 하니까. 이미 우리를 상대할 준비를 마친 상태겠죠."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여왕 개미방으로 통하는 입구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입구가 좁은 탓에 내부 공간을 전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본 공간보다 더 넓은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림자가 벽까지 닿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 탓에 아이들의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저 안에 아이들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저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길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여왕개미방 안에 아이들이 무조건 잡혀 있다는 생각으로 돌입해야 하리라.
"청수야, 여왕 개미 옆에 있는 왕만 죽이면 탈출할 수 있다고 했지?"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그래요. 흰개미들의 습성상 왕을 죽이면 알아서 자기들끼리 사분오열해서 자멸하거나 뿔뿔이 흩어지니까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여왕 개미는 왕이 죽는다고 해도 처녀 생식이 가능해 번식을 할 수 있는 개체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왕이 죽는 순간, 여왕의 휘하에 있던 남은 흰개미들이 그동안 지켜왔던 여왕을 향해 집게를 들이밀어 군체가 삽시간에 사분오열된다는 것이 김청수의 이야기.
군체가 혼란에 빠진 틈에 우리는 굴에서 빠져나간다는 탈출 계획이기도 했다. 변종 흰개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싹 뒤쫓지만 않아도 도망치는 건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계획이 실행되기 전까지는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일단 당장 우리의 계획은 그러했다.
나는 그 계획을 일행에게 다시 한번 인지시켜 주었다.
"여기서 왕처럼 보이는 흰개미는 안 보이고···. 결국 그것도 들어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소리네. 흰개미들이 저렇게 많은데 아이들도 구하고, 왕도 죽일 수 있나? 하나만 해도 빠듯할 것 같은데. 게다가 이상한 소리도 들려. 뭔가 부글부글 하는 소리."
지수가 한숨을 내쉬며 도끼를 들었다. 그녀의 꼬리는 곧 다가올 상황을 인지한 듯 바싹 굳어 있었다.
"소리가 들린다고? 아니, 어쨌든 지수 너는 왕을 찾아서 죽이는 것에만 전념해 줘. 아이들 구하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지수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상황을 더 파악하고 들어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었던 까닭이었다.
아이들을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머지는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판단하며 행동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하아, 좋아. 어떻게든 왕 찾아서 죽이고, 겸사겸사 아이들 위치도 보이면 바로 소리쳐서 알려줄게. 그럼 됐지? 근데 왕 흰개미는 어떻게 생겼어? 그것만 알려 줘."
"여왕 개미 주변을 맴도는 갈색 콩벌레 같은 게 있을 거예요, 지수 누나. 그게 흰개미 왕이예요."
"갈색 콩벌레라···. 알았어."
거대해진 벌레를 상상했는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지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끝으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는 여왕 개미방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청수야, 너는 부탄가스통 잘 들고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던져. 예린이도 내가 신호하면 거기에 푸른 가루 뿌려서 바람막 만들어 줄 수 있지?"
"네, 형."
"할 수 있어요, 오빠! 반드시 해낼 거예요!"
"좋아. 마지막으로 세아씨."
"네?"
긴장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한세아는 자기 이름이 들리자 화들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놀란 마음에 의해 가슴과 손전등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큰 거 한 방 먹이고 시작합시다."
"아! 넵! 강화탄 먼저 쏘라는 말이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
우리가 방에 가까워질 수록 귓가에는 수십 수백개의 다리가 비벼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있었다.
좁혀지는 거리를 감지한 변종 흰개미들이 침입자를 상대하기 위해 입구로 대거 몰려들고 있는 모양이다.
놈들은 좁은 입구를 막아 최대한 피해를 줄일 심산이겠지.
하지만 그 전략은 우리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구멍이 막혀 있다면 뚫어 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일반 탄환으로는 불가능하나, 푸른 입자로 강화된 총알의 우습지 않은 위력은 그걸 가능케 할 것이다.
이윽고.
?찰박!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는 좁은 입구 앞에 섰다.
찌르르르-!
퉁- 투둥-
입구부터 시작해서 여왕 개미가 있는 곳까지의 길목을 전부 채운 변종 흰개미들이 보였다. 놈들은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정신없이 배를 떨어 소통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여왕 개미는 여전히 알을 낳고 있었다.
짤각- 짤깍-
"···세아씨. 준비되는대로 쏘십쇼."
나는 주제도 모르고 내 앞에서 위협적으로 집게를 움직이고 있는 병정 개미를 노려보았다.
"흐읍···! 다들 뒤로 조금 물러나요."
한세아는 권총을 전방으로 겨눴다. 총구는 입구를 막고 있는 흰개미들을 지나, 그 너머에 있는 여왕 개미를 함께 노리고 있었다. 거기까지 피해를 입힐 심산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타-아아앙!
푸른빛 줄기가 변종 흰개미들을 갈아버리며 앞으로 쏘아졌다. 놈들은 입구를 단단하게 막고 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강화탄의 위력을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죽어 나갔다.
촤르륵-
철퍽- 철퍽-
원형의 구멍 사이로 끈적한 체액이 쏟아진다.
그와 동시에.
"지수야! 가! 계획대로 해!"
나는 한세아의 강화탄이 지나가면서 생긴 뻥 뚫린 공간을 보며 지수에게 외쳤다. 빈틈이 생긴 지금이 아이들을 구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변종 흰개미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본진 깊숙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지수뿐이었다.
이제는 나, 한세아, 예린, 까마귀는 그녀가 재빨리 파악한 아이들의 위치를 알려주고, 두 번째 목표인 왕 흰개미를 죽이고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방에서 밀려들기 시작한 변종 흰개미들을 죽이면서 말이다.
이제 벌레들로부터 아이들을 되찾을 시간이었다.
"버티고 있어, 아저씨!"
습기와 넝쿨이 가득한 이 방에서,
어지럽게 움직이는 세 쌍의 다리가 가득한 이 방에서,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배가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이 방에서, 한 차례 변형된 커다란 집게 턱이 위협적으로 짤깍거리는 이 방에서,
파지직-!
금안을 빛낸 지수가 하얀 키틴질의 파도를 가르며 한 줄기 섬광처럼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