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1 - 231. 흰개미 (10)
보글···
보글···
손바닥만 한 초록색 기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다가.
━톡!
터지게 되면 안에 담겨 있던 이상한 가스 같은 물질이 작은 물방울로 나뉘어 사방으로 튀긴다.
수면 아래로 들어가게 된 그것은 이내 기포가 되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주변의 모습 또한 크게 달라져 있었다. 겨우 여왕 개미를 밟고 그 너머로 왔을 뿐이건만.
천장에서부터 줄기를 내려 보낸 가시 넝쿨.
그 주위에는 기이할 정도로 변종 흰개미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유독 그 빈자리만 눈에 띄는 건 그곳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 전부가 흰개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덩이 안에 가득 담긴 초록색 액체.
정체불명의 액체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액체 속에 담긴 이름 모를 동물의 뼛조각이나 살점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걸 보아하니 결코 좋은 역할은 아니겠지. 구덩이 중앙에 아이들이 놓여 있는 모습은 이 구덩이 아니, 못의 역할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했다.
여왕 개미에게 박혀 있는 얇은 나무뿌리과 넝쿨 줄기들.
이것이 크게 못 움직이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까닭이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산란 기관이 비대해진 탓도 있겠지만 애초에 몸통이 나무뿌리들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수상한 못의 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넝쿨 또한 여왕개미의 산란 기관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그것들은 지속해서 꿀렁거리면서 산란 기관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입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광경은 마치━
'···실험실 같잖아.'
그래, 이곳은 변종 넝쿨의 봉오리가 사냥한 것을 토해내는 장소인 것과 동시에 변종 흰개미들에게 소화한 사냥감의 특성을 부여하는 장소이리라.
박채연과 박수린의 날개에 실낱 같은 섬유질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그런 추측을 하는데 한몫 더해주고 있기도 했다.
김대현과 최민수는 자기들 나름대로 자매를 지키기 위해 몸으로 감싸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축 늘어진 몸은 그들이 정신을 잃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려주었다.
"야! 까마귀! 나 따라와!"
빠르게 주위의 모습을 눈에 담은 나는 곧장 못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액체가 유독한지 아닌지 더 판단한 겨를은 없었다.
유독한 물질이라면 더 서둘러서 아이들을 꺼내야 할 것이고, 유독하지 않다고 해도 서둘러야 하는 것은 변치 않는다. 어차피 해야 하는 행동은 동일했다.
[까아아악!]
푸드더덕!
나보다 한 박자 늦게 반응한 까마귀는 큰 날갯짓으로 나보다 빠르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도달했다. 녀석은 이내 뱁새 자매의 날개에 달라붙은 이상한 섬유질 가닥을 조심스럽게 끊어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생긴 것과 달리 강도는 강하지 않은 듯 실낱 같은 그것은 손쉽게 툭툭 끊어졌다.
"지수야! 계획대로 아이들은 나랑 까마귀가 빼낼 테니까 너는 어떻게든 왕 찾아서 죽여!"
나는 숨을 헐떡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에 지수에게 외쳤다.
"아으······! 나도 그러고 싶은, 데! 안 보인다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귀를 쫑긋거리고, 눈을 빛내면서 흰개미 왕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공동 안에 원체 많은 변종 흰개미들이 있는지라 왕을 특정해 내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타타탓- 타탓!
나도 겸사겸사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려 봐도 보이는 건 검은 집게를 짤깍거리면서 접근하는 병정 개미들뿐, 김청수가 말했던 갈색 콩벌레 같은 흰개미 왕은 찾을 수 없었다.
콰직!
"···흐읏! 저리 꺼져! 아저씨, 일단 가!!"
지수가 소방 도끼로 병정 개미 머리를 터트린 후 외쳤다. 상체가 격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는 상당히 지친 상태처럼 보였다. 아니, 쉬지 않고 싸워댔으니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첨벙! 첨벙!
나는 수많은 사체들이 가득 담긴 못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끈적한 점성을 가진 액체들이 신발과 바지에 눌어붙는다.
찌덕······
간혹 물컹거리는 감촉과 함께 미처 녹지 않은 살점과 뼛조각이 딸려 오기도 했다.
바로 그때.
첨벙···!
콱-!
천장에서 병정 개미 한 마리가 떨어져 내 앞길을 막는 것과 동시에 놈은 집게를 내가 있는 위치에 내려찍었다. 집게가 하단부를 노리는 걸 보니 움직임을 막으려는 심산인 모양이다.
"흡!"
나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러 다리를 노리는 집게를 피해냈다. 혹시 못에 있는 액체가 입에 들어갈까 싶어 입을 꾹 다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촤즈즉!
후두둑- 후두둑-
옆으로 밀려나는 내 움직임에 의해 고여 있던 액체들이 비산했고, 잘게 찢어진 물방울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떨어져 내린다.
뚝- 뚝-
흠뻑 젖은 머리에서 점액질들이 볼을 타고 떨어진다.
갈수록 시간과 체력이 모자라지고 있는데 주제도 모르고 자꾸만 방해하는 변종 흰개미들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화를 표출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
수많은 병정 흰개미들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사방에서 몰아치는 키틴질의 파도에 의해 질식하고 말 것이다, 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탕! 타타탕!
산란 기관에 가려 보이지 않는 너머. 즉 한세아, 예린, 김청수가 있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발포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쏠 수 있을까.
탄약이 얼마나 남았을까.
타-아아아앙!
드문드문 공동을 환하게 밝히고, 내부를 웅웅 울리게 하는 강화탄 소리만 벌써 네 번째다.
총알만 소모되는 거면 모르겠으나, 쏠 때마다 푸른 입자도 같이 소모되니 그녀가 가진 푸른 조각도 힘을 다해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더 서둘러야 해.'
눈가를 뜨지 못하게 만드는 액체를 거칠게 닦아내 시야를 확보한 나는 도끼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쐐애액!
콰직! 콱!
두어 번 휘둘러진 도끼에 의해 병정 개미의 집게와 머리가 차례대로 부서진다.
공격을 당한 놈은 어떻게든 일어나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놈이 움직일 수 있는 건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철퍽-
공격 수단과 몸을 제어하는 부위를 잃은 병정 개미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죽었다.
그리고 초록색 점액질이 죽은 병정 개미의 사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녹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츠르륵···
변종 흰개미의 껍데기는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잘게 분해된 것이다.
오직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한 쌍의 더듬이만이 조금 전까지 흰개미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씹."
지금 내가 무사한 것은 몸에 둘러진 푸른 입자 덕분이리라.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저 꼴을 면치 못했겠지.
이곳에서 급히 벗어나야할 이유가 늘었다.
첨벙- 첨벙-
녹아 사라진 병정 개미를 뒤로한 채 계속 움직인 나는 네 명의 아이들이 눕혀진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비켜봐!"
까마귀를 밀어내고 급하게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들을 잠식해가던 이상한 섬유질은 까마귀가 어느새 전부 처리한 후였다.
'···아직 살아 있다.'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아직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있었다.
온기가 점점 미약해지고 있었기에 일단은 그나마 안전한 후방으로 옮겨 놓는 것이 우선일 듯했다. 예린에게 부탁해 바람을 둘러줘야 하기도 했고.
그리 생각한 내가 아이들을 안아 든 순간.
"······."
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뱁새 자매의 날개에 깃털들이 뭉텅이로 빠져 있었으니까.
변종 흰개미들에게 잡혀가는 와중에 살려달라며 필사적으로 깃털을 뽑아 경로를 알려 준 흔적이었다.
"···까마귀 네가 두 명 챙겨. 수린이랑 채린이는 내가 챙길게."
[까아아악!]
자신감 있는 울음소리를 토해낸 까마귀.
녀석의 등에는 내가 떨어지지 않게 로프로 몸을 감아 둔 김대현과 최민수가 올려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다 옮기고 싶었지만, 내게 팔이 여러 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까아아아아악!]
등에 올려진 아이들을 확인한 녀석은 다시 한번 길게 울부짖으며 기묘한 파장을 주위로 퍼트렸다.
그와 동시에.
파파팟!
사체와 점액질이 가득한 못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들이 튀어나왔다.
"뭐 해?! 빨리 나와!"
나는 까마귀를 잡아 끌며 재촉했다. 초조함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손전등 빛을 그대로 반사시키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간단하게나마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무엇보다 동선을 낭비할 여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눈을 잠시라도 돌리는 것조차 사치였다.
첨벙! 첨벙!
나와 까마귀는 정신을 잃은 아이들을 데리고 못에서 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한세아, 예린, 김청수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찌르르르-!
중간중간 빈틈을 노린 병정 개미들이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뛰기만 해! 나머지는 내가 막아줄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흰개미 왕을 찾아다니던 지수가 한달음에 달려와 도움을 준 덕분에 멈추지 않고 계속 뛸 수 있었다.
콰직! 콱!
콰드득!
흰개미들의 체액에 흠뻑 젖은 그녀는 소방 도끼를 수차례 휘둘러 다가오는 병정 개미들의 머리나 몸통에 구멍을 내주었다.
철퍽!
도끼가 키틴질 장갑을 찢어 놓을 때마다 불투명한 흰색의 체액이 울컥울컥 쏟아진다.
"왕은 어쩌고?!"
"미안! 나 혼자서는 무리야! 좀 다르게 생긴 녀석이 있는 건 확실한데 너무 빨라서 못 잡을 것 같아! 하다못해 주변이 환하게 밝기라도 했으면···!"
지수는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지 분통을 터트렸다.
TV채널이 바뀌는 것처럼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달라진다. 손전등과 헤드 랜턴이 빛을 강하게 내뿜었지만 이 거대한 공동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생각보다 공동이 매우 거대했다. 그러니 지수 혼자 왕을 찾아 죽이는 것 또한 역부족이었겠지.
그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이렇게 옆에서 지원해주는 것만으로도 지수는 할 일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꾸만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기는 흰개미 왕을 한순간이라도 포착하기 위해서는,
빛.
잠시뿐이라도 좋으니 지수의 말처럼 더 강한 빛이나 몰이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파악-!
지수, 까마귀와 함께 여왕 개미의 산란 기관을 발로 박차는 것과 동시에 문득 내 시선이 발아래로 향했고, 무언가를 눈에 담았다.
내가 미리 도끼로 구멍을 낸 드럼통에서 휘발유가 줄줄 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불을 질러야겠다.
전부 다 태워 버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