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32화 (233/497)

Chapter 232 - 232. 흰개미 (11)

촤르르륵!

후두둑- 후두둑-

도약한 몸이 아래로 떨어지며 두 다리가 땅을 긋는다. 바닥에 고인 체액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혼자가 아니라 무기와 아이 두 명의 무게까지 더해진 터라 적지 않은 충격이 다리에 전해졌지만, 버틸만 했다. 빠르게 눈을 굴리니 까마귀와 지수도 무사히 착지한 모습이 보였다.

찰박! 찰박! 찰박!

나, 지수, 까마귀는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곧장 땅을 박찼다. 해야 할 일은 많았으나 그중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일은 아이들은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었으니까.

"청수야!! 토치!! 토치 켜!"

나는 급하게 달려 나가는 사이에 아이들을 건넬 준비를 마치며 크게 소리쳤다.

"네, 네!"

손전등에 비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김청수는 잠시 당황했을지언정, 재빠르게 토치 버튼을 눌러 가스 불을 켰다.

달깍! 달깍!

치이이이이익!

몇 번의 눌림 후 토치에서 푸른 가스불이 분사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좀 더 밝아진 주변에서는 온갖 형태의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일렁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잔여 탄수를 확인하며 재장전하는 한세아의 그림자,

푸른 가루를 흩뿌릴 준비를 하며 두 손을 꼭 쥐고 있는 예린의 그림자, 토치의 불이 꺼지지 않게 지키며 어설프게나마 삽을 휘두르는 김청수의 그림자,

그리고 주위 온도를 높이는 가스 불을 끄기 위해 격하게 달려드는 변종 흰개미들의 수많은 그림자.

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

거대한 공동을 정신 사납게 울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적지 않은 수를 죽여 왔건만, 여전히 공동을 울릴 정도의 수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귀를 긁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흰개미 왕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이대로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까지 달리는 건 가능은 하겠지만 금세 따라잡히고 말겠지. 그도 그럴게, 같이 움직여야 하는 인원이 넷이나 추가되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이동 속도가 줄어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변종 흰개미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수순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세아씨! 청수야! 애들부터 받아! 예린아! 저기 드럼통 주변을 바람으로 막아줘! 그리고 까마귀랑 같이 그대로 입구까지 달려!"

나와 지수는 한세아, 예린, 김청수, 까마귀가 도망치는 동안 여기에 남아 흰개미 군체의 혼란을 유도해야만 했다.

"현우씨는요?!"

"저는 지수랑 왕 죽이고 가겠습니다! 이대로는 못 가요!"

"하지만···!"

한세아는 뭐라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묵묵히 들어 줄 시간은 없었다.

"일단 가십쇼! 오래 안 걸릴 테니까 금방 뒤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어서 가요!"

나는 그녀를 강제로 앞으로 떠밀었다.

한세아도 어쩔 수 없다라는 걸 인지했는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이내 김청수, 예린, 까마귀와 함께 몸을 뒤로 돌렸다.

"오빠! 오빠가 시킨 대로 드럼통 주변 바람으로 막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일 끝내고 따라와야 해요? 계속 기다릴 테니까···!"

예린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어느새 김청수와 까마귀에게 나뉘어 들려 상태였다. 천만다행으로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죽지 않은 상태에서 구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나와 지수가 마지막으로 할 일을 마치는 것뿐.

콰직!

"하아, 하아, 아저씨. ···계획 있는 건 맞지? 그냥 시간 벌겠다고 남은 건 아니지?"

지수가 우리를 지나쳐 도주하는 일행에게 가려는 병정 개미들을 끝장내며 물었다. 그녀의 꼬리는 더 이상 털을 부풀릴 힘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도와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어떻게 하아, 하아- 할 건데?"

"불을 지를 거야. 휘발유랑 여왕 개미 뒤편에 있는 가시 넝쿨에."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가시 넝쿨 주변에는 변종 흰개미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

그것에 달린 가시의 독이 흰개미들에게도 유효한 것인지, 그냥 우연의 일치였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만약 변종 흰개미들이 가시의 독에 면역이 없다면 줄기가 타면서 내뿜는 연기에도 면역이 없을 가능성이 크리라.

훈련장에서의 이야기를 들었던 지수는 가시 넝쿨을 크게 경계하며 불을 쓰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이 섰다.

현재 나와 지수에게 남은 푸른 입자의 잔량이 갈수록 줄어만 가는 것이 현실. 그러니 완전히 바닥나기 전에 빠르게 해치워야 했다.

최대한 멀리 흩뿌린 휘발유와 가시 넝쿨에 불을 붙여 공동 내부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동시에 연기로 혼란을 주고, 빛과 혼란을 피해 달아나는 흰개미 왕을 한쪽으로 몬 다음에 잡아 죽이는 일련의 과정을 말이다.

벽면에 붙은 넝쿨에서 바람이 지속적으로 나오기까지 하니 정신에 혼란을 부여하는 연기는 순식간에 공동 내부로 퍼지겠지.

그말인즉슨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러니 나와 지수는 푸른 입자가 머리를 보호해주는 동안에 우왕좌왕하는 흰개미 왕을 죽이고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가시 넝쿨에다가 불을 지른다고? ···아니, 일단 알았으니까 뭐라도 해봐."

"좋아. 우선 휘발유에 불부터 붙일 거야. 가시 넝쿨은 그다음이고."

이윽고, 우리는 가스 불을 격하게 내뿜는 토치를 들고 드럼통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장 토치를 액체 상태인 휘발유에 가져다 대어 온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휘이이이···

드럼통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 벽이 생성되어 가열되고 있는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었다. 인위적인 밀폐 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혹여 예린이 실패하면 어쩌나 했는데, 바람 공간이 제대로 만들어져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가스 불이 휘발유의 표면에 열을 가하면 가할수록 증발 속도는 빨라질 것이고, 이내 기체로 변한 휘발유에 불이 붙게 되겠지.

활활 타오르는 불은 공동 내부의 온도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남아 있는 변종 흰개미들에게 큰 위협이 되리라.

김청수가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놈들의 체온이 올라가면 배 속의 미생물들이 사멸해서 굶어 죽을 테니까.

자기들이 살고 싶다면 나와 지수를 쫓는 것보다 불을 끄는 걸 우선시할 것이다. 우리는 그 틈에 빠져나가면 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병정 개미들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손전등 빛이 아닌 가스 불이 켜진 순간부터 놈들은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찌르르르르르!

병정 개미 하나가 몸통을 격하게 떨어대며 집게를 위협적으로 들이댄다.

쐐애액!

콰직!

숨을 참은 지수는 소방 도끼의 피크 부분으로 변종 흰개미의 머리통에 구멍을 내어 버렸다.

연이은 도끼질에 힘이 풀린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하루 종일에 가깝게 싸우다 보니 몸에 익은 듯했다.

"흡!"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퍽!

무언가가 접근하는 낌새만 느껴져도 몸이 알아서 반응했으니까.

쉬지 않고 키틴질 장갑을 찢어왔던 도끼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카로움을 자랑하는 날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단단한 고무 같은 외갑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짤깍짤깍짤깍! 짤깍···짤각······

병정 개미는 안에 담긴 체액을 모조리 쏟아 낼 듯 토해내며 집게를 미친 듯이 움직이다가 그대로 축 늘어져 죽었다.

"허억- 허억-."

움직일 수록 공동에 가득 찬 습기가 나를 좀 먹는다. 물기를 머금은 옷이 피부에 착 달라붙어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숨을 들이킬수록 변종 흰개미들의 체액 냄새가 코를 찌른다. 썩은 걸레 냄새 같기도, 퀴퀴묵은 먼지 냄새 같기도 한 체액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아직 참을만 했다.

아직 버틸만 했다.

바로 그때.

화르르르륵!

충분히 기화된 휘발유에 불이 붙었다.

"······!"

"아저씨! 됐다! 이제 가시 넝쿨만 불태우면 돼!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와! 얼른-!"

지수가 얼굴에 튄 체액을 거칠게 닦아내며 말했다.

"금방 갔다 올게!"

기껏 피운 불이 꺼지지 않게 지켜야 하는 것도 사실인지라, 나는 지수를 두고 여왕 개미 뒤편으로 향했다.

단순히 넝쿨에 불만 붙이고 돌아오면 되는 일이니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버둥버둥-

비대한 산란 기관을 가진 여왕 개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연이은 격한 몸부림 탓에 팽창한 복부의 상태가 매우 나빠졌다는 것일까. 마치 산란 기관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보였다.

타악-!

어차피 곧 죽을 괴물이고, 죽일 괴물이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란 기관을 밟아 뒤로 넘어갔다.

쁘직!

후방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으나 멈추지 않고 시야에 들어온 가시 넝쿨 더미를 향해 푸른 불을 최대한 응축해서 날렸다.

화르르륵!

곧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푸른 불덩어리. 이내 가시 넝쿨에 불이 닿자 기름이 확 번지는 것처럼 불이 빠르게 퍼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푸른 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 넝쿨을 격하게 타오르게 하는데는 충분했다.

휘이이이···!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공동을 순환하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다. 살아남기 위해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놓은 것이 놈들에게 독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쿵!

[끼이이이이이이!]

천장을 빠르게 돌아다니고 있던 무언가가 뒤집어진 채 떨어져 발작하는 소리를 냈다. 갈색 콩벌레와 비슷한 외형을 가진 그것은 지수가 그토록 찾았던 흰개미의 왕이었다.

"찾았다━━!"

그 모습을 본 지수가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금안이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꼬리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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