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3 - 233. 흰개미 (12)
버둥버둥-
세 쌍의 다리가 하늘로 향해 진 왕 흰개미는 다리를 오므렸다가 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몸을 다시 뒤집으려는 행동인 것 같기도, 정신에 이상이 생겨 경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시 넝쿨에서 나온 연기의 효과를 제대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내내 잘 도망다니던 놈이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질리가 없었으니까.
"흐얍!"
빈틈을 포착한 지수가 흰개미 왕을 죽이기 위해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녀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방해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다른 병정 개미들도 연기에 타격을 받았으니 말이다.
찌르···르···!
하나 같이 두터운 몸을 이리저리 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나마 나와 지수는 푸른 입자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우리도 저것들과 비슷한 꼴을 면치 못했으리라.
다만 가시 넝쿨의 양이 생각보다 적었기 때문에 혼란을 부여하는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공동 내부와 지상을 순환하는 바람에 의해 연기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던 것도 불안함을 가중시키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그러니 흰개미 왕이 혼란에서 벗어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죽여야만 했다.
쐐애애액!
흰색의 불투명한 체액으로 범벅된 도끼가 아래로 내려쳐진다.
그리고.
까-앙!
소방 도끼는 원래 목표였던 흰개미 왕이 아닌 애꿎은 돌멩이만 가격했다. 눈에 보이자마자 도끼를 휘둘렀건만, 그 짧은 사이에 몸체를 일으켜 도끼를 피한 것이다.
"아오···!"
지수가 빗나간 도끼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다시 한번 팔을 들어 올려 놈을 노렸다. 그러나 후들거리는 팔과 스파크도 거의 튀지 않는 모습은 그녀가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놈이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거리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기약 없는 술래잡기를 또 해야 할 듯싶었다.
"지수야! 내가 맞출 테니까 네가 마무리해!!"
여왕 개미의 산란기관 위에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도끼를 들었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지수를 대신해서 도끼를 던져 흰개미 왕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맞출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가만히 구경하는 것보다 일단 뭐라도 해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흡!"
나는 들이킨 숨을 참는 것과 동시에 있는 힘껏 도끼를 던졌다.
훙훙훙-!
으직!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도끼는 이내 살기 위해 도망가는 흰개미 왕을 맞췄다. 비록 몸통이 아닌 다리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아예 맞추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리 두쪽이 부러진 놈은 이제 재빠른 기동력을 잃게 되었다.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려진 것이다.
"이제 진짜 잡았어!"
그리고 그런 놈을 향해 지수가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콰직!
이번에는 도끼날이 바닥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가 아닌 체액이 빵빵하게 차오른 몸통에 제대로 박혔다.
[끼이이이이이!]
병정 개미보다 더 단단한 키틴질 장갑을 가지고 있는 놈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쳤다. 목숨줄이 어찌나 질긴 건지 아직까지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꾸득! 찌지직!
찰박찰박찰박!
나는 산란 기관을 박차 한 달음에 지수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뒤에서 어김없이 불안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지만 고개를 돌릴 여유는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간신히 키틴질 장갑을 뚫은 지수.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숨을 격하게 몰아쉬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카드드득!
나는 몸체에 박힌 소방 도끼를 발로 강하게 눌러 흰개미 왕의 머리 부분와 가슴 부분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자연스럽게 놈의 발버둥이 점차 멈춰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억- 허억-, 끄, 끝났-. 야야! 지수야···! 너 불 붙었어!"
목적을 이뤘다는 생각에 드는 안도감에 취한 나는 피로에 잔뜩 부어오른 손을 쥐었다 피며 말하다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화륵···
지수의 꼬리에 불이 붙어 털이 그을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다른 이능이 발현이 된 건가 싶었으나 그건 확실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능이었다면 꼬리털이 점점 불에 그을려가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응? 어? 어어? 으아! 아, 아저씨! 나 불! 불!!"
"가만히 좀 있어 봐! 꺼줄 테니까!"
지수 또한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꼬리에 붙은 걸 인지하자마자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끼얹을 물도 없고, 기름에 불이 붙은 것이기도 하니 일단 급한 대로 바닥에 있는 진흙을 한움큼 집어 꼬리에 발랐다.
치익-
다행히 그리 큰 불은 아니었던 지라 금방 꺼지는 불.
"불이 옆에 있는데 조심했었어야지!"
자칫 통구이가 될 뻔했다는 생각에 호통을 치자,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이 꺼진 꼬리도 축 늘어져 불쌍한 모습을 연출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가 바로 풀어 주었다. 탄력 있는 체구가 품에서 잠시 느껴지다 사라진다.
"그래도 다행이다. 무사해서."
"······응."
그러나 나와 지수가 온기를 느끼며 안도할 시간도 여의치 않았다.
찌르르르르!
상황이 전부 끝난 것도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시 넝쿨의 연기로부터 정신을 찾은 병정 개미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수는 무수히 많았다.
다각다각다각다각-!
더듬이와 머리를 흔들던 놈들은 배를 두들겨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 곧장 몸을 돌려 돌진했다. 우리가 아닌 자신들의 여왕 개미를 향해서 말이다.
김청수가 말했던 것처럼 여왕 개미를 죽이려는 행동을 보이는 아니, 이미 죽이고 있었다.
찌지직!
여왕을 지켜왔던 검은 집게는 이제 방향을 바꿔 여왕을 찢어 놓기 시작했다. 이미 내구성이 한계에 도달했던 산란 기관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안에 담고 있던 모든 것들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철퍽-철퍽- 철퍼덕-
곧 나올 예정이었던 알, 알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덩어리, 가득 차 있던 체액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진다.
철퍽!
그중에는 특이하게도 쭈글쭈글한 날개를 가진 흰개미도 있었다. 2차 여왕으로 성장하거나 다른 곳으로 세력을 퍼트릴 수 있는 생식충인 모양이다.
아마 아이들의 날개를 제대로 흡수했다면 저 날개를 움직여 군체를 사방으로 퍼트렸겠지.
화르르륵!
휘발유에 붙은 불은 아직 꺼지지 않고 거세게 타올라 주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위로 타오르는 불이 공동 내부 기온을 점점 올리고 있건만. 흰개미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비록 오래지 않아 꺼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짤깍! 짤깍!
찌지직!
병정 개미들은 여왕개미를 죽인다는 오직 하나의 목적에 매몰된 것처럼 보였다.
"···가자."
나는 도끼를 챙긴 후, 지수의 손을 잡고 한세아, 예린, 김청수, 까마귀가 달리고 있을 통로로 향해 뛰었다. 여왕 개미를 죽이고 나면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 자멸할 가능성도, 갈 길을 잃어 지상으로 분출될 가능성도 있었다.
바로 그때.
드드드드드드드!
여왕개미가 발작하는 것과 동시에 굴이 흔들렸다.
비대하게 부푼 배에 연결되어 있던 나무뿌리들이 점점 병정 개미들의 집게에 손상이 되면서 굴에 무언가 악영향을 끼친 듯했다.
"뛰어!"
"알고 있어!"
우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를 무시한 채,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순식간에 좁은 여왕개미방의 입구를 지나 긴 통로로 들어서자 굴을 울리는 진동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위기가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세아씨는 잘 가고 있으려나?'
생각보다 흰개미 왕을 잡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그 덕분에 이대로만 쭉 달리면 먼저 이동한 일행과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갈림길마다 표시해 둔 흔적을 따라 얼마나 내달렸을까.
타타타탓- 타탓-
"······아저씨! 저기 앞에 애들이랑 언니 있다!"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앞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한세아의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아씨! 예린아!"
나는 전방으로 크게 외쳤다.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내 예상보다 너무 빠른 만남이었다. 반가움과 동시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탕-!
"현우씨···!"
"오빠!"
알방에서 튀어나온 흰개미 한 마리를 처리한 한세아가 얼굴을 환하게 만들며 나를 불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예린도 잠시나마 표정을 밝게 만들었다.
"왜 여기까지밖에 못 갔습니까!"
"생각보다 길을 막는 게 많았어요!"
그녀는 무어라 설명을 이어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
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
드드드드드드!
나와 지수가 지나쳐 온 통로에서 흰개미 떼가 이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굴을 강하게 흔드는 지진은 덤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천장에서 흙 알갱이들이 세로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벽면에 달라붙은 넝쿨 줄기에서 나오는 습기와 바람은 어느새 멈춘 상태였다. 공급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얘기는 나중에! 청수야! 부탄 가스 던져! 세아씨는 총으로 맞춰 주시면 됩니다! 예린이는 이번에도 바람막 만들어 주고!"
"알았어요!"
"넵!"
김청수는 토치로 가스 불을 킨 다음에 냅다 후방 통로로 던졌다. 부탄 가스통에는 푸른 가루가 살짝 묻어 반짝거렸다.
불을 유지시키고 있는 푸른 가루는 점차 빛을 잃어갔다. 마치 타이머가 줄어드는 것처럼.
통- 토통- 데구르르-
가스통은 바닥에 수차례 튀기며 굴러 가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타앙···! ···!
한세아는 허리춤에서 곧장 꺼낸 권총으로 망설임 없이 가스통을 쏘았다. 사격음이 굴을 타고 메아리친다.
다행히 아직 권총이 망가지진 않았나 보다.
비록 망가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일단 쏠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퍼-어엉!
탄환이 바람막을 지나 가스통을 관통했고, 주홍의 폭발이 통로를 메우려던 찰나,
꾸드드드득!
흰색의 소화제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열기를 잡아먹고 통로를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