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4 - 234. 흰개미 (13)
꾸드드드득!
푸른 가루의 힘이 다하는 것과 동시에 포자를 형성한 소화제가 중앙 통로를 틀어막은 것이 보인다. 흰색의 포자 덩어리가 이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다각다각···다각······
소화제가 통로를 빈틈 없이 막아 버리자 후방에서 들려오고 있던 흰개미 떼의 이동 소리는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다시 움직여야만 했다.
"어후···, 일단 뜁시다. 저게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니까."
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거의 쉴 틈 없이 움직였던 터라 정신적인 피로감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욱···, 진짜 피곤해 죽을 것 같아요."
한세아가 헛구역질을 하려는 입을 손으로 겨우 막았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닌 일행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슬쩍 지수와 한세아의 푸른 조각을 바라보니 입자의 잔량 또한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각에 푸른 입자를 채워주고 싶어도 내가 가진 푸른 입자도 간당간당하게 남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서둘러야할 이유가 늘었다.
지금 우리가 깊은 지하에서 숨을 쉬고, 변종 흰개미들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푸른 입자덕분이었으니까.
그것이 바닥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청수야, 두 명 드느라 수고했어. 이제 나눠 들자."
"허억-허억-, 감사합니다···."
김청수는 군말 없이 아이 하나를 내게 건넸다. 흰머리오목눈이인 박수린이었다.
아이가 자랑하던 날개와 꼬리깃은 불품없이 변한 상태.
군데둔데 비어 있는 날개 깃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잡아 뜯은 자국이었고, 솜털이 이리저리 뭉친 꼬리깃은 못에 있던 초록 액체에 의해 녹은 자국이었다.
참담한 심정이 든 나는 묵묵히 아이를 받아 품에 안았다. 아이의 체온이 따뜻하게 돌아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지수야, 더 뛸 수 있지?"
"응, 내 걱정은 안해도 돼."
"세아씨는 총으로 달려드는 것들 죽일 수 있으시죠?"
"넵! 강화탄이랑 일반탄 조금 남았으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될 거예요."
한세아는 권총과 소총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권총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 더 버텨주리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요!"
[까아아악!]
그녀의 대답에 이어서 김청수와 까마귀도 할 수 있다는 답을 해주었다.
이윽고.
타타탓- 타탓-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는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후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통로를 뚫기 위해 집게가 포자를 마구 갉아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손전등 빛이 벽면에 붙어 있는 넝쿨들을 비춘다. 공기를 순환시키고, 습도를 유지키던 그것들은 빠르게 기운을 잃고 죽어 가고 있었다.
'···여왕 흰개미랑 연관이 있을 거야.'
굴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넝쿨들이 시들어 가기 시작한 것도, 나무뿌리가 통제를 잃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전부 여왕 개미가 죽어 가면서 시작된 현상이었으니까.
흰개미 왕을 죽이고, 혼란에 빠진 병정 개미들이 여왕 흰개미를 죽이는 틈에 무사히 탈출하려고 했던 계획이 되려 우리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의도치 않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길이 어디야! 왼쪽? 오른쪽?"
앞서 나가고 있던 지수가 고개를 휙 돌리며 외쳤다. 그녀가 잘 가다가 급하게 멈춘 이유는 지나온 길을 표시해 둔 흔적이 굴에 이상이 생기자 지워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길을 한번 잘못 들면 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빙빙 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옳은 길로만 가야 했다. 하물며 불안한 느낌이 점점 강하게 느껴지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욱 그렇다.
"언니! 왼쪽! 친구가 왼쪽이래! 왼쪽으로 가면 지상!"
푸른 가루가 담긴 유리병을 꼭 쥐고 있던 예린이 말했다.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아이의 눈에는 보이는 요정 친구들이 길을 알려 준 모양이다.
"왼쪽? 알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돌연 옆으로 몸을 날려 굴렀다.
그와 동시에.
쩌저적!
콰악-
흙으로 된 벽면을 뚫고 나온 검은 집게가 그녀가 있던 자리에 박혔다.
휘이이이-
통로에 갇혀 있던 공기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길이 뚫려 있는 곳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우리와 달리 변종 흰개미들은 자체적으로 길을 만들면서 이동할 수 있었기에 뜬금없이 벽이 뚫린 것 같았다.
"······! 지수야!"
"괜찮, 아!"
지수는 주위를 잠식한 흙먼지 사이로 도끼를 휘둘렀다.
훙-!
콰직!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가른 도끼날은 그 안에 숨어 있던 흰개미 하나도 같이 갈랐다.
타앙-!
이어서 불을 뿜은 총구는 지수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다른 병정 개미의 몸체를 터트렸다.
철퍼덕!
갈라지고, 관통된 키틴질 장갑 틈으로 끈적한 체액이 뿜어진다. 잇따라 쓰러지는 변종 흰개미들의 사체가 쌓인다.
"가!"
지수가 얼굴에 잔뜩 튄 체액을 거칠게 닦으며 소리쳤다.
타타탓- 타탓-
지수와 한세아의 엄호. 그리고 예린이 알려주는 방향 덕분에 우리는 계속 달릴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시야가 가물가물해져 윤곽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래도 눈을 부릅떠 주변 상황을 눈에 담았다.
손전등 빛을 반사시키는 도끼날과 총구에서 튀는 불꽃이 눈을 따갑게 자극했다.
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
그녀들이 착실하게 변종 흰개미들을 죽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많은 물량이 우리를 바싹 뒤쫓고 있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놈들의 목적이 우리를 죽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곧 붕괴할 것처럼 흔들리는 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함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놈들보다 여기서 먼저 나가야 한다는 것 또한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때.
"······콜록! 콜록! 아빠?"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정신이 든 박수린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비몽사몽 한 아이는 아직 정신을 온전히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 사람이 아빠이길 바라며 입을 연 듯했다.
"···미안, 아빠는 아니야."
"······."
"혀 깨물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안겨 있어. 반드시 살려줄게. 너도, 채린이도, 대현이와 민수도. 모두 다."
"네에···."
내 품에 안긴 박수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옷을 꽉 쥐었다. 그 작디작은 주먹 하나에서 느껴지는 힘은 미약했으나, 속에 담긴 살고 싶다는 의지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의 몸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은 나를 옭아매는 하나의 주박이었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아이가 내게 건 주박은 내 인간성을 시험하는 주박이었으니까.
분명 지금이라도 아이를 버리면 가벼워진 무게로 굴이 무너지는 것보다 여유롭게 탈출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캠핑장에 남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걸 생각하면 아이들을 버린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염두해 둘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를 악물면서 죽어라고 내달릴 뿐이었다.
그런 내 뒤로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가 바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하나 같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으나 어느 하나 멈추는 사람이 없었다.
드드드드드드드!
나무뿌리에 의해 발생하는 진동이 점점 거세진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두둑-
천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흙더미에서 자잘한 흙알갱이들이 세로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그러한 현상은 우리가 이동하는 통로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굴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전조였다.
바로 그때.
"에잇!"
예린이 푸른 가루를 한움큼 집어 사방으로 뿌렸다.
"······!"
무얼 한 거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아이가 뿌린 푸른 가루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곧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드득···!
푸른 가루는 균열이 벌어지는 걸 막아주고 있었다. 여전히 벽면이 무너지고 있긴 했으나 그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예전에 엄마가 아무리 귀한 거라도 쓸 때는 써야 한다고 그랬어요! 헤엑! 쓸 때 제대로 써야 물건이 그 가치를, 헥- 다 할 수 있다면서요!"
예린은 숨을 헐떡이면서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가만 놔두면 고무 냄새난다고! 헤엑! 했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러기 전에 내가 다 구할 거야···! 동생들 손 다시는 안 놓쳐어-!"
"그, 아니다. 알았으니까 그냥 뛰기만 해! 거의 다 왔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상황에서 과거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데 고무 냄새고 나발이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이가 뿌린 푸른 가루 덕분에 우리가 굴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빛이다!"
누가 외쳤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통로의 끝에서 뚜렷한 빛줄기가 보인 것이다. 우리가 들고 있는 손전등이나 헤드 랜턴이 내뿜는 인공적인 빛이 아닌 하늘에서 내리쬐는 찬란한 태양의 빛이었다.
들어왔을 때만 해도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건만. 어느새 시간이 동이 트다 못해 해가 높게 뜰 정도로 많이 지난 모양이다.
"하아! 하아! 빨리! 더 빨리! 아오! 저리 꺼지라고!"
지수는 자꾸만 길을 가로막으려고 하는 변종 흰개미들을 죽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콰직!
그녀의 도끼에 명을 달리한 병정 개미.
퍽-!
푸식-
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는 그것의 사체를 발로 밟으며 지나갔다. 딱딱한 고무 같은 질감이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져 오고, 안에 담긴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어지간하면 피해서 넘어갔겠으나 상황은 그걸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어푸! 큭! 켁! 콜록! 콜록-!"
예린이 둘러준 바람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고, 그 탓에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토사들이 입안에서 씹히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온몸이 땀, 흰개미들의 체액, 끈적한 진흙으로 범벅된 상태로 굳은 터라 얼굴을 닦기 위해 팔을 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애들! 애들부터 올려! 청수야! 먼저 올라가!"
어찌어찌 출입구에 도달한 우리는 김청수에게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재빨리 넘겨 주었다. 그는 정신없이 벽면에 돌출된 나무뿌리나 돌멩이따위를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그런 그를 한세아, 까마귀, 예린이 뒤따라 올라갔다. 손이 긁히는 걸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은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한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됐어! 아저씨랑 나만 올라가면 돼!"
중간까지 무사히 올라간 예린의 모습을 끝으로, 나와 지수도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쿠웅-!
드드드드드드!
그리고 푸른 가루가 힘을 다해 통로가 기어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거의 동시였다.
후두둑-
굴 깊숙한 곳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충격이 나와 지수의 몸을 뒤흔들었다. 벽면을 움켜잡은 손아귀에 땀이 진득하게 묻어나온다.
"제발··· 제발···!"
귀를 쫑긋거리던 지수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팔을 번갈아 뻗었다.
얼굴이 희게 질린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후방에서 밀려오는 흙먼지 폭풍과 토사가 쏟아지고 있는 소리가 들렸으니 말이다.
빠르게 접근하는 그것은 우리의 숨통을 콱 조이게 만들었다.
푸확-!
우리가 필사적으로 흙먼지를 뚫고 지상으로 탈출하는 문턱에 손을 올린 것과 동시에.
쿠르르르륵-!
개미굴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