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5 - 235. 다시 아이들 (1)
토사의 파도가 나와 지수를 잡아먹기 직전에,
"푸하!"
우리는 바깥에서 끌어당기는 손아귀에 의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상으로 탈출한 우리를 맞이해준 것은 따사로운 햇빛. 그리고 탈출 성공의 기쁨을 순식간에 지워 버리는 엄청난 탈력감과 피로감이었다.
"으아!"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는 너나 할 것 없이 뒤로 발라당 드러누웠다. 잠도 자지 못하고, 체력이란 체력은 전부 가져다 쓴 탓에 이제는 손 하나 까딱거릴 힘도 없었다.
우리가 빠져나온 곳이 원래 출발지였던 병목안캠핑장이 맞는지, 주변에 살아남은 변종 흰개미들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허나, 잠시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짧은 사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푹 놓는다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숨을 돌리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지수.
그녀는 눈을 부시게 하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혹사당한 그녀의 귀는 축 늘어져 접혀 있는 상태였다. 이제 쫑긋거릴 힘도 없는 듯했다.
한세아.
그녀는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손에 흙이 잔뜩 묻은 걸 보아 하니 나와 지수를 위로 끌어당겨 준 사람이 한세아였던 모양이다.
예린.
아이는 절을 하는 것처럼 엎드려 있었다. 기절한 건가 싶어 시선을 좀 더 집중해 보니 단순히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것이다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김청수.
그는 용케 쓰러지지 않고,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안도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은 나조차도 안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까마귀.
날개에 부상은 입었었던 녀석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거진 이틀이나 밤을 샌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하물며 변종 흰개미들을 죽이면서 잔뜩 잡아먹기까지 했으니 어련하겠는가.
박채연, 박수린, 김대현, 최민수.
아이들은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으나 무슨 연유인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깃털이 뭉텅이로 빠진 걸 제외하면 눈에 보이는 심각한 상처는 보이지 않아서 내심 안심이 되었다. 지금 혼이 쏙 빠진 표정인 건 정신없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이리라.
마지막으로 주변의 풍경.
굴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지반도 같이 주저앉은 탓인지 굴에서 빠져나온 변종 흰개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가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거의 0에 가까워 보였다.
아무리 흙이나 나무에 굴을 팔고 둥지를 트는 흰개미라고 하더라도 위에서 덮치는 토사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끄응-, ···뭐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났다. 무언가 주위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까닭이었다.
겨우 숨을 돌린 지수, 한세아, 예린도 나를 보더니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 캠핑장 맞지?"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지수.
"맞···을 걸요? 아, 맞아요! 저기 지붕이! ···튀어나와 있네요."
그런 지수에게 한세아가 답해주었다. 그녀는 근처에서 이질적으로 솟은 관리사무소 지붕을 가리키다가 말을 흐렸다.
"···왜 튀어나와 있지? 설마?"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사라진 나무뿌리들, 사라진 탈의실과 화장실, 지붕만 겨우 보이는 관리사무소 건물, 삐죽 튀어나와 있는 방수포 끝자락, 보이지 않는 아스팔트 도로.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더라니, 병목안캠핑장이 약간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 상태였다.
아마도 굴이 흔들렸던 여파가 지상까지 미친 듯했다. 주변은 마치 산사태가 휩쓴 것처럼 토사로 뒤덮여 있었으니 말이다.
"형, 이제 어떡할 거예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바닥에 파묻힌 차 꺼내서 바로 산에서 빠져나가야지. 삽이나 줘 봐. 삽은 그거 하나뿐이야? 더 없어?"
"있긴 있을 테지만··· 다 저기 밑에 있을걸요."
계획은 달라지지 않았다. 비록 당장은 변종 흰개미들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몰랐으니까.
그러니 휴식은 여기서 마치고, 서둘러 파묻힌 차량을 덮은 흙은 걷어낸 다음 곧장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리라.
그저 험비의 엔진이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껏 파냈는데 차량이 고장나 있다면 참으로 허탈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리 생각하며 삽자루를 손으로 붙잡았다. 또 힘을 왕창 쓸 생각하니 막막했지만, 어쩌겠나. 살려면 움직여야지.
"도와줄게, 아저씨!"
머리를 푸르르 흔들어 흙을 털어낸 지수도 도끼를 들고 합류했다. 도끼 피크 부분으로 흙덩이를 찍어 삽으로 쉽게 퍼내게 만들 심산인 것 같았다.
그녀의 꼬리털이 불에 잔뜩 그을려 엉망으로 변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을 뒤덮은 흙먼지, 변종 흰개미의 굳은 체액, 땀을 싹 씻은 다음에 옷도 깨끗한 거로 갈아입고, 여기저기 긁힌 상처도 치료하고 싶은데 그럴 여유조차 없는 현실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절대 안 나가!! 엄마랑 아빠가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여기 있어야 해! 기다리면 엄마가 돌아올 거야! 아빠가 먹을 거 잔뜩 들고 올 거라고!"
최민수가 고집스레 외친 것은.
"······."
"만약에··· 만약에 엄마 아빠가 왔는데 내가 없으면 걱정 많이 할 거란 말이야··· 나 안 나가···. 흐어어엉···."
아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도 않겠다는 듯이 바닥에 풀썩 앉았다.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다부진 모습만을 보여 주었던 아이가 우는 모습에 다른 아이들이 뒤따라 훌쩍이기 시작했다.
울음은,
쉽게 전염이 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어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아이들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무슨 심정인지 전부 이해가 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더는 기다려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안-."
나는 원망을 받아 내는 건 어른의 몫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삽자루를 쥔 손의 힘이 약해지는 걸 느끼면서.
바로 그때.
[···까아아악-]
체력이 바닥나 졸고 있던 까마귀가 약한 날갯짓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우는 아이를 달래려는 듯 부리를 살며시 내밀어 마구 비벼댔다.
그러다가.
툭- 투둑-
부리를 열어 금빛과 은빛을 내는 것들을 땅 위로 떨어트렸다.
"······?"
수리산의 아이들은 울음도 뚝 그치고, 까마귀가 부리에서 떨어트린 금붙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햇빛을 어지럽게 반사시키는 그것들은 까마귀가 기묘한 울음소리를 사용해 못에서 꺼냈던 장신구들이었다.
'······반지잖아.'
혼란스러운 와중에 거기서 대체 뭘 꺼낸 것인가 싶었건만. 온갖 사체들의 흔적이 가득했던━
"······아."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끔찍한 상상에 나도 모르게 탄식을 터트렸다. 옆에서 반지나 목걸이따위를 유심히 보고 있던 지수도 급하게 입을 막아 소리를 죽였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 모양이다.
여왕 개미 너머에 있던 못의 존재를 몰라 돌아가는 상황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한세아와 예린은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이게···."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김청수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한 채 천천히 장신구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러한 움직임에 아이들 또한 무언가 무의식적으로 짐작이라도 한 것일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시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저 말없이 울면서 김청수가 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울음을 참는 소리가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해 점점 커지게 되었을 때, 그제야 참았던 목소리를 하나, 둘씩 토해냈다.
"···이거 우리 엄마 목걸이인데···."
박수린은 덜덜 떨리는 작은 손으로 목걸이 하나를 집었다. 달 모양의 조각이 아래로 늘어진 목걸이였다.
"이건 우리 엄마아빠 결혼 반지······."
박채연은 털썩 주저앉으며 반지 한 쌍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작은 다이아가 박혀있는 반지였다.
"이게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자면서도 안 빼던 거라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왜, 왜···."
"···이것들. 밑에서 까마귀가 가져온 거야. 그러니까···."
나는 말을 잇지 못 하는 김대현의 물음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내가 말하지 못한 부분을 이해하고 말았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제발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아무리 눈을 감았다가 떠도 눈에 보이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어른들은, 엄마랑 아빠는. 우릴 버린 게 아니었어, 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매번 매 순간마다 원망했는데. 우리를 이곳에 두고서 도망친 거냐고··· 그래서 자기들끼리 사니까 좋냐고···, 항상 그렇게 속으로 생각해 왔었는데···."
부모가 죽은 것이 아니라 굳게 믿고 있던 최민수. 그 아이 또한 뱁새 자매 옆에 주저앉으며 장신구를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잡았다.
"차라리··· 차라리 그렇게라도 살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만나더라도 이렇게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김청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최민수의 말에 답해주었다. 아니, 그것은 답이 아닌 하나의 중얼거림일 뿐이었다.
아이가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고, 그도 답을 해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흑, 흐윽···. 흐아아아앙! 왜! 왜에━!"
떨리는 목소리로 한데 모인 장신구들을 하나씩 집어 이야기하던 아이들은 더는 참지 못한 울음을 크게 내뱉었다. 얼핏 처절하게까지 들리는 울음소리는 우리들의 귓가에 곧장 꽂혔다.
그 조그마한 눈에 어찌나 많은 눈물이 담겨 있었던지.
그 조그마한 손으로 원하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 하염없이 흙만 긁어 대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가엾게 보이던지.
"······!"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한세아와 예린이 헛숨을 크게 들이키며 입을 막았다. 그녀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예린은 저도 모르게 자기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슬픔이 전염된다.
나도,
지수도,
예린도,
한세아도.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고이고 있는 안타까움이 넘칠 것 같은 눈을 애써 위로 올리면서, 수리산에서 일어난 비극에 외면했던 슬픔을 뚝뚝 흘렸다.
굴에서 탈출한 기쁨을 얼마나 누렸다고 잠시도 쉬지 못하게 이런 일을 겪게 만드는가.
아이들이 죽다 살아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마음을 후벼 파는 현실을 보여주는가.
볼을 타고 흐르는 애석이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내 마음 속 짐은 늘어만 갔다.
야속했다.
이런 현실을 만든 세상이.
미안했다.
이런 세상을 미리 막지 못해서.
다짐했다.
반드시 세상을 다시 안전하게 만들기로.
그동안 참아왔던 탓일까.
한번 터진 둑은 쉽사리 막을 수도, 다시 높게 세울 수도 없었다.
휘이이이···
부스스··· 부스스···
약하게 부는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 삼아서 더 이상 캠핑장이라 부를 수가 없는 이곳에서는 한동안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땅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른 땅을 적시는 물방울이 늘어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을 수리산에 묶어두고 있던 주박이 풀리고 있었다.
사람을 괜히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끝내 절망에 빠트리게 하는,
바로 미련이라는 주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