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36화 (237/497)

Chapter 236 - 236. 다시 아이들 (2)

팍-!

삽날이 땅 깊숙이 파고든다.

푸욱-

그것은 이내 홈에 올려진 흙더미를 들어 올려 땅을 움푹 파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땅이 파인 곳은 점차 구덩이를 형성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후···."

나는 뚝뚝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 털어냈다. 힘을 계속 쓰다 보니 변종 흰개미의 집게 물린 팔뚝이 욱신거렸다. 피부가 정도 이상으로 찢어지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고통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냥 흙더미에 깔린 차량을 꺼내지 않고 가는 것도 생각하긴 해 보았으나, 차량 안에 만만치 않은 물자가 담겨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

하다못해 차문이라도 열어서 식량이나 식수 같은 물자를 꺼내야만 했다.

"···형, 여기 물 좀 마시세요."

김청수가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동생들과 함께 오열을 한 자국이었다. 수리산의 아이들뿐만이 아닌 나, 지수, 예린, 한세아도 적지 않게 울었으니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꼴이겠지.

"고마워."

나는 김청수가 건넨 물을 들이켰다.

현재 캠핑장에는 나와 김청수만 있었다. 아이들을 포함한 나머지 일행은 옆에 있는 인공 계곡으로 간 상태.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물 소리가 들린다고 한 말에 모두가 눈을 빛내며 가 버린 것이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까마귀조차도 슬그머니 한 발자국씩 움직이더니 이내 아이들을 따라 사라졌다. 아이들과 함께 씻고 싶었던 모양이다. 까마귀의 특성상 청결을 중요시하기도 하고.

하긴, 깃털에 온갖 흙먼지나 체액이 굳어서 달라붙어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괘씸하지만 말이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누군가는 남아서 작업을 시작해 둬야 빨리 끝마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들의 상처도 간단하게 응급 처치 해주고, 몸에 묻은 먼지만 씻고 돌아온 뒤에 바로 교대해준다고 했으니 나는 얌전히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휘이이···

위에서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의해 어느새 바싹 마른 흙. 그 위에 먼지가 자잘하게 떠다닌다.

푸욱-

입을 텁텁하게 만드는 흙먼지가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한번 삽으로 흙을 떠냈다. 겨우 기세를 줄여 가던 먼지가 다시 기운을 얻어 기승을 부린다.

그때였다.

"······이제 뭘 해야 할까요."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거리던 김청수가 입을 연 것은.

"형,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뭘···해야 하는 걸까요. 그동안 어른들이 돌아오기만을 다 같이 기다렸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는데···."

나는 아직 열려 있는 생수 뚜껑을 닫으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탈력감이 그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번아웃이 온 것처럼 말이다.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렇기에 부모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무의식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었던 김청수가 눈앞에 닥친 현실에 막막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콰악-

나는 일부러 그를 외면하며 마저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게 김청수에게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뭘 해야 햐냐, 라···."

그의 물음을 곱씹은 나는 삽에 올려진 흙더미를 멀리 던져 버렸다. 삽날 위에 잔뜩 올려져 있던 흙더미들은 관성에 의해 이리저리 흩어지며 비산한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매일 항상 하던걸 똑같이 하는 거지."

"······."

"그러다가 시간이 남으면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네가 거기서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 이상한 헛짓거리라도 좋아. 뭐라도 해서 그게 조금이라도 너나 동생들한테 좋게 돌아온다면 나쁠 게 없잖아? 속이 풀려서 기분이 나아진다던가, 찌뿌둥한 몸이 풀린다던가, 실없이 웃음보가 터진다던가."

그래,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가 수리산을 타고 캠핑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가 스스로 했던 일들을 이어 나가면 될 뿐이었다.

"밥이랑 물은 입맛이 없어도 꼭 챙겨 먹어. 이건 당연하지. 그래야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비록 그동안 먹어왔던 것들이 독성이 있는 열매와 빗물뿐이라고 해도, 그것들은 아이들을 어떻게든 살아남게 만들었다.

"가끔씩 심심하면 괜히 요란하게 대청소 한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리 깨끗한 곳이라도 먼지가 쌓이는게 보이잖아? 특히 여기는 산이니까 흙먼지가 더 쌓이기도 하겠지. 그런게 보일 때마다 한 번씩 툭툭 털어서 깔끔하게 만들어 주고. 뭐,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말이야."

김청수가 형이 끌고 온 험비를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관리해왔던 것처럼.

"그런 걸 매일 반복해서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 몸이 굳지 않는 게 중요해. 가만히 있는 건 쉬는 것이 아니라 체념한 거나 다름없거든."

무기력함이 몸을 좀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후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지. 절대로."

"···저는."

김청수는 무어라 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끝내 그 망설임이 말로 표현되는 일은 없었다.

"진부한 소리지만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게 보여. 그렇게 계속 살아 있으면 네가 할 수 있는,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점점 늘어날 거야."

내가 지금 이렇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건 살아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뜬금없이 길 한복판에서 정신을 차리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이상한 속삭임 때문에 목숨을 잃은 뻔한 일도 여럿 있었으나, 지수, 예린, 한세아 덕분에 어떻게든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녀들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의 도움도 함께 받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다 보니 신기한 푸른 불도 피울 수 있게 되었고, 머리를 아프게 하는 속삭임에게도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늘려나갈 거다.

"매일 밤 동생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 사소하지만 그날 웃겼던 일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어. 먼저 떠난 가족들을 회상하며 추억을 곱씹을 수도 있어. 당장은 슬픈 일을 훌훌 털어버리지는 못하겠지. 그게 당연한 거야. 하지만 앞으로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행복한 기억을 만들면 돼."

그러니까.

"뭘 하든 간에 일단 살아라. 그것만 하면 돼."

나는 김청수에게 그 말을 하면서 숨을 고르기 위해 작업을 잠시 중단했다. 험비의 국방색 차체가 조금씩 보이는걸 보니 조금만 더 파내면 차를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 듯했다.

한순간에 찾아온 침묵. 그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꼭 가셔야 해요? 남산이요. 그냥··· 그냥 우리랑 같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김청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건 안 돼.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거든.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지만 할 수 있다면 해야지. 여기까지 온 게 아깝기도 하고."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자꾸만 의지할 대상을 찾는 김청수.

"너에겐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동생들을 돌봐야지."

나는 그런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

"차만 꺼내면 바로 의왕시로 가자. 저번에도 말했지만 거기에 그나마 멀쩡한 생존자 캠프가 있어. 거기 사람들이 너랑 아이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제가, 저희가 여기 남은 이유는 결국 미련이었네요. 진작에 다 끝난 거였는데. 저랑 동생들은 그걸 알아차리지도 아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미련만 붙들고 있는 거였어요. 예전에 어른들에게 의존했던 것처럼.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단순히 그 기대감 하나만을 빌미로요. 정말 바보같이. ···하지만 이제 동생들이 의존할 희망도, 어른도 없네요."

"어른이 왜 없냐? 바로 내 앞에도 있구만."

나는 생수 병에 남은 물을 반 정도 마신 후에 가볍게 웃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물이 생각보다 시원했다.

"네?"

"너. 너도 어른이잖아. 지금까지 아이들이 누구한테 의지했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네 동생들을 살린 게 누군데? 너잖아."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나는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당연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갔다.

"······아."

"단!"

"······?"

"오늘까지는 아이답게 살아. 우리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말이야. 어리광도 부려보고··· 반찬 투정도 부려보고···. 아이답게. 그런 건 아이들에게만 있는 특권이거든."

"그래도 돼요···?"

그리 묻는 김청수의 표정은 앳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바싹 굳어 있었으나,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지럽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

"······."

김청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을 길게 천천히 내뱉었다. 얼굴이 바닥을 향해 있는 터라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겪어 왔던 경험. 사소한 것에 웃음을 터트리고, 직면한 위험에 두려움을 느끼고, 희망을 하나씩 잃어가면서 점차 절망에 빠지며, 마지막 남은 가족의 연결 고리인 동생들마저 잃을 뻔한 것에 대한 후회이겠지.

아이라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이기 때문에 어른보다 더 일찍 깨닫는 부분도 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느껴지고 있었지만, 막상 뒤돌아보면 바뀐 것은 그다지 없었다.

여전히 시간이 흐른다.

여전히 먼지가 쌓인다.

여전히 해가 뜨고, 달이 진다.

여전히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러한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바뀐 것은 나였다.

아니, 바뀌어야만 하는 것은 스스로였다. 그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바뀌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흐르는 모든 것들에게 매몰되어 사라지고 말 테니까.

털썩-

내 말을 들은 김청수는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형, 미안해···. 엄마아빠, 죄송해요······."

그리고 그는 아직 속에 남아 있었던 눈물을 마저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가 사과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이제는 그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가족이었다.

더 이상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없게 된 가장 가까운 연결 고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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