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37화 (238/497)

Chapter 237 - 237. 다시 아이들 (3)

김청수가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훌훌 털어낸 후,

"자, 물 좀 마셔."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생수 병을 건넸다.

그동안 쌓여 있던 게 어찌나 많았던지, 아주 그냥 펑펑 쏟아 냈던 까닭에 탈수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한번에 다 마시지 않고 조금 남겨두기를 잘했다.

"······감사합니다."

김청수는 꽉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더 이상 붉어질 부분이 없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바탕 울음을 쏟아 낼 때는 격해진 감정 탓에 주변이 보이지 않지만, 묵은 감정이 해소된 이후에는 전보다 더 주변을 잘 인지하게 되니 그런 듯했다.

다 같이 울면 사정이 좀 나았을 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그 혼자 운 것이지 않은가.

나 같아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른 걸 떠나서 정말 다행인 점은 그의 표정 한 켠에 후련함이 맴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묵묵히 기다려 준 이유도 그런 연유였다. 속에 쌓아둔 걸 제때 풀지 않는다면 그건 곧 병으로 이어지고 마니까.

파악-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땅에 박힌 삽날을 발로 눌러 깊게 박아 넣었다.

푹- 후두둑-

박아넣은 삽날을 기울인 후에 그대로 들어 올려 흙을 왕창 퍼냈다. 날의 크기를 초과한 흙더미들이 다시 아래로 떨어져 쌓인다.

"후우···."

쉬지 않고 움직이려니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 틈이 없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에는 흙먼지가 가득 섞여 불투명한 색을 자랑했다. 몸의 찝찝함이 점점 강해지는 건 덤이었다.

물을 마셔 정신을 차린 김청수는 내가 퍼낸 흙을 조금 더 먼 곳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기껏 퍼낸 흙더미가 다시 안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내가 삽으로 흙을 크게 떠내고, 김청수가 그 흙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의 진척도는 크게 상승했다. 밑에 깔린 차체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만 더 파내면 차 문을 열고 안에 담긴 물자를 꺼내거나 열린 차문에 고리를 걸어 차량을 지상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 듯했다.

'아니, 시동만 걸리면 그냥 차 타고 올라오면 되겠네.'

그래도 나름 군용 차량이지 않은가. 나는 군용의 튼튼함을 믿었다. 이번만큼은.

파악- 팍!

눈에 띄게 향상된 진척도에 우리는 말없이 몸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바로 그때.

"아저씨!"

물에 흠뻑 젖은 지수가 나와 김청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불에 그을렸던 그녀의 꼬리에는 붕대가 약하게 묶여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예린, 한세아, 박수린, 김대현, 최민수, 까마귀가 뒤따라 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밴드나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 다행히 자잘한 상처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나 보다.

"이제 가서 쉬어! 나머지는 내가 할게!"

물기를 짜내지 않은 옷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지수가 꼬리를 삐걱거리면서 말했다.

청결을 되찾으면서 한껏 기분이 좋아진 그녀의 꼬리였으나, 돌돌 감겨진 붕대에 의해 움직임이 제한된 탓에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까아아악!]

변종답게 어느새 체력과 피로를 회복한 까마귀도 얼른 가라고 옆에서 거들었다.

녀석은 다른 이들과 달리 물기를 말끔하게 털어낸 상태였다. 누가 새 아니랄까 봐 물에 젖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요. 쉬고 있어요, 현우씨. 나머지는 저희가 할게요. 현우씨도 간단하게 씻어야죠. 굴에서 묻은 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잖아요."

한세아가 물수건으로 정성스레 내 얼굴을 닦아주면서 입을 열었다. 어째 전부 물에 푹 젖은 고양이 꼴을 하고 있더라니 그것이 걱정돼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 굴에서 뿜어지던 습기와 바람이 마냥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여왕 개미방에 있던 초록 점액질이 가득하던 못이 그러했다.

액체 자체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그 못 안에는 다양한 사체들이 담겨 있지 않았던가.

썩은 물이나 다름없었기에 온갖 병균이 득실거릴 가능성이 크겠지. 그것들이 몸에 무슨 영향을 끼칠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푸른 입자로 몸을 보호하고 있어도 말이다.

심지어 액체 자체도 산성에 가까웠기에 매우 위험했다.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거의 다 파냈으니까 조금만 더 파면 끝이에요. 차 꺼내는 건 쉬울 겁니다. 제가 미리 만들어둔 경사로 타고 올라오면 되니까요. 뭐, 어디까지나 차에 시동이 걸린다는 가정하에 이야기지만요."

"아잇! 알았으니까 얼른 가서 씻고 와!"

"어어?"

나는 등을 떠미는 지수에 의해 강제로 밀려났다.

이윽고.

"알았어. 간다 가! 청수야, 너도 가자!"

"네, 형!"

나와 김청수는 아직 물이 샘솟고 있는 인공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파바바바박!

땅이 맹렬하게 파헤쳐지는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삽을 든 지수가 스파크까지 튀겨 가면서 흙을 파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김청수의 작업 속도도 느리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그녀의 작업 속도에 비하면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파이는 흙더미가 주변을 흙먼지로 뒤덮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콜록! 켁! 지, 지수씨!"

"케헹! 언니! 조금만 천, 천천히-!"

한세아와 예린은 지수를 말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 지수는 듣지 못했다.

결국 지수를 도와주려고 다가갔던 그녀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격한 기침을 토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저렇게까지 움직일 힘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얼른 씻고 돌아오죠, 형. 이러다가 작업이 먼저 끝나겠어요."

"···그래."

지수의 작업 속도에 질린 듯한 김청수의 말에 나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조금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서둘러 움직이여야할 듯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인공 계곡. 우리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콰콰콰콰-

수관이 비틀렸는지 분수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는 물줄기. 저 상태에서도 용케 물이 뿜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수처럼 솟는 물줄기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주변을 가득 메운 습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옷에 달라붙어 있던 굳은 흙이나 먼지 따위가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곧 완전히 물에 젖게 될 테니까. 지수, 예린, 까마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여분의 옷이 차량 안에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첨벙- 첨벙-

계곡물이 맑고 투명한 물이 아닌 쏟아진 토사로 인해 흙탕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수질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천천히 발을 수면 아래로 집어넣었다.

"어후···."

나와 김청수는 발부터 채워지는 차가운 물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쪽에 있는 물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에 의해 미지근했지만, 그 밑에 있는 물은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다. 한기가 빠르게 몸을 타고 흘렀다.

아무래도 얼른 몸에 붙은 더러운 것들만 닦아내고 빨리 나가야 할 듯싶었다.

첨벙! 첨벙!

우리는 시간제한이 걸린 것처럼 빠르게 옷에 물을 적신 다음 이리저리 비볐다.

흙탕물에 머리도 감고, 옷을 문질러 먼지를 씻어내고, 다친 팔은 최대한 깨끗한 물로 헹구면서.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몸에 조금씩 열이 올라 냉탕 같은 계곡물에도 적응이 되었다.

그러나 적응이 되면 뭐 하는가. 이제 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 시간이건만.

나와 김청수는 마지막으로 옷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흙 알갱이들을 최대한 제거하면서 지수, 예린, 한세아, 까마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근데 청수야, 그 구급 상자는 못 꺼낼 것 같은데 어쩌냐."

나는 문득 탈의실 건물 안에 있던 구급상자를 떠올렸다. 상자 아니, 정확히는 거기에 붙여진 포스트잇들이 그들의 부모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비록 까마귀가 유품을 물어다 준 덕분에 유일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소중한 것은 매한가지다.

꺼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탈의실 건물이 어디에, 얼마나 파묻혔는지 조차 몰랐으니 말이다.

당장 험비를 타고 수리산에서 떠나야 하는 마당인데, 땅을 전부 헤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시간도, 장비도 충분치 않았다. 체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괜찮아요. 그 상자가 없어도. 애초에 처음부터 꺼낼 수 있었다고 해도 그냥 두고 가려고 했어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김청수는 그의 동생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도 영 아쉽지 않은 건 아닌 듯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말 괜찮겠어?"

"네, 진짜 괜찮아요. 동생들도 괜찮다고 했고요. 그러니까."

김청수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차 타고 바로 남산으로 올라가요, 형. 저흰 따로 갈게요."

그리고 그의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물 밖으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는 걸 깜빡 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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