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9 - 239. 죽음 (1)
덜컹!
차제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린다.
"도로 상태가 안 좋기는 하네."
몸에 힘을 꽉 주고 버틴 지수가 말했다. 그녀는 곯아떨어진 예린을 품에 안은 채, 차량 내부에 달린 보조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차량이 조금 흔들릴 수도 있다는 나와 한세아의 말에 미리 대비를 한 것이다.
"뭐 방금이 마지막 방지턱일 거야."
나는 작은 창문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부러진 차단봉, 작은 관리사무소, 도로 경계선을 나누는 주차봉, 이리저리 꺾인 나무들.
우리는 현재 병목안캠핑장 정문 입구를 막 나선 참이었다.
차량이 밟은 것도 정문 구조물을 이루고 있던 가공된 목재였으니 방금 전처럼 차체가 크게 흔들릴 일은 없겠지. 적어도 캠핑장 구역만 벗어나면 도로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았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별다른 일이 없다는 가정하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부르르릉-
키긱- 키기긱-
차량은 불안한 소리를 토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아직는 그나마 눈에 익은 도로를 지나치는 중이었다. 비록 왕복이 한번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예비군 훈련장 가는 경로와 동일했으니.
"아···. 이거 차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겠네요. 처음 시동 걸 때부터 엔진 소리가 이상한 게 영···."
한세아가 묵직한 핸들을 돌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눈을 바삐 움직이며 주변의 모습과 계기판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봅시다. 가다가 도중에 차량이 멈추면 오늘은 그 근처에서 쉬고 가는걸로 하고요."
나는 그런 그녀에게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어 주었다. 매우 피곤한 기색인 한세아에게 사탕이라도 물려주면 피로가 조금 가시지 않을까 해서 한 행동이었다.
험비가 끝까지 살아 있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휴식처를 찾아야겠지.
무엇보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하루 종일 몸을 혹사시켰던 까닭에 체력이 한계에 달한 상태이기도 했고.
그 증거로 예린이 거의 기절한 수준으로 잠에 빠져 있지 않던가.
그러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날 밤을 무사히 보낼 곳을 찾아야 하리라.
"빨리 씻고 자고 싶어···. 흙을 너무 파서 그런가 몸 움직일 때마다 옷 안에 들어간 흙들이 자꾸 거슬리게 한다고."
지수는 말하면서 나를 보며 자기 입을 아, 하고 벌렸다. 무슨 뜻인지 몰라 내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의 눈은 점점 도끼눈으로 변해 갔다. 꼬리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바닥을 탁탁 쳤다.
화들짝 놀란 내가 급하게 손에 들고 있던 사탕을 입에 넣어 주고 나서야 그녀의 금안은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기도 사탕 하나 달라는 신호였던 모양이다.
'···그냥 말로 하지. 무섭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지수와 한세아의 대화가 이어졌다.
"세아 언니도 피곤하죠? 너무 피곤하다 싶으면 말해요. 제가 대신 운전할게요."
"어? 지수씨도 운전 면허 있어요?"
놀란 눈으로 지수를 흘깃 바라보는 한세아.
"아뇨? 없는데요?"
"그, 그럼 안 되죠···. 면허 없이 운전을 어떻게 해요···."
그녀는 예상 못 한 지수의 말을 듣고 나서 순식간에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 면허가 대수예요? 무면허 잡을 경찰도 없는 마당에. 그냥 급하면 운전대 잡는 거죠. 뭐, 그냥 핸들 막 돌리고, 엑셀이랑 브레이크만 구분해서 운전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냥 나중에 제가 운전 알려줄 때까지는 여기 앉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왠지 큰일 날 것 같으니까."
"칫. 치사하게···."
지수는 단호한 한세아의 엄포에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툴툴거렸다. 그러던 그녀는 이내 예린을 따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일련의 대화를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수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면허의 유무가 중요해진 세상이 아니다. 자격증을 인정해 줄 국가도 사라진 판에 얇은 플라스틱 카드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물론 운전대를 잡기 전에 기본적인 운전 방식은 당연히 숙지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나나 한세아가 알려주면 될 일이다.
나는 뒷좌석에 가지런히 실린 물자를 눈으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차곡차곡 쌓인 통조림 캔들, 용이한 운반을 위해 입구를 묶어둔 생수나 음료수, 이제는 떼놓을 수 없는 도구 가방, 언제나 옆에 놓여 있는 도끼.
그나마 다행인 점은 토사가 차량을 덮치면서 내부는 순식간에 흙더미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 덕분에 유실된 물자는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가져온 양 보다 상당수 줄어있는 까닭은 절반 넘게 아이들에게 줬기 때문이었다. 타먹는 초코 가루나 달달한 과자 같은 간식류들은 우리가 다 가져갈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는 최대한 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 캔 위주로 챙겼고, 예린이 먹을 간식만 일부 남겨 두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더 아이들에게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한몫하기도 했고.
비록 우리가 아이들의 진짜 부모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부모나 다름없었다.
[홍화브라운빌]
"아, 세아씨. 여기서 이제 우회전인 거 아시죠?"
나는 여전히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소규모 아파트 단지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 좌회전으로 가면 예비군 훈련장으로 가는 길목이 나오고, 우회전으로 가면 수리산의 영역 바깥으로 향하는 길목이 나올 것이다.
"그럼요. 알고 있어요."
한세아는 부드럽게 핸들을 꺾어 방향을 바꿨다.
덜컹- 끼기기긱-
자기들끼리 비틀려 살짝 솟은 아스팔트 도로에 흔들리는 험비. 차량은 느린 속도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61←1 창박로]
험비가 지나가면서 가로등 중간에 붙어 있는 표지판 하나가 앞뒤로 천천히 흔들린다.
휘이이이이- 차문이 사라진 틈으로 선선한 바람이 차체를 훑으며 들어온다. 차량 내부를 빙빙 도는 바람에 의해 옷의 물기는 빠르게 말라갔다.
"현우씨, 이제 벌레하고 싸울 일은 없겠죠?"
문득 한세아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한 말이었다. 그녀의 팔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한동안은 없지 않을까···싶습니다."
나는 변종 흰개미들이 득실거렸었던 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타오르는 휘발유가 흩뿌려진 여왕 개미방,
벽면과 천장에 점점 균열이 가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굴,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우리를 바싹 뒤쫓는 변종 흰개미들,
그 끝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김청수, 까마귀, 아이들뿐이었다.
그 외 다른 생명체는 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토사에 짓눌려 압사당하고 말았다. 여왕 개미방에 있던 수상한 못 또한 토사에 깔려 사라지고 말았겠지.
그러니 변종 흰개미들을 다시 볼일은 없을 듯했다.
나중에라도 다른 변종 벌레들이 나타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니, 우리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놈들과 싸우는 경험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옷의 냄새를 맡으면 헛구역질을 일으키는 냄새가 코를 찌르건만.
다들 말은 하지 않았으나 한마음 한뜻일 것이다.
바로 그때.
부스럭!
초록색으로 가득한 산 비탈길에서 고라니 떼가 튀어나왔다.
"으앗!"
한세아가 당혹성을 토해내며 차량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다행히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던 터라 급정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끼이이이익!]
어림잡아도 스무 마리가 넘는 수로 이루어진 고라니 무리는 도로 한복판에 멈춘 험비를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빠르게 지나쳐가기만 했다.
"······."
"······."
나와 한세아는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그것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여 변종 고라니 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차량을 완전히 멈췄다.
타탓- 타타탓-
변종 고라니들이 다리로 땅을 박찰 때마다 도로 위에 놓인 전선줄이나 넝쿨 따위가 작게 툭툭 튀어 올랐다.
원래 고라니들은 저렇게 큰 무리를 짓는 동물이 아닐 텐데, 어째서인지 큰 규모의 무리를 짓고서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의문을 풀기도 전에 고라니 무리는 갑작스러운 등장만큼이나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 갔나?"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놈이 마지막이 맞았는지 고라니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크흠, 아저씨. 저게 끝이 아니야."
지수가 불쑥 좌석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입에 흥건하게 묻은 침을 닦았다. 고라니 떼가 이동하는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다.
이윽고.
···부스럭!
수풀이 좌우로 헤쳐지면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오기 시작했다.
까각- 까드드드득-
나무 껍질이 잔뜩 붙어 있는 관절이 비틀리는 소리.
[끄아아아악!]
입이 찢어질 새라 크게 벌려 고함을 내지르는 소리.
나무 인간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