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3 - 243. 관악역 (2)
"······포탄. 세아씨! 여기도 포탄들이 널려 있습니다! 나무 상자들 최대한 피해가십쇼!"
"으아···!"
한세아는 진로를 약간 변경해 그나마 나무 상자가 최대한 적은 곳으로 빠졌다.
"아저씨! 저, 저거 어떻게 할 거야!"
떨리는 눈으로 지렁이 변종을 본 지수가 말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말려 있는 꼬리는 애처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차량 계기판을 살펴보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남은 연료는 아직까지는 넉넉한 상태.
그것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달달달달달달-
기긱- 키기긱-
엔진의 상태가 갈수록 이상해져 간다는 것. 이대로라면 연료가 남아 있어도 차량의 시동이 먼저 꺼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저걸 떨칠 수 있지?'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잠시만이라도 저 거대한 괴물을 멈춰 세울 수 있는 방법이 말이다.
그때.
"······아."
나는 우측 승강장 쪽 담벼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철제 담을 무너트리고 몸을 반쯤 선로로 들이밀고 있는 차량. 수풀 속에 가려져 있던 LPG 가스 운반 차량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가스가 담긴 봄베들과 큼지막한 탱크로리가 옆으로 넘어지거나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승강장에 놓인 포탄들처럼.
"지수야! 토치! 토치 있지?"
"어, 두 개 남았어!"
지수는 서둘러 토치가 부착된 부탄가스 2통을 가방에서 꺼냈다. 흰개미굴에서 쓰고 남은 것들이었다.
"저기 앞에 탱크로리 보여? 오른쪽에 있는 거. 저기에 불을 붙일 거야."
나는 가스 봄베의 노즐을 열어 분사되는 가스에 불을 붙여 터트릴 거라는 일련의 계획을 지수에게 전달했다.
"지수 너는 이걸 저기에 갖다 놓고 오기만 하면 돼. 탱크로리는 위험하니까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봄베도 무서우면, 아니다. 그것도 그냥 건들지 마."
단지 가스를 공기 중으로 누출시키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고 위험하게 가스통에 도끼로 구멍을 직접 내거나 노즐을 열 필요는 없었다. 구멍 정도야 한세아가 가지고 있는 총으로 내면 될 일이니까.
예린이 만들어낸 바람막으로 밀폐된 공간을 형성하고, 가스가 충분히 산소와 섞이게 되면 불이 켜진 토치에 의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리라.
그 폭발은 한차례로 끝나지 않겠지. 주변에 널린 포탄들이 화염에 휩쌓이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지렁이는 피부 호흡을 하는 동물이다. 불에 피부가 지져지면 숨통이 막히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크게 한 방 먹은 놈은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리 믿었고, 그러기를 바랐다.
"······세아 언니, 속도만 조금 줄여 줘요. 후딱 갔다 올게요."
"지수야, 할 수 있겠어?"
"응, 어떻게든 해야지. 해 봐야지."
손에 들린 토치와 LPG탱크로리를 번갈아 보던 지수. 그녀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튀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한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조금 늦췄다. 후방에서 끈질기게 지렁이 변종이 쫓아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속력을 많이 늦추지는 못했지만 지수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언니! 이거 가지고 가야지! 이거 그냥 보, 봄베? 아무튼 거기 주위에 막 뿌려! 그럼 바람이 만들어질 거야!"
"알았어!"
지수는 스파크를 튀기며 차량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어지럽게 휘날린다.
파지직-
오직 잔상처럼 남은 스파크만이 방금 전까지 그녀가 뒷좌석에 있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윽고.
타타탓- 타탓-
지수는 한달음에 험비보다 앞서 달려 나가 탱크로리 앞에 빠르게 도착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가스 봄베의 노즐을 하나, 둘씩 여는 모습이 보인다. 위험하니 그냥 토치만 내려놓고 오라고 했건만.
그녀는 기어코 탱크로리 옆면 하단부에 있는 벨브까지 열었다. 안에 보관되고 있던 액화가스가 기화된 상태로 마구 뿜어지기 시작했다.
지수가 코를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가스 누출 경고하기 위해 일부러 어떤 물질을 첨가한다고 하더니 가스가 퍼지면서 구린 냄새가 나는 모양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푸른 가루를 사방에 뿌려 밀폐 공간을 형성했다. 예린이 미리 바람을 부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가스는 바람에 밀려 더 이상 퍼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수는 불을 킨 토치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몸을 뒤로 돌려 죽어라고 내달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똑똑히 보였다.
-우당탕!
"흐아···!"
빠르게 달려온 지수는 차량 문턱을 잡고 몸을 안쪽으로 다급하게 밀어 넣었다. 잔여 스파크가 그녀의 몸 주위에서 살짝 튄다.
부르르릉!
전방에 있던 LPG 가스 운반 차량은 어느새 후방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험비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위치가 서로 뒤바뀐 것이다.
"지수야! 아무것도 건들지 말고 그냥 오라고 했잖아! 위험하게!"
"하, 하지만 이렇게, 헤엑, 해야 더 확실하잖아! 헤엑···."
"아니, 후우···. 일단 진짜 수고했어. 이제 쉬고 있어."
나는 지수를 더 탓하지 못했다. 가스를 들이킨 것인지 안색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숨을 격하게 들이쉬고 있는 지수에게 말을 거는 것도 미안했다.
혹시나 이럴까 봐 그냥 토치만 두고 오라고 한 건데. 또다시 지수를 무리를 시켰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바로 그때.
[구오오오오오!]
거리를 좀 더 좁힌 지렁이 변종이 입을 크게 벌리며 포효를 내질렀다. 몸속의 장기를 뒤흔드는 것 같은 포효에 몸이 덜덜 떨렸다.
"크으윽! 세아씨! 총 좀 꺼내겠습니다! 지수랑 예린이는 귀 막아!"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급하게 소총을 차 문을 벌컥 열면서 바깥으로 내밀었다.
탕!
견착한 소총을 LPG 가스통에 겨눈 직후,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사격음이 귀를 웅웅 울린다.
···피잉!
눈 깜빡할 새에 날아간 탄환들은 바람막을 뚫고 가스통이 아닌 엉뚱한 표면에 맞고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튕겼다.
도탄된 것이다. 차량이 워낙 덜컹거리는 탓에 조준점이 계속 흔들린 탓이었다. 그래서 정조준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으으···! 이렇게는 못 맞춰요! 차 잠깐 세우고, 저도 같이 쏠게요!"
한세아는 시시각각 조여 오는 죽음의 손아귀를 떨치기 위해 짐짓 분한 어투로 외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떨리는 손은 그녀가 매우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총으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춘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나, 지수, 예린은 한세아를 말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는 것이 옳은 말이었다. 가스가 언제 폭발할지 몰랐으니까.
우리는 지렁이 변종이 차량을 덮치기 전에 그저 빨리 해치우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끼이이이익- 파바박-
브레이크 페달이 눌러진 험비는 속도를 빠르게 줄이다가 이내 멈췄다. 자갈밭 위를 달리던 타이어가 지상에 긴 상흔을 만들어 낸다.
철컥-
차량을 완전히 세운 그녀는 곧장 강화탄이 들어 있는 탄창으로 바꿔 끼웠고, 총구를 바깥으로 내밀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자주색 눈은 매우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나도 이번에는 절대 빗맞히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재차 총구를 탱크로리에 겨눴다.
그리고.
타-아앙!
탕!
다시 한번 쏘아지는 푸른빛의 탄환과 일반 탄환.
······팅!
···텅!
화르르르륵!
가스통에 구멍이 송송 뚫리는 것과 동시에 화마가 기세를 순식간에 키워 주변을 점거했다. 가스가 누출되는 틈이 늘어나자 우리의 바람대로 불길이 더 거세게 변해 번진 것이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을 느낄 틈도 없었다.
"됐다! 세아씨! 다시 운전! 엑셀 밟으십쇼!"
나는 다급하게 돌려진 핸들을 원상태로 만들며 외쳤다.
아직은 무거운 가스가 바닥에 짙게 깔리면서 분사구 가장 자리부터 불타오르는 모습이었지만 언제 저것이 거대한 폭발로 이어질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네, 넵!"
잠시나마 밝아졌던 한세아의 얼굴은 다시 바싹 굳게 되었다. 그녀는 뜨겁게 달궈진 권총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부르르릉-!
덜-컹! 덜-컹!
위아래로 흔들리며 재차 속도를 내기 시작한 차량.
가스 운반차에 가스가 얼마나 담겨 있는지는 알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살기 위해서는 이 자리에서, 이 근방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콰-아아아앙!
LPG 가스가 담긴 탱크로리가 터지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쾅! 콰앙! 콰쾅!
폭발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가스불과 함께 한계까지 달궈진 포탄들이 기어코 연달아서 터지고 있는 모양이다.
[구-오-오-오-오-!]
지렁이 변종은 한순간에 치솟은 화염과 사방으로 퍼지는 폭발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비록 화염의 유지 시간은 짧았으나 놈을 멈춰 세우게 하는 데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지글지글-
놈의 표면에 솟는 끈적한 점액질들이 열을 받아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보기 흉하게 변했다. 원래도 그다지 보기 좋은 외형은 아니었건만.
드드드드드드!
한층 구역질 나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지렁이 변종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단순히 바닥을 구르고 있는 행위일 뿐인데도 지축이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웅-!
폭발이 만들어낸 바람이 차량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후두둑- 후둑-
캉! 카카캉!
사방으로 비산하는 철이나 시멘트 조각이 차체를 두드렸다. 날카롭게 고막을 찢는 소리가 연이어 내부를 울린다.
···쨍!
쩌적!
간혹 손바닥만 한 파편이 유리창에 박힐 뻔했으나, 유리창은 금만 갈뿐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
"······"
전방을 보고 있는 한세아를 제외하고 나머지인 나, 지수, 예린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식은땀이 배기 시작한 손바닥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
한세아도 사이드미러를 통해 후방을 알게 모르게 살폈다. 우측 사이드미러는 어디 갔는지 사라진 후였다. 폭발의 여파에 날아간 모양이다.
꿀꺽-
후방에서 들려오는 폭음, 지진음, 괴성이 차량 내부를 진탕시키고 있는 와중에도 가장 조용하다고 할 수 있는 마른침 소리가 귓가를 자극한다.
이대로 저것이 우리를 포기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우리의 생존을 판가르겠지.
꾸드드드드득!
지수가 뿌린 푸른 가루의 힘이 다하자, 서서히 소화제 포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화염.
일정 온도 이상의 열을 감지한 포자에게 잡아먹히는 화염.
그건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잔뜩 기세를 부풀렸던 화염은 소화제에 저항하지 못했으니까.
화마와 포자의 싸움은 오래지 않아 포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소화제가 폭발 범위 내의 모든 열기를 잡아먹은 것이다.
꾸드드득-
열기가 퍼진 길을 따라 형성된 포자의 고치들.
그것은 일견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고, 거대한 솜뭉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드드드드드······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진동을 끝으로 도시는 점점 잠잠해지고 있었다.
'제발···.'
흙먼지가 이리저리 조금씩 흩어져 뿌연 공기가 다시 맑게 바뀌어 가고, 할 일을 마친 소화제도 더 이상 기승을 부리지 않게 된 지금.
그 너머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우리에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