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4 - 244. 석수역 (1)
휘이이이이···
흙먼지가 완전히 걷히고 나서야,
"하아···."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지렁이 변종이 더 이상 후방에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은 열기가 퍼진 길을 따라 뭉친 소화제 포자 덩어리뿐.
드드드드······
놈의 모습이 사라지자 지진 또한 언제 그랬었냐는 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갔어. 아니, 가고 있어. 우리랑 반대 방향으로."
한창 귀를 쫑긋거리던 지수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녀는 단순히 일시적으로 땅 아래로 몸을 숨긴 것인지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있던 우리에게 확답을 내려주었다.
여기서 저 괴물을 죽였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러기에는 화력도, 폭발의 위력도 모자랐다. 당장은 지렁이 변종이 물러 갔다는 사실에만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콜록! 콜록!"
예린은 뒷문으로 들어온 잡다한 파편들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순간적으로 형성된 강한 바람이 온갖 것들을 품은 채 차량 내부로 들어온 것이다.
부르르릉-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와중에도 차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예린이 밀어낸 돌조각들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달달달달달달달-
우리의 손보다 더 떨리는 차량의 엔진 진동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전보다 진동이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 엔진에 누적된 피해가 늘어나서 상태가 한층 더 악화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계속. 계속 갈게요."
혼이 쏙 빠진 얼굴을 하는 한세아는 엑셀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우리 중에 차량을 점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잠시 뒤로 도망간 지렁이 변종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놈을 물러서게 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다들 어디 다친 곳은 없죠?"
나는 욱신거리는 팔목을 눌렀다가 떼며 물었다. 살짝 옷을 걷어보니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보이지 않건만. 내부는 아직 아물지 않았나 보다.
부상이 빠르게 낫지 못한 이유는 차량을 움직이느라 체력 회복에 쓰일 푸른 입자가 빠지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네, 네···."
긴장으로 인해 몸을 구부정하게 만든 한세아.
그녀는 내가 자세를 고쳐주고 나서야 몸에 힘을 풀었다.
"하아, 하아···. 나도 없어."
살짝 붉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는 지수.
그녀는 숨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저도 없어요, 오빠!"
언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예린.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당차게 외쳤다.
'···쉴 곳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무리를 연이어서 한 탓에 그녀는 매우 지친 상태처럼 보였으니까.
아니, 그녀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나와 한세아도 애써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차에 타자마자 기절한 예린의 상태가 제일 나았다.
잠이라도 한숨 푹 자고 싶었지만, 안전하지 않은 길 한복판에서 그렇게 한다면 죽기 딱 좋다. 하물며 문짝이 하나 떨어져 나간 차량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쩌겠는가. 일단 차량이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다음에 그나마 안전한 곳을 찾아야지.
부르르릉-
어느덧 험비는 관악역을 지나 그다음역인 석수역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크아아아악!]
[끼에에에엑!]
고가 도로 위나 철도 옆 담벼락 근처에 나무 인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추락 방지용 철망이 다른 곳보다 높았던 덕분에 놈들이 담을 넘는 것보다 우리가 탄 험비가 그것들을 지나치는 게 더 빨랐을 뿐.
콰직! 빠각!
까가각!
후방에서 목이 꺾이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차량을 놓친 나무 인간들이 분풀이 하는 소리가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우리는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석수역에 도착했다.
***
석수역.
서울특별시 금천구와 매우 가까운 역.
심지어 역사의 가장 북쪽은 금천구에 걸쳐 있기까지 한 역.
남산이 있는 서울의 초입에 도달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방금 전까지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아직 코앞까지 도착한 건 아니지만, 솔직히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짧은 자축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내가 서울 근처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지수, 예린, 한세아의 공이 가장 컸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세아씨, 속도 조금만 줄이고 갑시다. 포탄들은 안 보이긴 해도 장애물이 엄청 늘었어요."
나는 전방을 쌍안경으로 살피며 입을 열었다.
선로 좌우측에 설치된 투명 소음방지벽, 붉은 벽돌과 흰색의 페인트가 어우러진 역사, 승강장 지붕을 떠받치는 여러 원기둥, 그 옆에 굴러다니는 쓰레기통, 스크린도어와 함께 설치된 쇠사슬이 걸린 펜스.
그리고 검게 변한 전차들.
견인 곡사포가 있던 이전 역들과 달리 이번에는 탱크라고 불리는 것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다란 포구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전차들은 불에 탄 건지, 녹이 슨 건지 숯처럼 변한 모양새였다. 관리도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극변하는 외부 환경에 방치된 탓인 듯했다.
"어떻게 저 사이사이로 지나가면 될 것 같네요···. 앞에서 뛰쳐나오는 나무 인간들도 없으니까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세아가 살짝 충혈된 눈을 끔뻑끔뻑 뜨며 말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늘이 점점 흐려지는 게 좀 불안하긴 한데, 아무튼 잘 가 볼게요. 주변만 잘 살펴주세요, 현우씨. 제가 미처 못 보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네, 걱정 하지 마십쇼. 문이 없는 쪽만 조심하면 될 겁니다."
"콜록! 아저씨, 뒤는 내가 책임지고 막을게. 그러니까 아저씨는 괜히 뒤에 한눈팔지 말고 앞만 봐."
"너 진짜 괜찮아?"
"괜찮다니까."
얼굴에 몰린 열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지수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적거려 내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녀의 꼬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앞을 볼 때까지 지수는 손짓을 계속할 기세라, 나는 결국 고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른 쉴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세아씨."
"이 근처에서는 도무지 안 보이는데···. 적어도 좀 더 이동해야 해요. 후우, 일단 갈게요."
한세아의 말마따나 역 주위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폭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단단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붕괴된 모습. 대부분 형체는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으나 일부 건물 벽면이나 구석이 무너져 내린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콘크리트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철근과 각종 쇠 파이프들이 살벌하다. 날카롭게 꺾여 있거나 중간이 툭 부러져 뾰족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건물들에는 당연하게도 살아 있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무 인간 몇 마리가 배기음을 듣고 하나, 둘씩 떨어지다가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기만 할 뿐.
간혹 우리 쪽으로 고개를 제대로 돌려 따라오려는 놈들이 있었지만, 나무 인간들은 차량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그저 멀어져만 갔다.
그것들 또한 이내 방치된 차량들이 널려 있는 길거리를 어기적거리며 배회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아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나무 인간들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비가 내렸다면 지금처럼 수월하게 놈들을 떨궈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부르르릉-
차량 내부는 침묵에 빠졌다. 얼굴을 보니 다들 말할 기운도 없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시야를 아래로 내려 끊어진 무한 궤도를 바라보았다.
팽팽함을 잃고 축 늘어진 궤도 사이사이에 넝쿨이 휘감겨 있었다. 전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흑표인가?'
전차의 종류가 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역을 점거한 거나 다름없는 전차들이 서울 방면으로 몰려 있는 까닭은 서울이 전쟁터로 변모했기 때문이리라.
비록 일부는 서울에 도착하지 못하고, 그 직전인 석수역에서 멈춰 서고 말았지만.
'여기서 뭔가 얻어갈 건 없나?'
나는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가득 채운 전차들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탐색은 꾸준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라도 얻을 수 있다면 챙겨두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때.
쿵! 쿵! 쿵쿵쿵쿵!
꽉 닫힌 해치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는 험비가 전차에 가까워질수록 격해졌다. 아무래도 탱크 안쪽에 나무 인간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크아아아아악!]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사람이었다면 저런 괴성이 아니라 말로 표현되는 외침을 내뱉었을 터다.
"······."
"······."
나, 지수, 한세아는 긴장 어린 눈으로 덜컹거리는 해치를 노려보았다.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덜컹! 덜컹!
쿵쿵쿵쿵쿵!
해치가 금방이라도 열릴 것처럼 들썩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