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47화 (248/497)

Chapter 247 - 247. 타워 (2)

"자, 몸은 아까 밑에서 받아온 빗물로 씻으면 돼요. 이렇게 하면 물도 받아지구요. 조금씩이지만 이렇게라도 물을 받는 게 어디예요?"

한세아는 어깨가 뻐근한지 팔을 돌리며 방 전체를 샤워실로 쓰자고 말했다.

그녀는 창틀에 기다란 나무판자를 받쳐 놓았다. 판자 가운데는 살짝 파인 홈이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가운데로 모이고 있었다.

주르륵-

통··· 통···

그렇게 모인 빗물은 판자를 타고 흘러 밑에 있는 말통으로 떨어졌다. 안에 꽉 차 있는 빗물에 파문이 생긴다.

그리고 그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 물을 아껴서 씻는다면 4명이 씻어도 충분할 듯했다.

"이번에는 현우씨부터 씻어요. 캠핑장에서는 저랑 지수씨랑 예린이가 먼저 씻었으니까요. 현우씨 다음에는━"

샤워 순서를 정하기 위해 한세아가 말을 잇고 있을 때.

"그, 세아 언니!"

갑작스레 지수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내 무언가를 고민 중이던 그녀는 그 무언가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꼬리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네?"

"제, 제가 마지막에 예린이랑 같이 씻을게요! 그러니까 언니는 아저씨 다음으로 씻어요."

"어···. 그래요 그럼. 전 상관없어요. 어차피 예린이 혼자 둘 수도 없기도 했구."

아이가 혼자 몸을 씻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당장 7층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로 판명이 났어도 예린 혼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아이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한 명 정도는 필요하니 말이다.

"현우씨, 그럼 옷이랑 수건하고 세면도구도 두고 갈 테니까 다 씻고 나와요."

"알겠습니다. 혹시 위험한 게 보이면 바로 소리치십쇼."

"너무 걱정 마세요! 지수씨가 이미 살펴보기도 했고. 별일 없을 거예요. 그럼 저희는 저 끝 방에 가 있을게요. 겸사겸사 완강기 위치 확인도 할 겸."

한세아는 그 말을 끝으로, 지수와 예린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녀들이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지수가 전자 도어락을 부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7층은 침묵에 빠지게 되었다.

숨을 죽이고 잠시 기다려 보아도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다행히 그녀들이 들어간 방에도 위험한 것들이 없는 모양이다.

부스럭-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때가 잔뜩 묻은 옷가지들을 벗어 내려놓았다.

쏴아아아아아-

후두둑- 후두둑-

맨살에 차가운 비바람이 닿자 오소소 드는 소름과 한기. 따뜻한 물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찬물뿐이었다.

찬물이 몸에 닿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정신이 확 차려 지기는 했다.

'후다닥 씻고 나가야겠다.'

발전기도 연료도 없는데 무슨 따뜻한 물이란 말인가. 그저 빨리 씻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세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그녀가 가스 불을 켜 놓았을 테니 모자란 온기는 거기서 얻으면 되리라.

이윽고, 재빠르지만 꼼꼼하게 씻은 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갈아입은 옷은 비닐 봉지에 담아둔 채로.

그녀들은 오늘 먹을 식량과 식수를 꺼내놓고 있는 중이었다.

"어후···. 이제 가서 씻으십쇼, 세아씨."

"벌써 씻고 왔어요? 엄청 빨리 씻으셨네요."

10분도 되지 않아서 돌아온 나를 보며 킥킥 웃는 한세아.

"물이 너무 차가워서 오래는 못 씻겠더라고요. 뜨거운 물 조금이라도 가져가는 게 어떻습니까? 진짜 엄청 차가운데."

"에이, 됐어요. 가스 불 아껴야죠. 아, 저기 물 데워놨으니까 저거 한잔 마시고 계세요."

그녀는 찬물의 무서움을 무시하면서 옷가지를 챙기고 문밖으로 나갔다.

'큰 코 다칠텐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한세아가 뜨거운 물을 담아둔 컵을 손에 쥐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열기가 황홀하다.

부스럭!

이참에 누룽지맛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살짝 달달하면서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그러면서 말이 없는 지수와 예린을 바라보았다.

내가 있는 위치에서 묘하게 거리가 먼 곳에 자리를 잡은 그녀들이 보였다. 평소라면 옆에 딱 붙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예린은 피곤한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아흐······."

여전히 더운지 지수는 뜨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벨트 가방을 꽉 쥔 채 작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가끔 나를 흘깃 보면서 이상하게 허벅지를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벨트 가방은 당연히 비에서 무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비닐팩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물에 젖지는 않았으나 가방은 비에 푹 젖은 것이다.

"지수야, 괜찮아? 너 진짜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막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해야 한다? 아니면 미리 약이라도 먹어두던가. 해열제 조금 남은 거 있잖아."

나는 열이라도 재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지수의 이마에게 가져다 대었다. 아니, 가져다 대었을 것이다. 지수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

그녀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꼬리도 일자로 섰다.

"아, 아니. 괜찮다니까! 아까부터 계속 괜찮다고 했잖아. 언니 왔다! 예린아, 가자! 이제 우리 차례야!"

내게 소리쳐서 미안한 표정을 잠시 짓던 지수는 예린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섰다.

비몽사몽인 아이는 걱정 말라는 듯 내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수에게 문제가 생긴 건 확실한데. 그걸 말해주지 않고 숨기는 것 같은 태도에 묘한 섭섭함이 밀려왔다. 조금 더 그녀에게 신경을 써 줘야 할 듯싶었다. 아파도 병원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우리가 들어온 G타워에 병원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완공 이후의 이야기였으니 의미가 없지 않은가. 약품은커녕 장비조차 들여놓지 않았을 터다.

그리고 그녀들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덜덜 떨고 있는 한세아가 뒤이어 들어왔다. 나보다는 오래 걸렸지만 그래 봐야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었다.

후하게 쳐봐야 15분 언저리 정도 될까.

"벌써?"

"······물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걸까요."

나와 눈이 마주친 한세아는 코를 훌쩍이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전후가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그녀는 매우 깔끔해진 모습이었다. 복장도 한결 편한 옷으로 바뀌었다.

"말했잖습니까. 엄청 차갑다고. 이쪽으로 오십쇼. 따뜻한 물 한잔 드시고. 제가 물 좀 더 끓여놨습니다."

"아하하···, 고마워요."

한세아는 멋쩍게 웃으면서 내 옆에 착 달라붙었다. 맞닿은 피부가 차가웠다. 그녀는 내 옆에 앉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팔을 끌어안았다. 말랑한 것에 파묻힌 팔이 경직됐다.

쏴아아아아-

투둑- 투둑-

"······."

"······."

우리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약하게 솟아오른 가스 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푸른 불이 작게 일렁이는 모습은 나와 한세아의 시선을 잡아 놓고 놓아주지 않았다.

까득-

아껴서 녹여 먹고 있던 사탕을 실수로 부수고 말았다. 사탕 깨지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한세아의 귓가에 닿았다.

"뭐야. 뭐예요? 현우씨, 지금 사탕 먹어요? 이제 곧 밥 먹을 건데···!"

"아니, 그, 달달한 게 갑자기 땡겨 가지고요···."

"무슨 맛인데요? 가만히 있어 봐요."

한세아는 손을 쭉 뻗어 내 입술을 훑었다.

말문이 막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킥킥 웃으면서 손가락을 쪽 핥았다. 허나 그 웃음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누룽지 맛이네요. 취향이 너무 아저씨 같은 거 아니예요?"

"···지금 누룽지 맛 무시하는 겁니까? 그것도 먹다 보면 맛있거든요? 그리고-."

"알아요. 과일 맛은 예린이한테 양보하는 거.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예요."

그래, 아이들이 좋아할 맛인 사과, 딸기, 오렌지 같은 과일 맛 사탕은 어지간해서는 손대지 않는 편이다. 예린이 특히 그런 맛을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결국 남는 것은 주류에서 밀려난 누룽지나 홍삼 맛 캔디뿐. 홍삼 맛 사탕은 도저히 먹을 만 하지가 않아서 우리는 그나마 누룽지맛 사탕만 골라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간단하게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하아···, 현우씨. 제 응석 좀 받아줘요. 지금 우리 단둘이만 있을 때만이라도요. 솔직히 말하면 어제 좀 아니, 많이 무서웠거든요. 누구 하나 잘못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잖아요."

한세아가 억지 웃음을 짓는 것도 힘들다는 듯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던 까닭이었다.

어느새 지친 표정으로 바뀐 그녀는 슬며시 머리를 내게 기대 왔다. 팔을 더 강하게 끌어안은 것은 덤이었다.

"······."

나는 위로하는 의미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말없이 품으로 끌어당겼다. 한세아는 저항 없이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흰개미굴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사방에서 검은 집게가 짓쳐들었고, 그것은 이내 숨통을 노려왔었으니까.

무서운 건 한세아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그러했다.

시야조차 제한되는 장소.

감당하기 어려운 물량의 변종 흰개미들.

무너지는 굴과 끝까지 추격하는 그것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모든 상황들을 겪으면서 속으로 강하게 바랐다. 제발 아무도 죽지 않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행동에 앞서 각오는 되어 있나.

움직이기 전에 준비는 끝마친 상태인가.

혹시 모를 위험에 대처할 수 있나.

그 순간에 내린 판단은 유효한 판단인가.

자그마한 실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실수가 언제든 내 목숨을,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위험은 존재했다. 위험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그런 위험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나는 살짝 떨리고 있는 한세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살아 있다는 걸 체감했다. 그리고 가스 불은 더 이상 우리의 시선을 잡아 놓지 못했다.

푸른 불이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 보며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그때.

"언니야! 오빠야!"

예린이 벌컥 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

나와 한세아는 황급히 거리를 벌려 떨어졌다.

"콜록! 예린아, 지수는? 왜 너 혼자 왔어?"

"언니는 조금 더 있다가 온대요!"

"아직 덜 씻었어?"

"아니요? 언니는 저보다 빨리 씻었는 걸요."

"······그래?"

나는 지수가 돌아오면 한 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예린을 따뜻한 자리로 이끌었다. 아무리 7층이 안전하다고 판단 되었어도 그렇지. 아이 혼자 보내면 어떡하자는 건지.

"자, 물 차가웠지? 이거 좀 마시고 있어. 지수씨 오면 같이 밥 먹자."

"네!"

뜨거운 물을 호록 마시며 힘차게 답하는 예린. 아이는 속을 녹이는 따뜻한 물을 마시자 흐물흐물하게 녹았다.

그렇게 우리는 식사 준비를 마치고 지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

"···이상하네. 제가 한번 가 보겠습니다. 금방 데려올게요. 여기 계세요."

기다리다 못한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넉넉하게 20분 정도 기다려주었건만. 지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별일은 없겠지만요."

"오빠! 언니 빨리 데려와주세요! 배고파요······. 이러다가 죽을 지도."

"알았어."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 주며 지수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아직 안 돌아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순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게, 예린이 본 지수는 멀쩡하다고 했었으니 말이다.

쏴아아아아아-

세찬 빗소리가 7층 복도를 울린다.

저벅- 저벅-

물기가 빠지지 않은 신발이 바닥에 비벼지는 소리를 낸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도착한 방. 한세아가 샤워실로 지정한 방이었다. 나, 한세아, 예린이 씻은 방이기도 했다. 지수는 아직 이 안에 있겠지.

똑! 똑!

"지수야?"

나는 방문을 두드리고 안에 있을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혹시나 아직 씻고 있는 중인데 내가 갑자기 들어가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에 인기척이 있는 건 확실하건만.

찰박- 찰박-

살짝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물소리가 들려온다. 몸을 씻는 소리가 아닌 옷가지를 물에 적셨다가 쭉 짜내는 소리였다.

'···빨래하는 건가?'

오늘은 푹 쉬고 세탁 정도는 미리 받아 놓은 빗물로 하면 될 터인데, 왜 혼자하는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녀석이 말이다.

나는 일단 지수를 말리고, 같이 한세아와 예린이 있는 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문 쪽에 붙어있는 지수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스읍···하······."

그녀는 이제는 익숙한 천 조각에 코를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키고 천천히 내쉬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나 그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는지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했다.

"흐읏···, 흐응···."

지수는 몸에 힘이 풀린 것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손이 갈팡질팡하다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가녀린 손가락들이 조심스럽게 꼼지락거린다.

"스으읍······."

그녀가 숨을 들이킬 때마다 꼬리의 털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골반만큼은 서서히, 아주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뚝- 뚝-

세탁을 하기 위함인 듯 물에 젖어 있는 천 조각에서 물방울이 길게 아래로 늘어진다. 그러다가 팔을 타고 바닥으로 또옥-하며 떨어졌다.

한눈에 봐도 들어올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고 있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조용히 방문을 다시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관리가 되지 않은 탓일까.

끼익!

경첩이 내가 여기 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눈치도 없이 말이다.

아니, 이럴 거면 차라리 들어올 때부터 소리를 내던가 하지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

숨을 크게 들이키며 속으로 경첩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그럴 겨를이 없어졌다는 게 옳았다.

잔뜩 풀려 있던 지수의 금안이 여전히 풀어진 초점으로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으니까.

"······아저씨?"

지수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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