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49화 (250/497)

Chapter 249 - 249. 타워 (4)

"헉··· 헉···."

나는 놀란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바닥에 기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지수를 데리러 온 것뿐이건만.

어디 아파 보여서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에,

가까이 가니 갑자기 나를 넘어트리면서 냄새를 맡더니 침을 뚝뚝 흘리고, 잔뜩 풀어진 금안으로,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지수.

그것도 상의가 엉망진창으로 젖어 있고, 하얬던 살결이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마구 뒤덮여 있기까지 했다.

"하으···."

그랬던 지수는, 정확히는 내가 최후의 수단으로 꼬리를 꽉 잡아 제압한 지수는 정신을 잃고 내 위에 쓰러진 상태였다. 간혹 허리를 작게 퉁퉁 튕기기도 했다.

얼떨결에 맞춰진 배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이 뜨겁다.

확실하게 열이 있는 몸 상태에 나는 땀에 젖은 건지 물을 적신 건지 모를 정도로 젖은 지수의 머리칼을 살짝 밀어내 어디 다친 곳이 있나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

그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목덜미에 새빨간 자국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버클이 살짝 풀려 있는 모습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케 했다.

지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아서 일단 꼬리를 잡은 건데 그게 제대로 통한 모양이다.

물에 젖은 그녀의 꼬리에는 더 이상 붕대가 묶여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꼬리를 붕붕 휘두르면서 날려 버렸나 보다. 워낙 크게 돌아가기도 했고, 꼬리처럼 물에 푹 젖은 붕대가 벽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

방은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나, 한세아, 예린, 지수가 씻으면서 생긴 거품들이 바닥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활짝 열린 창문으로 계속 들어오는 비바람이 나와 지수의 몸을 두드렸다.

다만 가장 난장판으로 변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지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는 노릇.

아직 어안이 벙벙하지만 이제 일어나서 한세아와 예린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야 할 듯싶었다.

지수 옷도 다시 갈아입혀야 하고 말이다. 그녀의 옷은 갈아입은 것이 무색하게 물에 흠뻑 젖은 상태였으니까.

피부에 맺힌 물방울이 땀인지 그냥 물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급한 대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흣···."

천이 피부에 쓸릴 때마다 약한 신음을 흘리는 지수 때문에 나는 속으로 알지도 못 하는 불경을 외워야만 했다. 괜스레 허리를 구부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찰박-

"끄응···."

나는 지수를 품에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 힘이 빠진 탓일까. 그녀의 팔다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내 팔을 지수의 다리 밑으로 넣어 들어 올렸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였다.

또옥- 또옥-

미처 닦지 못해 여전히 젖어있는 지수의 짧은 바지에서 물방울이 세로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으응···."

부유감을 느낀 듯 지수가 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꼬리가 허벅지를 받치고 있는 내 손을 붙잡았다.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지수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갔다.

"하아···."

나는 기절한 것처럼 잠에 빠진 지수를 바라보며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꼴을 한세아에게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지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바로 그때.

깜빡-

벽걸이 TV의 전원 램프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방을 밝히던 손전등을 회수하고 문득 이질적인 불빛에 고개를 드니 보인 것이다. 워낙 순간적으로 보였다가 바로 사라져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

눈을 끔뻑인 나는 지수를 고쳐 안고 황급히 TV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희미한 온열감이 느껴진다. 아니, 그것은 내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인지 아닌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전기가 돈다고? 아닌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가져다 대니 전해지는 건 오직 디스플레이의 냉기뿐. 전자제품 특유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내 착각일까.

이런 큰 건물에는 비상용 발전기가 구비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구비가 되어 있으면 뭘 하는가. 어차피 푸른 입자 없이는 가동도 안 될 터인데.

나는 로비에 있는 총 3대의 엘리베이터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누군가가, 우리처럼 푸른 입자를 다룰 수 있는 누군가가 발전기를 돌려 이 빌딩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걸로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전기의 구동음이 들리지 않지 않았던가. 그런 소리가 들렸다면, 지수가 이미 포착해서 알려주었겠지. 발전기가 지하 4층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무 인간들의 괴성을 제외하면 매우 적막한 이 주변은 소리를 죽이는 것이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생각을 이어갈수록 내가 잘못 본 것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주변에 널브러진 리모컨을 주워 버튼을 눌러봐도 반응이 없는 벽걸이 TV와 조용한 냉장고를 보고 추측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돌아가서 내가 느낀 것을 한세아에게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한 나는 지수의 물품을 전부 챙기고, 몸을 돌려 그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지수가 내 품을 더 파고들었다. 그녀의 체온은 여전히 뜨거웠다.

***

"현우씨!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이예요?"

등이 완전히 물에 젖은 나를 보며 한세아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혼란스러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지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빠, 언니랑 물 놀이 했어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예린. 아이는 마른 수건을 들고 도도도 달려와 제 언니의 얼굴을 마저 닦아주었다. 예린은 이어서 내 한쪽 팔에 끼워진 벨트 가방을 챙겨 옆에 있는 헹거에 걸어서 널었다.

가방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처럼.

"······그, 가니까 자고 있더라고요. 가방 빨면서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나는 한세아의 시선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지수의 목을 보지 못하게 슬쩍 몸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요? 뭐, 알았어요. 음, 지금은 여유 옷이 없는데···. 다 빨아서 말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다행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한세아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침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지수씨는 침대에 눕히는 게 좋겠어요. 여기도 매트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커튼은 방마다 있더라고요. 급한 대로 커튼 뜯어 왔으니까 이불 대용으로 덮으면 될 것 같아요."

"네."

"오빠! 여기 베개요! ······응? 언니 목이-."

예린이 대충 옷가지를 뭉친 임시 베개를 가져오다가 지수의 초커 너머에 남은 흔적을 보고 멈칫거렸다.

"고마워, 예린아! 배 많이 고프지? 자, 어서 밥 먹고 자자."

나는 급하게 아이의 말을 끊고 지수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지수는 온기가 사라지자 아쉬운 듯 팔을 휘적거리다가 잡히는 것이 없자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그녀의 흑발이 목을 가려주었다.

"엄마한테서 저런 자국 많이 봤었는데···. 이상하다."

의아한 시선으로 나와 지수를 번갈아 보던 예린은 꼬르륵 울리는 배꼽시계에 금세 흥미를 잃고, 후다닥 가스 불 앞에 앉았다.

보글보글···

간이 버너 위 냄비에는 어김없이 계란이 잔뜩 풀어진 참치 라면죽이 들어 있었다. 비록 면도 없고, 쌀도 들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한 끼 대용으로는 훌륭한 식사였다.

"지수씨 전용으로 하나 더 준비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요."

"많이 피곤한 것 같으니까 이대로 재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밥이야 뭐 자고 일어나서 먹이면 되겠죠."

"오빠, 언니. 저 먹어도 돼요···?"

"어어, 먹어. 여기 숟가락."

"감사합니다···!"

나, 예린, 한세아는 각자 든 숟가락으로 조용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뜨끈한 국물이 속을 채우자 억지로 미뤄 두었던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이제 잠이 들기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지수는 여전히 자는 중이었다.

양치하고 돌아온 예린도 제 언니의 등에 기대 잠을 청했다.

"현우씨, 불침번 제가 먼저 할까요? 현우씨 엄청 피곤해 보여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어려운 것도 아닌 걸요."

"아, 그러기 전에 먼저 할 말이 있습니다. 이건 제 착각일 수도 있는데, 아까 지수 데리러 갔을 때 거기 TV에 전원이 들어오는 것처럼 보였었습니다."

나는 내가 본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역시 착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TV에 전원이···? 무슨 채널이 뜨던가요?"

"아뇨, 그냥 전원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가 사라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 착각일 수도 있다고 말한 거예요. 워낙 빠르게 사라졌거든요."

"혹시 이 건물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닐까요? 만약 현우씨가 본 게 맞다면요."

나는 답을 미뤄두고 창문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아아-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밤이라도 된 것처럼 어두웠다. 아직 낮인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후두둑- 후두둑-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격하게 두드린다. 죽은 사람들이 살려달라며 문을 두드리는 것 같기도 했다.

[끼아아······악!]

[끼에에에엑!]

[아아······아악!]

그리고 그런 소음들을 사이에서 나무 인간들의 괴성이 들렸다. 놈들이 내는 소음은 우리의 귓가를 불쾌하게 긁어댔다.

"···글쎄요.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나는 나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으며 잠시 미뤄둔 답을 전했다.

"역시 그렇죠?"

한세아도 씁쓸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그녀 또한 이 근처에 생존자가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여기까지 오면서 본 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괴물로 변한 나무 인간들뿐이었으니까.

심지어 예린이가 주변 건물에는 검은 입자가 가득하다고 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검은 입자가 가득한 건물에서 생존자들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있다고 하더라도 검은 입자에 오염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괴물이라고 부른다.

"차례되면 깨우십쇼, 세아씨."

"넵! 많이 피곤할 텐데 얼른 자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깨울게요."

나는 내 볼을 장난감 삼아 조물딱거리는 한세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경계를 서는 사람도 있고, 배도 어느 정도 채운 데다가, 등에는 푹신한 매트까지 있으니 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

꾸욱-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내 몸을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잠결에 앓는 소리를 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니 빛나는 금안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수였다.

그리고.

"···아저씨, 일어나 봐. 우리 이야기 좀 해."

나를 깔아뭉개고 올라탄 그녀가 귀를 축 늘어트린 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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