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50화 (251/497)

Chapter 250 - 250. 타워 (5)

폭-

지수는 그녀답지 않게 풀이 죽은 채로 내 몸에 기댔다. 저번의 묘한 거리감은 사라진 후였다. 오히려 벌렸던 거리만큼 가까워지겠다는 듯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

나는 그저 지수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품에 들어온 그녀를 안아주었다. 잠이 덜 깬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까닭이다.

그도 그럴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지수가 나를 덮친 광경이 생생했으니까. 애써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지수는 이야기 좀 하자는 말과 달리 묵묵히,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기만 하고 있었다.

그녀의 꼬리가 움찔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내 팔을 휘감아왔다. 혹여 내가 밀어낼까 움찔움찔 떨면서.

바깥은 잠이 들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시간이 지나 해가 완전히 진 모양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를 눈에 담고 있는 지수의 빛나는 금안은 눈에 똑똑히 보였다.

쏴아아아아-

쿠르릉··· 후두둑- 후두둑-

여전히 폭우가 내리고 있는 외부. 간혹 먹구름 안에서 뇌전이 일고, 거센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풍경은 지금 내리는 비가 짧게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걸 알려주었다.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번개의 빛이 순간적으로 방 안을 밝혔다가 사라진다. 세상 모르고 자는 예린과 그런 아이의 옆에서 옆으로 누워 자는 한세아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도중에 정신을 차린 지수가 한세아와 교대를 해준 듯했다. 슬쩍 눈을 돌려 그녀를 보자,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한 지수가 곧장 답을 전했다.

"세아 언니는 내가 자라고 했어. 불침번 서면서 뭔가 막 하는 건 같기는 했는데, 그냥 재웠어. 그, 많이 피곤해 보였거든. 그래도 세아 언니한테 전기가 돌 수도 있으니 방심하면 안 된다는 간단한 주의사항도 들었으니까 무작정 재운 거 아니야."

그녀는 한세아가 이능을 몰래 연습하는 것 같았다며 말을 덧붙였다.

"···그렇구나."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차라리 몸이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면 이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에 전해지는 지수의 뜨거운 체온이 자꾸만 그 일을 상기시켜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 그리 생각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수야."

"응."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있던 지수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기억···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까 있었던 일 말이야. 네가 기절하기 전에 있었던 일."

"···응."

"그, 미안. 내가 너무 함부로 방에 들어갔었어. 근데 노크는 분명히 했거든? 아니, 아니야. 아무튼 내가 미안 해."

나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주저리주저리 말을 내뱉었다.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게 낫겠다 싶은 마음에 무작정 미안하다는 말만 이었다.

"아니야, 아저씨는 잘못 없어. 그냥 내 몸이 이상해져서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아저씨가 사과할 필요 없어."

지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느새 내 팔을 풀어 준 꼬리도 좌우로 흔들렸다.

"···몸이 이상했다고? 어디 아프면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했잖아. 왜 숨기고 그래? 걱정되게."

"어떻게 말해······. 세아 언니한테 약도 받아서 먹어 봤는데 그대로였단 말이야. 자꾸 아저씨만 보면···! 보면···."

"···보면?"

"됐어. 이제 그 이야기 꺼내지 마. ···그냥 아저씨는 항상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돼. 응,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 한숨 자고 나니까 몸도 더 안 덥고."

내가 조심스럽게 되묻는 말에 지수는 나를 양손으로 꾹 누르며 답을 회피했다. 이야기하자며 자고 있던 나를 깨운 건 분명 지수이건만. 화제를 돌리고 싶은 모양새에 나도 굳이 더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놀리는 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 했다. 나는 또 잔뜩 깨물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수가 그런 행동하게 된 것이 흰개미굴에서 무슨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곳에 지수 혼자 간 것도 아니고, 나, 한세아, 예린도 같이 들어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김청수, 그의 동생들, 까마귀까지 함께였었다.

약도 소용이 없고, 내가 옆에만 있다면 괜찮다니 그저 그동안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방식이 조금 거칠었을 뿐이지.

'조금도 아니고 좀 많이 거친 취향이긴 했지.'

아직도 지수의 목에 남은 자국이 눈에 선하다.

침을 흘리며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 쉬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

다행히 지금 지수의 목에는 초커로 졸린 자국이 사라진 상태였다. 불에 그을린 꼬리가 빨리 회복된 것처럼 초커를 잡아당겼던 흔적 또한 빠르게 지워진 듯했다.

그녀가 싫다거나 해서 밀어낸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래도 상황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마 내가 꼬리를 붙잡아 제압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잡아먹혔으리라.

"끄응···,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야?"

나는 그녀의 무게감을 느끼며 물었다. 무겁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점점 달아오르는 듯한 지수의 체온에 부담감이 샘솟았다.

다시 한번 지수가 나를 덮칠 것 같아서 걱정되기도 했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옆에 한세아와 예린도 있는데.

"···나 무거워?"

"아니, 그건 아닌데 네가 불편할까 봐 그렇지."

"그럼 계속 이렇게 있을래. 이러면 몸 상태가 더 괜찮아져서···. ······안 돼?"

"알았어. 너 편한 대로 해. 내가 이거 하나 못 해주겠냐."

내 허락이 떨어지자 지수는 배시시 웃으며 보다 더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의 가슴이 부드럽게 뭉개졌다.

사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수를 방치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은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지수도 아직 어린 건 매한가지이건만.

그러니 오늘만큼은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 주고 싶었다. 이때가 아니면 쉴 틈이 없기도 했고.

'···나도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들에게 의지를 받는 입장이지 않은가. 수고했다는 의미로 지수의 등을 살살 토닥여 주었다.

툭- 툭-

규칙적으로 울리는 박자가 주는 안정감에 바싹 긴장해 있던 그녀의 몸에 들어간 힘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아저씨, 내가 이런 말 했었나? 흰색이 싫다는 이야기."

내 품에 얼굴을 비비고 있던 지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의 귀가 쫑긋거리면서 내 볼을 간지럽혔다.

"처음 듣네. 왜? 흰색 좋잖아. 깔끔한 색 아닌가?"

"보는 건 좋아하는데, 입는 건 별로야.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더러워지니까. 얼룩이 묻기라도 하면 눈에 확 띄기도하고. 심지어 그런 얼룩들은 지워도 자국이 남기까지 해. 그래서 나는 흰색 계열 옷이나 신발은 웬만해서는 안 챙겨. 특히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나서는 더 그래."

"확실히 그렇긴 하네. 이것저것 신경 쓰면서 세탁할 여유가 없긴 하지."

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 중에 흰색 계열의 옷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간혹 지나가면서 의류 매장을 들러도 지수는 최대한 회색이나 어두운 계열의 의류를 챙겼었다.

단순히 위장을 하기 위한 목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흰색 옷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던 모양이다.

지수의 흑발과 금안에는 흰색 계열의 의상도 잘 어울릴 것 같건만. 호냐 불호냐의 취향을 떠나서 지금 세상에서는 의상의 색도 강제당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근데 말이야. ···요즘 아저씨만 보면 흰색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 물들기 쉬운 흰색이. 어쩌면 이미 물들지 않았을까. 아니, 이미 물들었지."

지수는 그 말과 동시에 나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좀 더 짙어졌다.

"······."

빙빙 돌려 말하지만 결국 그 속내는 언제나 날 향하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누가 마음도 없는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달라붙는가.

그러나 내가 지수에게 해 줄 말은 한세아에게 했던 말과 동일했다.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것. 남들이 보면 쓰레기라고 욕하겠지. 허나 어쩌겠나. 마음이 둘 다 향하는데.

나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달짝지근한 체향을 살며시 맡으며 입안에 말을 머금었다.

바로 그때.

후우우웅-!

기묘한 파장이, 멀리서부터 시작된 그것이 건물을 휩쓸고 지나갔다.

"······!"

이상을 감지한 나와 지수는 숨을 들이키며 곧장 굳은 몸을 풀었다.

나는 한세아와 예린을 깨우기 위해 몸을 천천히 일으켰고, 그녀는 꼬리털을 서서히 곤두세우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느 한곳으로 시선이 모였다.

···팟!

파장이 훑고 지나간 벽걸이 TV에서 전원이 켜지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화면은 여전히 검은 화면이었으나 완전히 검은 것이 아닌 전자 제품 특유의 색감이 있는 검은 화면이었다는 게 달랐다. 화면이 확실하게 켜졌다는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신호 없음]

이제는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어색한 문구가 TV 화면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이내 깜빡거리면서 위치를 이동시키고 있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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