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1 - 251. 타워 (6)
쏴아아아아아- 후두둑- 후두둑- 우우웅- 콘크리트 정글을 울리는 폭우 소리, 쿵쿵 뛰는 심장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정신을 일깨우는 전자 제품의 가동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삐리링!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복도에서 일제히 울리는 전자 도어락의 작동음까지.
그러한 소리들은 나와 지수가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한밤중에 켜진 TV 화면과 어두운 복도에 메아리치는 전자음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돋았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벽걸이 TV 화면에서는 여전히 [신호 없음] 문구가 떠다니고, 현관 쪽에 있는 빌트인 냉장고가 가동을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없고 근처에 있는 작동 스위치를 누르지조차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관 보조등이 불길하게 깜빡거린다.
"···세아씨, 일어나십쇼. 예린아, 일어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들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서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바꿔 보았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채널은 검은 화면, 무지개 화면, 다시 검은 화면으로 휙휙 바뀌었다.
"아흐···, 벌써 아침···은 아니네요. 뭔 일 있어요?"
기지개를 쭉 피면서 앓는 소리를 낸 한세아.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열고 주변을 보더니 얼굴을 바싹 굳혔다. 지수가 예린을 마저 깨우는 모습과 화면이 켜진 TV를 보고 그녀의 얼굴에 있던 심각성은 한층 더해졌다.
"TV가 켜졌습니다. 정확히는 건물에 전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무슨 이상한 파장이 지난 후부터요."
"현우씨가 자기 전에 본 게 착각이 아니었던 거네요. 그럼 지금 전기만 돌고 있는 건가요?"
"네, 당장은요. 다른 건 뭐가 어떻게 변했는지 파악이 안 됐습니다. 일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세아씨 깨운 거라서요."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전기가 갑작스레 돌기 시작한 것이 어찌 별일이 아닐 수가 있겠나. 뭐가 되었든 일행을 깨우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혹여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말이다.
쏴아아아아-
비록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움직일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도 문을 열면 바로 비상구가 자리 잡고 있지 않던가. 최대한 짧은 거리로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는 있을 터다.
"현우씨, 무슨 파장 같은 게 지나가더니 전기가 돌기 시작했다고 했었죠. 맞나요?"
"네."
"···제가 가진 조각도 진짜 조금이지만 충전됐어요. 지수씨랑 교대하기 전에는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는데 지금 보니까 눈으로 보일 정도로 차 있더라고요. 이거 제가 자는 동안에 현우씨가 충전해준 건 아니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어 부정했다. 내가 충전했다면 꽉 차게 충전시켜줬겠지. 게다가 한세아의 조각이 텅 빈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확실하게 나는 아니었다.
한세아의 말을 들은 지수도 자기 조각을 확인하더니, 자기 것도 조금이나마 찼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전기를 사용 가능하게 하고, 조각 안의 푸른 입자를 보충한 파장.
그렇다면 그 파장 안에 푸른 입자가 담겨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왜? 어떻게? 어디서부터?'
모르는 것 투성인 와중에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바로 파장이 북쪽에서 퍼졌다는 것이다.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원형으로 퍼지는 파장은 우리의 몸을, 건물을 훑고 지나가면서 남쪽으로 갔으니 말이다.
바로 그때.
···파앗! 팟!
건물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가 순간적으로 꺼졌다. 지금 우리가 있는 건물뿐만이 아닌 근처에 있는 아파트도 동일했다.
"······."
"······."
흡사 번개가 쳐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가 사라진 것처럼 짧게나마 눈을 부시게 했던 인공적인 빛은 나, 지수, 예린, 한세아의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번쩍거리는 형광 불빛은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마 건물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푸른 입자가 전기를 사용 가능하게 만들어 주어도 기본적으로 전기를 만들어 내는 장치가 멀쩡하지 않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되겠지.
게다가 발전기는 수개월간 관리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이기까지 할 테니 전력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오히려 드문드문이라고 해도 발전기가 여태까지 가동이 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수야, 무슨 소리 들려?"
"지금 듣고 있는데, 아직까진 조용해. 아니, 조용한 건지 빗소리에 가려진 건지 잘 모르겠어. 일단 계속 들어볼게."
지수는 신중한 표정을 지은 채 귀를 신중하게 쫑긋거렸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쫑긋거리는 귀는 그녀가 주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담고 있다는 걸 대신 알려주었다.
"현우씨, 완강기는 우리방 앞 비상구에 있어요. 만약 내려간다면 아래층에 있는 6층 옥상 정원으로 바로 갈 수 있겠더라구요. 저희 빗물 받았던 옥상 정원 기억나죠? 거기로요. 반대로 위로 올라가면 또 다른 옥상이 있긴 할 텐데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잘···."
한세아는 내가 씻는 사이에 알아냈던 정보를 말해주었다.
정말 급한 상황이면 완강기에 줄을 걸고 건물에서 탈출해야겠지만, 그건 진짜 최후의 수단이다. 밤인 데다가 비도 거세게 오고 있는 상황에서 건물을 빠져나가 봤자 사실상 거의 의미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위험한 건 매한가지이니까.
어쩌면 건물보다 바깥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여기 위험해요···? 죄송해요···."
안절부절 못하며 묻는 예린. 아이는 이 건물에서 하루 쉬고 가자는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탓인 줄 아는 듯했다.
분명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검은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예린의 말이 한몫하기는 했다. 허나 그게 어떻게 아이의 탓이란 말인가.
여기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검은빛이 가득하다고 하고, 하늘에서 거센 비까지 오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었건만.
그러니 예린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아냐, 괜찮을 거야. 네가 잘못한 것도 없고."
"쉿! 잠시만 조용히!"
예상치 못한 소리를 막기 위해 현관문 전자 도어락의 건전지를 빼낸 지수가 손가락을 들어 입을 막았다.
나, 예린, 한세아는 움직임도 멈추고 지수가 있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이···
기이잉······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무언가가 작동되고 있는 소리와 함께.
"···와이어 아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어. 버튼도 안 눌렀는데 왜 움직이지? 혹시 버튼 누른 사람 있어?"
"아니, 나는 손도 안 댔는데."
"저도요, 지수씨."
"나도 안 만졌어!"
그렇다면 건드린 사람도 없는데 엘리베이터가 혼자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안에 누가 타고 있나?'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말이 안 되는 생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누가 있었다면 지수가 먼저 알아챘을 테니까. 아무리 숨을 죽이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허나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현실. 이상함이 느껴졌다면 마땅히 경계하는 것이 옳다.
이윽고.
···띵!
[7층. 문이 열립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들리는 전자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들렸다.
기기기긱-
이어서 들리는 철문 개방 소리에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너머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처럼.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건 없고··· 다른 하나는 다른 층에 열렸나 봐. 위쪽에서 소리가 살짝 들리네."
문에 귀를 가깝게 댄 지수가 말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꼬리는 방심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다, 다행히 아무것도 안 나왔네요."
한세아는 예린을 끌어안으며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아직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한세아를 말렸다.
그래,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놓아서도 안 되었다. 그도 그럴게, 엘리베이터는 1대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2대만 문이 열렸을 뿐이다. 총 3대 중 2대 말이다.
나머지 하나인 화물 엘리베이터가 남아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최소한의 안심은 거기에서도 이상이 발생하지 않을 때에 할 수 있으리라.
"···화물 엘리베이터. 그것도 곧 열릴 거야. 승강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또 들리거든. 근데···."
귀를 쫑긋거리던 지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주변 파악을 위해 살짝 열어둔 문틈을 향해 있었다.
"···근데 이번에는 소리가 조금 달라. 꼭 뭔가 들어 있는 것처럼 소리가 무거워. 아니길 바라고 있지만 그래도 일단 준비는 하는 게 좋겠어."
마른침을 삼키며 말한 지수를 보며 나, 예린, 한세아는 복장을 마저 갖추기 위해 움직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보호구를 착용했다.
당연하게도 장비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기껏 갈아입은 마른 옷이 다시금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비록 보호구들이 나무 인간이나 변종의 괴력에는 무용지물이라고 해도, 바닥을 뒹굴면서 발생하는 잡다한 부상을 일차적으로 막아주기 때문에 착용은 필수였다.
그러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도끼를 꽉 쥔 채 지수가 대기하는 현관문으로 한 걸음씩 조용히 내디뎌 다가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빠르게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띵!
[7층. 치지직···문이 치직- 열립니다.]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 안내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안내음 사이사이에 잡음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른 채 몸을 바싹 긴장시켰다.
그리고.
[끼이이이이······]
다각- 다각- 다각-
무언가가 엘리베이터 문 턱을 집고 나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