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57화 (258/497)

Chapter 257 - 257. 타워 (12)

"헉··· 허억···."

쫓아오려면 거리가 조금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마터면 놈들에게 붙잡힐 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으으···. 뭐, 뭐야···. 옥상? 우리 왜 옥상에 있어?"

기절해 있던 지수가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몸을 적시는 비와 귀를 괴롭히는 소란에 정신이 든 모양이다. 그녀는 바뀐 장소에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지수야! 일단 저 문부터 같이 막아야 해!"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차근차근히 설명해 줄 시간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설명할 시간 대신에 빠르게 옥상을 훑어보았다.

작게 형성된 옥상 정원의 흔적, 알파벳 H가 크게 그려진 헬기 이/착륙 지점인 헬리포트, 가동을 멈춘 옥상 송풍기, 꼬깔 모양의 지붕이 달린 환풍기, 그 옆에 놓인 실외기처럼 보이는 기기, 다발로 뭉쳐 있는 넝쿨.

이 중에서 우리가 옮길 수 있는 건 실외기뿐이었다. 다른 건 바닥에 고정되다 못해 몸체를 이루고 있는 부품이 너무나도 컸다. 들 수 있고 문 앞에 가져다 두었을 때 변종의 힘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는 건 저것밖에 없기도 했다.

"어어, 알았어!"

귀를 쫑긋거리던 지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말에 따랐다. 굳이 내 말이 아니었더라도 주변 상황을 인지한 그녀가 먼저 움직였을 테지만.

"이거! 실외기부터 옮겨! 끄윽!"

"저도 도울게요, 오빠!"

나, 지수, 예린은 옥상 구석에 설치된 실외기를 필사적으로 밀었다. 예린이 문고리에 걸쇠를 걸기는 했으나 그걸로는 부족했던 까닭이다.

'세아씨만 믿겠습니다···!'

한세아는 옥상에 도착한 순간부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상태였다. 뭘 하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여, 연습할 때는 잘 됐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그녀 또한 필사적이라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끼기긱!

쿠웅!

육중한 실외기가 문고리를 막는 모양새로 비스듬히 걸쳐졌다. 그 덕분에 덜컹거리는 옥상 문의 기세가 조금은 줄어들게 되었다.

촤르르륵-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은 여전히 부서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임시방편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생각보다 빨리 문이 뚫릴 듯했다.

"······."

나와 지수는 긴장한 낯빛을 애써 숨기며 떨리는 손으로 도끼를 쥐었다.

옆에서 예린이 침을 꼴깍 삼켰다.

쏴아아아아-

거센 빗줄기가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든다.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바로 그때.

파앗-!

기도하는 것처럼 앉아 있는 한세아의 등에서 날개가 솟아났다. 푸른 입자로 이루어진 날개는 점차 크기를 부풀리며 옆으로 쭉 퍼지기 시작했다.

푸른 날개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녀의 푸른 조각에 담긴 입자들이 안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서, 성공했나요?"

살짝 감은 눈을 천천히 뜨던 한세아가 긴장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눈부심.

우리는 닥쳐 온 위기 상황도 순간 잊을 정도로 빛나는 날개를 펼친 한세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순간 걷힌 비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달빛을 받은 그녀는 현 상황에 맞지 않게 매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비안개가 형성된 것도 그렇게 보이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예, 예! 날개 말하는 거면 성공했습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황급히 답했다. 그동안 불침번 설 때마다 몰래 연습했던 이능이 푸른 날개였던 모양이다.

"······이게 뭐예요. 아니, 이게···."

지수와 예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수도 많이 놀랐지만, 우리 중에서 특히 제일 놀란 사람은 예린이었다. 아이는 입을 헤 벌리고 조금씩 펄럭이는 것처럼 움직이는 날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으니 말이다.

허나 현재 상황에서는 궁금증과 신기함을 해결하는 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멍하니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일단 제 날개 가까이 오세요! 그럼 아마 날개에서 가느다란 선이 나올 텐데, 그게 몸에 묶일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몸이 단단하게 꽉 묶이고 나면···."

"나면···?"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나지막하게 되묻는 지수.

"뛰어내리는 거죠. 저 괴물들을 피해서."

그런 지수에게 단호한 답을 되돌려주는 한세아.

나는 말없이 한세아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푸른 날개가 하늘을 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둘째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세아를 믿는 것뿐이었다.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지 않은가.

츠츠츠츠-

나, 지수, 예린이 한세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접근을 인지한 날개에서 여러 선이 나와 우리 몸에 고정되었다.

내가 슬쩍 잡아당기자 푸른 선은 실체가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잡아당겨졌다. 빗줄기가 날개를 뚫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만져지고, 안 끊어진다.'

한세아가 연결을 끊지 않는 이상 우리 몸을 둘러싼 푸른 선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세아씨! 짐은 어떻게 합니까?! 이거 다 가져갈 수 있어요?"

나는 한세아가 무게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 몸을 묶은 선이 질겨 보인다고 해도 중간에 끊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푸른 선이 짐 가방의 무게를 버틸 수 없다면 버려야 했다.

물자가 아까워도 목숨보다는 아깝지 않았으니 말이다.

"네! 다 챙길 수 있어요!"

내 물음에 짐짓 자신감 있게 답한 그녀는,

"······아니, 물만 좀 두고 갈까요? 아니아니, 그냥 다 챙겨요!"

빠르게 자신감을 잃었다가 끝내는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세아도 완전히 확신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녀가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물자는 일단 챙기고 나중에 정 안 될 것 같으면 무거운 식수부터 하나씩 버리는 길로 가는 게 나을 듯했다. 그나마 식수는 구하기가 제일 쉬웠으니까.

"···이대로 뛰어내린다고요?"

지수는 지상에 가득한 나무 인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까마득한 지상의 모습에 현기증을 느꼈는지 비틀거리면서 황급히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으어어어억!]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나무 인간들의 괴성과 옥상 철문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거미 변종의 괴성이 서로 뒤섞이며 끔찍한 합주곡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쾅!

텅! 터텅!

옥상 문이 안쪽에서 두드리는 힘을 받아 들썩거린다.

[끼아아아아악!]

저 문 너머에 거미 변종들이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가 있다는 걸 아는 우리는 철문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아니, 굳이 그런 걸 모르더라도 누구나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핑!

경첩을 조인 나사가 튕겨 나가기까지 했으니까.

툭- 투툭-

토도도도···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작은 파문을 만들어 내며 굴러 온 나사는 우리의 발치에 멈춰 섰다. 겉면이 부식된 나사는 곧 우리도 먹이 주머니에 갇혀 저 꼴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한세아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날개를 믿고 여기서 뛰어내려야만 하리라.

쏴아아아아아-

"어, 언니! 이거 정말 믿고 가도 되는 거 맞아요?!"

지수가 빗줄기를 맞으며 외쳤다. 비의 기세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강했다. 비에 푹 젖은 옷에서 물이 뚝뚝을 넘어 주르륵 떨어진다.

"으으···! 이 방법 말고는 없잖아요! 내려가는 것도 못하고! 여기 가만히 있으면 죽어요!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니예요!"

"그, 그치만···!"

"저, 저도 지금, 이렇게 크게 펼친 건 처음이라 무섭단 말이예요!"

한세아는 자기 등에 난 푸른 날개가 어색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속해서 들썩거리는 옥상 문도 같이 강하게 떨렸다.

"세아씨만 믿겠습니다! 지수야, 무서우면 나한테 와! 내가 잡아 주기라도 할 테니까!"

"으앗!"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급한 대로 지수를 앞으로 끌어안아 몸을 받쳤다.

어차피 우리 몸을 묶어 주는 건 푸른 날개에서 나온 선이었으니 양손은 자유로웠다. 그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수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발을 질질 끌어서라도 앞으로 움직였다. 그녀를 따라 나, 예린, 한세아도 같이 따라 이동했다.

쾅쾅쾅쾅!

끼긱! 끼기기긱!

···팅! 티티팅!

옥상 문의 경첩이 거미 변종들의 괴력에 의해 조금씩 뜯어지다 못해 기어코 완전히 망가졌을 때.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까마득한 아래를 보던 한세아가 용기를 내어 마지막 남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바로 앞은 이제 경사조차 없는 낭떠러지였다.

우리의 발에 밀려난 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광경이 살벌했다.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뒤를 쫓아온 거미 변종들에게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이러나저러나 위기인 건 마찬가지다.

지금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그나마 살 수 있는 길은 앞으로 뛰어내리는 것뿐이었다.

그래,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런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이 바닥에서 떨어질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인간이 땅을 딛지 못해서, 땅을 딛지 못한다는 상상으로부터 생기는 공포는 이토록 컸던 것이다.

휘이이이이!

"에잇! 빨리 뛰어요!"

후방에서 들이닥친 돌풍이 우리 등을 떠미는 것과 동시에 예린이 각오를 다진 얼굴로 모두를 밀었다. 아이 또한 무섭긴 했지만 용기를 내어 한 행동이었다.

"으아아아!"

"꺄아아악!"

고사리 같은 손에서 나오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아이의 손에 속절없이 떠밀리던 우리는 이내 한세아가 펼친 푸른 날개만을 믿고 마침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아니.

날았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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