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59화 (260/497)

Chapter 259 - 259. 안개의 도시 (2)

"너!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연구소에 있던 게 아니었나?! 그럼 위에는 대체 누가 버티고 있는 거지? 나무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에···."

녹색의 거한은 나도 모르는 이야기를 막무가내로 꺼냈다. 내가 혼란스러운 만큼 그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두통이 이는지 두꺼운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말을 이었다.

"네 누나는? 그녀는 어디 있나? 그 사람도 같이 있던 것이 아니었냐는 말이다! 지금 네 누나 혼자 연구소에 남아 있는 것인가? 증폭기 연구소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지?"

"······대체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한세아를 끌어당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뜩이나 지친 상태에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니 죽을 맛이었다. 그만큼 벌어진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나무의 성장을 억제? 위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 아마 연구소에 있을 누나? 연구소 탈출? 그것보다 증폭기는 또 뭐야?'

그가 말하는 것들은 단순히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아는 채 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은 이야기였다. 내 이름 정도는 우연히 찍어서라도 맞출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이야기인 연구소나 내 누나의 존재까지 맞춘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나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허나, 그가 나를 예전에 알았던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맙소사···. 어머니시여. ···정말.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나 보군. 반응을 보아하니 당연히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고. 허, 씨앗의 부작용이 아직 남아 있었나."

기억을 잃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건만. 그는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으로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이런 일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 제 누나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고요? 누나는 살아 있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탈출이라는 건 또 무슨 말입니까."

머리가 터질 것같이 복잡한 탓에 나는 바보같이 누구냐고만 물을 수만 있었다. 녹색의 거한이 우리에게 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아직 판단이 되지 않은 것도 몸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네 누나의 행방을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나. 나도 몰라서 너한테 물어본 것이거늘. 아무튼 일이 꼬인 게 확실하군. ······허어, 그럼 연구소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신을 성장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내 추측도 틀렸을 가능성이 있겠고. 생각보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

거한은 어금니를 긁적이며 침음을 흘렸다. 그는 무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녹색 피부의 거한은 내 가슴 부근, 정확히는 심장 부근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가 떼어내기도 했다. 희미하게 조각이라는 단어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

"······."

얼추 정신을 차린 지수와 예린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몸이 바싹 굳어 얼음이 된 상태였다. 지수는 떨리는 손으로 도끼 자루를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녀들의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한세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는 다행히 멎어 있었다. 안개의 영역에서 벗어나자 조금씩 푸른 입자가 활성화 되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아까 내가 누구냐고 물었었나, 이현우. 내 이름은 칼카타다. 대전사지."

혼자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던 그.

칼카타는 고개를 휙 들며 자기 이름을 밝혔다. 갑자기 혼잣말을 하다가 이번에는 내 질문에 불쑥 답을 한 것이다.

"대, 뭐요? 대전사? 아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내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내뱉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 들을 게 많았던 까닭이다.

"일단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까. 서로 물어볼 게 산더미겠지. 허나 지금은 우선 네 일행을 돌아보는 게 먼저일 것 같다. 자, 이것부터 받아라. 가방을 챙겨 오길 잘했군."

나, 지수, 예린, 한세아를 다시 한번 훑어본 칼카타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우리에게 던졌다.

-쿵!

그의 덩치만큼이나 큰 가방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살짝 열린 가방의 틈 사이로 통조림이나 담요 따위가 보였다. 생존에 필수인 물건들이 담겨 있는 가방이었다.

마치 우리를 위한 가방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가방을 챙겨 왔다는 말을 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올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우리가 아니, 누군가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그것도 이 한밤중에?"

"오늘 점괘가 요상했거든. 그래서 이렇게 밤이 늦었어도 자지 않고 있었지. 이제 보니 그러길 잘한 모양이야. 너희들이 정말로 오지 않았나. 그리고 이현우 네 말대로 너희들이 온다는 건 몰랐다. 다만 누군가가 온다는 건 알았지."

점괘는 또 무슨 소리인가. 처음에는 농담하는 걸로 받아들였으나, 진지한 칼카타의 표정에 이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이 그물도 미리 설치해 둔 겁니까? 우리가 올 줄 알고?"

"아니, 그건 우연이다. 안전망은 내가 쓰려고 만들어둔 거거든. 내 아내를 위해서."

자신을 대전사라고 밝힌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상황이 어지럽게 이어지는 때문일까. 머리가 생각하는 걸 거부하는 것 같았다.

대신 우리는 칼카타가 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게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쏴아아아아-

후두둑- 후두둑-

폐건물로 변한 아파트에 들이닥치고 있는 빗줄기 소리가 우리와 칼카타 사이를 빙빙 돌았다.

"기억을 잃었다면 내가 어색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괜찮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도 있을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성을 다시 쌓아가면 된다. 본디 관계란 그런 거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나, 지수, 예린의 모습에 칼카타가 한 말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칼카타는 복잡한 생각은 질색이라는 듯 조금 전까지 지었던 심각한 표정을 훌훌 털어낸 상태였다. 태세 변환이 빨랐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 안개는 위험하거든. 어차피 갈 데도 없겠지만. 밤도 늦었고 나도 슬슬 돌아가야 하니 오늘 못다한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예? 간다고요?"

"그럼 내가 여기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나? 나도 집이 있고, 가족이 있다. 집에 있는 내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너희들도 내가 여기 있으면 불편할 것이고."

"······."

"그리고 어차피 내가 지내는 곳으로 같이 가자고 해도 안 따라올 것이지 않나."

그렇긴 하다. 나를 확실하게 알고 있고, 물자를 선뜻 나눠 주는 모습에 저울이 나쁘지 않은 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여전히 요주의 인물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가 전부 기만책일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지치고 힘든 상황이라고 해도 칼카타를 믿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직 그와의 관계에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만 쌓였을 뿐이니까.

정확히는 사실 그 모래성조차 쌓이지 않은 판국이다. 간신히 모래알만 쌓였다고 할 수 있었다.

"아직 밤이라 확실하게 보이진 않겠지만, 여기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 나와 내 부인을 제외한다면. 아, 이제 좀 늘었군. 너와 네 일행들까지. 그게 끝이다.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괴물들도 없지. 뭐, 어디까지나 안개가 잠식한 곳에 한정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이대로 갔다가 우리들 몰래 동료들 데려와서 쳐들어올 수도 있고요."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꼬리를 일자로 세우며 칼카타가 몸을 돌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그의 동료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듯이.

"그래도 내가 자리를 비워야 너희들이 안심하고 쉴 수 있을 텐데. 만에 하나 다음에 올 때 나 혼자가 아니라고 해도 이곳에 함부로 들어오지는 못하겠지. 나는 총에 맞고 싶지 않거든."

칼카타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정확히는 내가 품에 끌어안고 있는 한세아를 향했다.

슬쩍 아래를 내려보니 어느새 눈을 뜬 한세아가 숨을 죽이고 총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들킬 줄 몰랐다는 듯 혀를 작게 찼다.

"···세아씨, 언제 일어나 있었습니까?"

"얼마 안 됐어요. 혹시 몰라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감이 좋은지 들켜 버렸네요."

한세아는 앓는 소리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손은 여전히 총을 잡고 있었다. 언제든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정간은 단발로 바뀐 후였다.

"이거참. 이거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구만. 아무튼 내가 말한 건 적어도 전부 사실이다. 판단은 너희 몫이고. 내 말을 믿지 않는 것까지는 좋지만 안개에 준비도 없이 함부로 몸을 밀어 넣지는 마라. 이건 내 경험에 의한 충고다. 새겨 듣는 게 좋을 거야."

킬킬 웃은 칼카타는 자신은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바닥을 굴러다니는 손전등을 주웠다. 내가 놓친 손전등이었다.

딸깍- 딸깍딸각-

"흠. 아직 쓸 만하군. 역시 미제야."

그는 그것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전구에 불이 들어오자 내게 장난스럽게 던졌다.

휙!

나는 그가 던진 손전등을 낚아챘다. 살살 던진 것 같았는데 안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한지. 손전등을 잡아챈 손이 얼얼해졌다.

"어찌 되었든 이현우 너와 다시 만나서 좋군. 그리고 환영한다. 안개의 도시에 온 걸."

칼카타는 안개가 가득 깔린 도시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한 뒤, 떠났다.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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