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0 - 260. 안개의 도시 (3)
"···진짜 갔네."
지수가 비가 내리는 바깥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귀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있었다. 칼카타가 이동하는 소리였다.
그는 지금도 늦었는데 여기서 더 늦으면 아내가 잔소리한다며 서둘러 움직였고, 건물 외벽에 설치된 와이어를 타고 바깥으로 나갔던 것이다.
옆 건물로 이어진 와이어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손전등으로 비춰 보니 흡사 짚라인처럼 보이는 장치가 각 아파트 외벽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그물에 걸렸을 때, 어쩐지 바로 내려오더라니 와이어를 타고 한 번에 내려왔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안전망이 거실에 설치되어 있었구나.'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우리는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이고. 이게 아니었다면 크게 다치고 말았겠지.
내려올 때는 도르래를 타고 편하게 내려왔겠지만 역으로 돌아갈 때는 손수 힘으로 와이어를 붙잡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 준 칼카타.
그는 순식간에 손전등이 보여주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개가 위로 훅 올라온 것도 그를 시야에서 가리는데 한몫했다.
"흐으···. 오빠, 추워요······."
예린이 내 손을 잡아 오며 오들오들 떨었다. 아이의 옷에서는 짜내지 못한 빗물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찬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추울 만도 했다.
"어어, 미안. 많이 추웠지?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세아씨, 예린이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아이 먼저 챙겨야할 것 같습니다."
슬슬 정신을 차린 내게도 오한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수와 한세아 또한 이제서야 사방에서 부는 비바람에 추위를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구 보호용 유리가 깨진 손전등에 비친 우리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하나 같이 시퍼렇게 질린 입술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눈이 퀭한 건 덤이었다.
칼카타가 했던 말처럼 우선은 일행을 돌봐야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러고 나서도 늦지 않을 터다.
"그쪽으로 고개 돌리지 않을 테니 편하게 갈아입으십쇼."
다른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우리가 있는 아파트는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내부가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한 상태였으니까.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은 외벽과 바닥, 큰 충격에 일제히 쓸려 나간 것처럼 보이는 가전 제품의 파편,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 조각, 금이 간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허물어진 내벽.
건물이 용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네, 넵! 예린아, 조금만 기다려. 언니가 금방 갈아입을 옷 줄 테니까. 옷이 좀 말라 있으면 좋겠는데···."
그나마 마른 옷가지를 최대한 챙긴 한세아는 예린을 데리고 거실 구석으로 갔다.
나는 고개를 움직여 시선을 돌렸다. 귀에 들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로 다시 한번 바깥을 살펴보았다.
안개.
운무처럼 바닥에 짙게 깔린 안개가 눈에 들어온다. 손전등을 비춰 보아도 빛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안개에 밀려 뿔뿔이 흩어졌다. 워낙 두껍게 깔린 터라 바닥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 탓에 지금 우리가 몇 층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10층 정도에 있겠거니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그것도 안개가 일정 높이 이상 올라오지 않아서 가능한 추측이었다.
쏴아아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는 안개를 그대로 통과했다. 처음에는 습도가 높아서 생긴 안개인 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안개 속으로 들어왔을 때 푸른 입자가 빠르게 소모되기도 했고, 칼카타가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며 경고하기도 했지 않은가.
그리고 괴물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빗소리마저 제외한다면 매우 적막할 것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까.
게다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도 있던 넝쿨들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도시 전체가 잠이 든 것 같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괴물이든, 식물이든, 건물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들이.
와르르-
그녀들이 아직 옷을 갈아입는 동안 지수는 칼카타가 두고 간 가방을 검사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온 그녀는 가방 안에 담긴 것들을 바닥에 전부 쏟아 냈다. 혹여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탈탈 털기도 했다.
그러자 연어나 닭 가슴살 캔, 500ml 생수, 곱게 접힌 담요, 상처 치료용 연고, 멸균 처리된 붕대 따위의 물건들이 바닥을 장식하게 되었다.
킁킁-
지수는 먼저 캔을 하나씩 집어 신중하게 냄새를 맡았다. 캔을 이리저리 돌리는 걸 보니 내용물이 샌 부분이 있는지 찾는 듯했다.
"구멍 뚫린 곳 있나 찾아보는 거야. 진짜 나쁜 놈들은 호의적인 척하면서 여기에 약을 넣는 경우가 있거든. 이 사람도 그럴 수도 있잖아. 배고파서 이러는 거 아니야."
가만히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지수가 한 말이었다. 괜스레 헛기침하며 얼굴을 돌렸다. 냄새에 심취한 듯한 자기 모습이 부끄러웠나 보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기 담요나 털어 줘! 이상한 가루 같은 게 묻어 있을 수도 있어. 위험한 냄새는 나지 않지만 그것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아무리 아저씨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야. 근데 솔직히 아직까진 의심스러워. 나 지금까지 살면서 저렇게 변한 사람은 처음 봤거든. 우리랑 같은 사람이 맞나?"
대전사니 점괘니 뭐니 했던 칼카타.
녹색의 피부에 큰 어금니를 가지고 있던 칼카타.
대체 무슨 동물과 결합하면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제일 가까운 동물이라고 한다면 멧돼지밖에 없다.
허나, 그럼 녹색 피부는 뭘로 설명이 된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수의 말마따나 그는 아직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내 머리는 잃어 버린 기억을 도통 떠올리지 못했다. 낯이 익다는 느낌만 겨우 받을 수 있을 뿐이지.
그동안 기억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나도 모르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니 머리가 꽉 막힌 느낌이 들었고, 속까지 답답해졌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이어 나가도 기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팡! 팡!
나는 막힌 속을 풀 겸 담요를 강하게 털었다.
극세사 재질로 이루어진 담요가 허공을 때리자 이상한 가루가 나오기는커녕 약간의 먼지만 겨우 나왔다. 수작을 부린 담요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담요는 멀쩡하네. 지수야, 캔도 멀쩡하지?"
"응, 그러네. 그래도 일단 담요만 쓰고 먹을 건 그냥 두자."
"알았어."
나는 지수가 바닥을 정리하는 사이 담요 2장을 겹쳐 바닥에 깔았다. 손으로 지그시 눌러보니 폭신함이 살짝 느껴졌다.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깨져 바람이 전부 들어오고, 장판은 전부 벗겨져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담요를 써야만 했다. 적어도 바닥에서 전해지는 냉기는 막아야 하니까.
담요가 얇은 편이라 많이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보온 효과를 주리라 믿었다.
"현우씨! 이제 현우씨도 옷 갈아입어요. 저흰 다 끝났어요."
"맞아요! 오빠도 얼른 갈아입어요! 안 그러면 감기 걸려요!"
한세아와 예린이 한결 나아진 얼굴로 다가왔다. 한세아의 이마에는 작은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추락할 때 긁히면서 생긴 상처에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린은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제가 제대로 막았어야 했는데."
나는 칼카타가 준 담요가 아닌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담요를 그녀들의 몸에 둘러 주었다. 담요가 원체 큼지막한지라 두 사람을 감싸기에는 충분한 사이즈였다.
"에이, 괜찮아요. 크게 긁힌 것도-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살았으면 됐죠. 현우씨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갑자기 안개가 나타나고, 그 안개가 날개를 지워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씁! 제 걱정은 됐고 옷 갈아입기 전에 현우씨 등이나 좀 봐요. 안 그래도 바닥에 강하게 부딪혀서 많이 아플 것 같은데."
한세아는 연고를 들고 내 등 뒤로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내 상의를 들추는 손길에 몸이 바싹 굳었다.
"세상에, 이거 봐요. 엄청 긁혔잖아요. 다행히 피는 멈췄지만, 안 따가웠어요?"
"으헉! 아니, 괜찮-."
"괜찮기는 무슨! 우선 여기 옷 줄 테니까 갈아입고 와요. 약은 그 다음에 발라줄게요."
"예···."
나는 그녀가 건넨 옷가지를 받아 거실 구석으로 향했다.
갈아입기 전에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예린은 가만히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지수가 꼬리로 바닥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세아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날 보고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저기. 눈 좀 돌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운데요."
나는 아닌 척 내 몸을 바라보고 있는 지수와 한세아에게 들어 올리던 상의를 내리며 말했다.
내가 상의를 다시 내리자 점점 빠르게 바닥을 치고 있었던 지수의 꼬리가 확연하게 느려졌다. 왠지 실망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녀들은 아쉬운 듯한 소리를 작게 내뱉더니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이내 옷을 무사히 갈아입은 나는 등에 난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일마저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와 불침번을 서는 일뿐이었다.
"지수랑 세아씨는 주무십쇼. 오늘 밤은 제가 쭉 불침번 설 테니. 어차피 제 차례이기도 했고요."
"네? 현우씨 혼자 쭉 서신다고요? 교대로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자는 전부 그대로 있다 못해 늘어났지만, 체력은 그대로가 아니었다. 그나마 잠을 조금 자서 체력을 약간 회복하긴 했으나 중간에 거미 변종과 싸우느라 다시 지쳐 버린 것이다.
그녀들은 현재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아저씨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그러지 말고 나랑 교대로 서자."
나와 마찬가지로 퀭한 눈을 하고 있는 지수가 피로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너는 불침번 서지마. 그, 여기서 지수 네가 몸 상태 제일 안 좋으니까. 그러다가 또- ···아니다."
"······."
G타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확 붉히는 지수. 꼬리가 바싹 굳은 그녀는 말없이 침몰했다.
"세아씨도 걱정 하지마시고 주무십쇼. 제가 진짜 힘들다 싶으면 중간에 깨우겠습니다. 지금은 잠이 안 와서요.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알아볼 수도 없으니 날이 밝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우선 쉬십쇼."
"······그래요. 알았어요."
내 복잡한 얼굴을 본 한세아는 말을 줄였다. 평소라면 고집을 부렸을 텐데, 눈치껏 배려를 해준 그녀가 고마웠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몸에 담요를 둘렀다. 몸을 괴롭히는 차가운 바람에게서 체온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지수와 한세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역시 둘 다 겨우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다.
쏴아아아아··· 휘이이잉-
담요를 크게 펼쳐 뻥 뚫린 창문을 임시 방편으로 막은 상태. 그러나 거센 비바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뚫고 들어왔다.
나는 내 몫의 담요를 지수, 예린, 한세아에게 나눠 주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남산에 있는 연구소는 총 두 군데. 그중 한곳에 이 사태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네.'
의왕시 생존자 캠프에서 만난 엘트라가 한 말.
'증폭기 연구소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지?'
이곳에서 만난 칼카타가 한 말.
'···증폭기라.'
엘트라가 말한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칼카타가 말한 증폭기를 가리키는 말일까.
모르겠다. 다만 속으로 단어를 굴려 보니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연구소의 존재를 알고 있는 엘트라와 칼카타는 서로 무슨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둘이 서로 동료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 안개는 무엇이며, 어째서 푸른 입자를 억압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모르겠다. 다만 그 진원지가 안개 속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당연한 말이다.
신을 억제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였을까.
모르겠다. 너무 판타지스럽지 않나. 영화도 아니고 현실이건만. 그 단어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물론, 이미 입자로 이능을 쓰는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뭘 하고 다녔던 걸까.
···모르겠다.
씨앗의 부작용이란 건 뭘까. 누나가 준 알약 같은 것이 씨앗이었나.
이 역시 모르겠다.
이제는 누나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단순히 어떠한 느낌이었다라고만 기억날 뿐.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복잡한 생각에 밤이 깊어가는 동안 나는 잠이 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