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1 - 261. 안개의 도시 (4)
거세게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그쳤지만, 이번에는 지독한 습기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휘이이···
비 온 뒤라 그런가 생각보다 쌀쌀한 기온. 약하게 부는 바람에도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도시를 잠식한 안개도 같이 오소소 돋아 넘실거렸다.
지상은 여전히 구름이 깔린 풍경이었다. 당연히 그 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볼 수도 없었다. 그만큼 안개가 짙다는 이야기였다.
안개 사이로 햇빛이 일부 투과되고, 그 안개는 건물을 반 이상 잡아먹고 있는 분위기. 그러나 동화 속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건 몽환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 였으니까.
낭만이 아니라 불쾌함만 가득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툭- 두둑-
폐허로 변한 건물을 타고 자란 가느다란 한 줄기 넝쿨의 잎사귀에서 맺힌 이슬이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 떨어진 작은 물방울은 안개에 잡아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방울이 존재했었다는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그리고 눈을 뜨고 둘러봐도 넝쿨은 이 한줄기가 끝이었다. 어젯밤에 추측했던 것처럼 역시 안개가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모양이다. 식물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같이 말이다.
이제는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 나무 인간들이나 변종들의 소리 또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 고요, 적막, 정적, 부재, 안식···.
마치 도시 전체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빗소리마저 사라지니 그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뚝- 뚝-
살아 숨 쉬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정적인 이 상황에서 움직이는 건 칼카타의 이동 수단인 와이어뿐이었다. 그가 설치해 둔 짚라인의 와이어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점점 강해지면서 잠든 도시의 모습을 좀 더 멀리까지 밝힌다. 고층 아파트들이 무너지고, 붕괴되고, 쓰러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의 상단, 중단, 하단부를 가리지 않은 채.
붕괴된 단면이 보일락말락하는 어떤 건물에서는 추락한 전투기나 헬기가 꽂혀 있기도 했다.
그러한 풍경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만들었다.
'···전쟁터였구나. 하긴, 당연한 거지. 여긴 서울 근방이니까.'
이제 아침이 되고, 해가 뜨기 시작했으니 곧 칼카타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가 오면 그동안 알고 싶었지만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겠지.
바로 그때.
"아저씨!"
지수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녀는 예린, 한세아와 함께 지금 우리가 있는 아파트를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본래는 나도 따라가려고 했으나, 밤을 새웠다는 이유로 나는 여기서 쉬고 있으라고 한 것이다. 교대하지 않고 혼자 버텼다는 것에 오히려 잔소리만 잔뜩 들었다.
"아무것도 없어. 쓸 만한 것도, 사람도, 괴물도. 그냥 전부 부서지거나 흔적만 겨우 남아 있더라. 엘리베이터 통로도 확인해 봤는데 와이어가 없어서 그런가 승강기는 보이지 않았고. 아마 밑에 떨어졌겠지."
"그래? 수고했어. 그리고 그 없어진 승강기 와이어는 이거일 거야."
나는 지수의 어깨를 살살 두드려주며 건물 외벽에 설치된 짚라인을 가리켰다. 이토록 긴 와이어를 구하려면 엘리베이터 수직 통로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에이, 수고는 무슨. 많이 내려가지도 못했는걸.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도 안개가 건물에 들어와 있어서 얼마 가지도 못했어. 아저씨가 경고하기도 했고, 내가 보기에도 일반적인 안개가 아닌 것 같아서 들어가진 않았지만. 또 어제 안개 때문에 된통 당하기도 했었잖아."
지수는 짚라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잠든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만 안개를 이상하다고 느낀 게 아니었다. 감각이 좋은 지수도 안개에게서 꺼림칙함을 느낀 것이다.
아니, 사실 일정 높이 이상으로 올라오지 않는 안개는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느낄만 했다. 실제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직접 몸소 겪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한세아와 예린은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칼카타가 오기 전까지 끝내려는 듯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어떤 태도로 나올지 확신이 서지 않는 탓에 최소한의 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잘했어. 자, 이거 먹으면서 쉬고 있어. 나는 세아씨한테 가 볼게."
나는 지수에게 쉬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주머니에서 초코바를 지수에게 건넸다. 마지막 딱 하나 남은 초코바였다.
"마침 달달한 게 땡겼었는데! 고마워, 아저씨!"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지수는 아침 식사 대용인 초코바 하나를 한 입 물고 우물우물 씹고 있다가, 어느새 몰래 접근한 예린에게 나머지를 순식간에 전부 빼앗겼다.
그녀는 초코바를 한입에 몰아넣은 예린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참 야무지게도 오물거리는 모습에 지수는 피식 웃고 주먹을 들었다.
"세아씨, 권총은 더 못 쓰죠?"
나는 까불다가 기어코 꿀밤을 한대 얻어맞아 울상을 지은 예린을 보고 속으로 킥킥 웃은 뒤에 한세아에게 물었다.
"아, 현우씨. ···네, 권총은 더 못 쓸 것 같아요. 강화탄도 다 써서 없고, 무엇보다 총알이 없거든요. 그래도 알차게 썼네요."
한세아가 가진 비장의 무기였던 강화탄은 거미 변종을 마무리하는 걸 끝으로 바닥이 나버렸다. 권총 자체도 내구도가 다한 듯 각 부품이 맞물리지 않는 덜그럭 소리가 계속 났으니 이제 정말로 끝이 난 것이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일단 가지고는 있으려구요. 혹시 모르잖아요?"
"세아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쇼. 그럼 이제 남은 건 소총 두 정하고, 탄약은···얼마나 남았습니까?"
"아까 다 모아 보니까 한 탄창 겨우 나왔어요. 스무 발이 채 안 되는 딱 19발요."
"아쉽네요.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제 말이요."
나와 한세아는 아직 젖은 상태인 가방에 짐을 차곡차곡 집어넣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장비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식량과 물을 데워주는 가스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원거리 무기인 총도 상태가 그닥 좋진 않았다. 멀쩡한 건 나와 지수의 도끼들이었다.
물자를 구해야 하기는 하는데 이 안개 속에서 멀쩡한 것들을 구할지 있을지 의문이다. 멀쩡한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의문을 부추기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세아와 지수가 가지고 있는 푸른 조각이 안개에서 벗어나자 조금씩 힘을 되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내 심장 속 입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잠에서 조금씩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짐 정리가 전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 아저씨! 그 사람 오나 보다. 와이어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
바닥에 깔린 담요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칼카타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 중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외쳤다. 청각이 좋은 그녀이니 가장 먼저 칼카타의 접근을 알아차린 것이다.
지이이익-
와이어에 걸린 도르래 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어제보다 뚜렷하게 보이는 녹색의 거한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르래 손잡이를 잡은 근육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덤이었다.
······쿵!
이내 바닥을 디딘 육중한 다리가 내는 소리가 요란하다. 안 그래도 약해진 바닥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잘 잤나? 네 여자들은 어제보단 얼굴이 훨씬 좋아 보이는데, 이현우 너는 어째 눈이 퀭하군! 또 혼자 고민하느라 밤을 샌 모양이지? 그런 건 그대로구만!"
칼카타가 킬킬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경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태도는 잔뜩 긴장한 우리가 되려 바보가 된 느낌을 들게 하였다.
"···정말 오셨네요."
솔직히 오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언제 어느 때고 상황이 바뀔 수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는, 우리는 여전히 그를 잘 몰랐으니까.
"내가 아침이 되면 다시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대전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아. 내가 온다면 오는 것이고, 한다면 하는 것이지. 그리고 이 참에 말해 두는데, 나는 너희를 해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내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요한 상황이기도 하고."
"당신이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지수가 너스레를 떠는 칼카타를 보며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래,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 아내에게 도움이 필요한 거지만. 나라고 뭐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허나 내가 도움을 청하기 전에 이현우 너와 네 일행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게 먼저겠지."
칼카타는 표정을 진중하게 바꾸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다. 그가 무기를 꺼내는 건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도끼를 꽉 잡았다가 이내 놓았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기는커녕 무기로 쓰일 가능성도 없는 것이었던 까닭이다.
"자, 내가 뭘 가져 왔는지 봐라. 일단 이걸 보여주는 게 우선일 듯하군.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나한테는 소중한 것이거든."
칼카타는 여전히 경계 중인 우리에게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사진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채 활짝 웃고 있는 나, 목에 수건을 두른 채 호탕하게 웃고 있는 칼카타, 안전모를 푹 뒤집어쓴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키가 작은 사람 하나가 찍혀 있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나, 칼카타, 난쟁이를 제외하더라도 여러 인원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그 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글씨가 적힌 초라한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었다.
글씨는 프린트된 것이 아니라 손으로 급하게 보드마카로 휘갈겨 쓴 것처럼 보였다. 배경이 되는 천도 잔뜩 헤져 보이는걸 보니 어디선가 굴러다니던 걸 주워 온 모양이다.
다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런 요소가 아니었다.
[졸린사 제 2연구소 완공]
······현수막에 쓰인 내용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