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3 - 263. 진실 혹은 거짓3 (2)
"······신?"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방금 칼카타에게서 들은 말을 곱씹기 바빴다. 고작 나무를 신이라 부르는 건 둘째치고, 세상이 이렇게 된 게 외계인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사물을 신성시 여기는 건 예전부터 존재하던 풍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에 이르러서 많이 사장되어가고 있는 풍습이기도 했다. 그런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까닭이다.
물이 들어 있는 그릇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십자가에 기도를 하며, 불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는 행위.
우리 인간은 그저 속으로 바람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기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우리의 바람은 실질적인 형체를 갖춘 존재에게 닿지 않는다. 닿을 수가 없었다. 존재가 없으니까.
형체가 없다. 형태가 없다. 모습이 없다. 존재가 없다. 외형이 없다.
정확히는 고정된 외형이 있기는 하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조각상뿐이었으니.
결국은 미신과 문화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기도하는 사람도 진짜로 신이 있다고 믿지 않을 터다.
헌데 형체가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진짜 신이라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전지하지 않다. 전능하지도 않지. 허나 자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그게 신이 아니라면 뭐가 신이란 말인가. 콜록! 콜록! 우리에게는 충분히 신이었다."
칼카타는 그런 우리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는 기침이 나오자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구석에 시금치가 수 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아니, 이제 보니 칼카타와 조금 닮았다.
"자연을 마음대로 다룬다니···. 그럼 세상이 식물투성이가 된 것도 그 나무 때문이라는 거군요."
"그래, 대수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향을 재현하는 것이지. 하지만 이런 식은 정상이 아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된 건 세계수가 폭주한 결과물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오염된 탓이겠지."
"······"
우리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고작 나무 하나 때문에 세상이 망했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지 않은가.
"그리고 바깥에 돌아다니고 있는 것들. 너희들이 악성 감염자나 나무 인간이라 지칭하며, 혹은 그루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들. 그것들은 본디 움직이지 않아야 옳다. 아니, 움직이는 것이 아닌 대지로 돌아가야함이 옳다. 대지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것으로 순환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그럼 저것들은 왜 움직이는 건가요? 역시 검은 입자 때문인가요? 불을 못 쓰는 것도 그것 때문?"
침음을 흘리며 묻는 한세아. 그녀는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거리의 나무 인간들을 떠올린 듯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맞다. 검은빛. 검은 힘. 사악한 힘. 저주받은 힘. 그것이 일으킨 이상 현상이다. 사방에 퍼진 검은 힘들이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지.
다만, 불을 쓰지 못하는 것만큼은 다른 이유다. 신이 있는 숲에 불이 날리가 없지 않은가. 그 효과는 오히려 신성한 힘에게 영향을 받은 결과다. 지금은 검은 힘이 거기에 뒤섞여 비정상적인 일을 일으켰다고 보면 되고. 그래서 일정 이상의 열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거다. 신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
"그, 이 귀랑 꼬리는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합쳐진 건데요? 무엇 때문에? 동물말고 사람이나 식물하고 합쳐진 사람들도 있다고요."
지수가 두 귀를 쫑긋거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예린도 자기 귀와 꼬리를 움직여댔다. 자기에게도 달려 있다는 걸 어필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궁금한 걸 모조리 물어볼 심산인 듯했다. 지금 이렇게 정보를 아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그대로 일단 들어두는 편이 좋다고 나도 판단했기에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몸이 변형되면서 생긴 당혹스러움은 나는 알지 못하기도 하니까. 아직 내가 끼어들 차례가 아니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어째서 너희들이 동물과 합쳐지게 되었는지는. 나라고 다 아는 게 아니야."
칼카타는 고개를 저었다. 주변의 동물과 합쳐지거나 그 외 다른 것과 인간이 결합하게 된 것은 그도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나 보다.
"만약 연구소에 있는 증폭기를 가동시켜 푸른 입자를 강화시킨다면 지상의 나무 인간들은 바로 죽는 겁니까? 칼카타 당신 말대로 안식을 얻어 움직이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나는 괴물들에게 푸른 입자가 효과적으로 먹힌다는 걸 떠올렸다. 검은 입자를 가진 괴물들과 싸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푸른 입자가 필수라는 사실도 함께.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서서히 영역을 넓혀가면 안정화된 구역들이 늘어나겠지. 불도 다시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이야기가 중간에 샜지만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바로 졸린사 제 2연구소, 즉 증폭기 연구소가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이었다.
아마 엘트라가 말했던 희망이라는 것이 증폭기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그럼 거기만 가면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명확한 해답이 보인 덕분에 지수가 반색하며 외쳤다. 외쳤을 것이다. 중간에 칼카타가 말을 끊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미 세상은 바뀌었다. 너희들이 바라는 예전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어. 증폭기가 가동이 되든 되지 않든 간에 상관없이 지구는 더 이상 전기라는 빛으로 빛나지 않을 거다. 이미 이곳은 다른 빛으로 뒤덮였으니까."
"그런······."
지수는 그의 말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귀와 꼬리도 기운을 잃어 축 늘어졌다.
"······."
그건 나, 예린, 한세아도 마찬가지였다. 내심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쭉 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단언하는 말을 듣게 되니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휘이이이···
해가 높게 뜨면서 햇빛에 달궈진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시선을 이끄는 바람에 나는 휑한 거실 창문을 넘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바닥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지상에 깔린 안개, 폭격을 수없이 맞은 건물들, 침묵에 빠져 있는 모든 것들.
여전히 잠들어 있는 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그래도 제 2연구소로 가야 한다는 건 여전합니다. 거기를 가야 괴물들 수라도 줄일 수 있으니까.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칼카타?"
칼카타는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에게 물어볼 건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았으나 일단은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그가 외계인이라는 것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은 그거면 됐다.
세상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지 못한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최소한 변종같은 위험한 것들만 없앨 수 있다면 우리가 연구소로 향하기에는 충분한 목적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수리산의 아이들을 보며 다짐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의미 없는 희생을 줄이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아···, 아저씨 말이 맞아. 가긴 가야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여기까지 왔는데 멈출 수는 없잖아. 그리고 당신. 아니, 칼카타씨?"
"그냥 칼카타라고 불러라. 편한 대로 아저씨라고 불러도 좋고."
"그건 안 돼요. 아무튼 칼카타. 당신이 진짜 외계인이고, 그쪽이 한 말이 일단 전부 사실이라고 쳐요. 그럼 그 세계수인가 뭔가는 왜 오염된 건가요? 연구소까지 차릴 정도면 통제 가능했던 거 아닌가요?"
"안타깝지만 나도 세계수가 왜 폭주했는지는 모른다. 오히려 이현우와 만나면 알게 될 거로 생각해왔건만. 그가 기억을 잃은 상태일 줄은···."
"그럼 제 아저씨는 그 연구소에서 무슨 역할을 맡았는데요? 연구원? 사진 속 아저씨가 입고 있던 옷, 실험복이잖아요. 흰색 가운하면 그것밖에 생각 안나는데. 병원이 아니니 의사는 당연히 아닐 거고요."
지수가 하는 질문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이야기에 밀려 여태까지 묻지 못했던 말이지만 나도 알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한세아와 예린도 귀를 기울였다.
"나는 지하 연구소에서 단순 경비만을 맡았던 터라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지. 이현우, 너는 거기서 증폭기의 조율을 맡았었다. 네 누나와 함께 말이다. 너희 남매는 이상하게도 푸른 힘과 적합성이 뛰어났거든."
"그러니까 제가 연구원이었다, 이 말입니까?"
"음···, 그보다는 실험체에 가까웠지. 연구는 주로 네 누나가 하고, 너는 신성한 힘을 몸에 적용 시키는 과정을 밟았으니까."
"······그거 인체 실험 아니예요?"
한세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성한 힘은 푸른 입자를 말하는 것일 터다. 그래도 괜히 찝찝했다.
"그가 자원했다고 들었다. 누나를 돕겠다며 나섰다고도 들었고. 그래도 첫 실험 후 머리에 이상이 생긴 다음부터는 아무런 실험을 하지 않았어. 오직 네 누나만 연구에 참여했지. 부작용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몰랐지만."
"내 기억이 날아간 탓이 실험의 부작용 때문···."
문득 자취방에 있을 때, 누나가 내게 알약 하나를 건네준 것이 생각났다. 일반적인 알약이 아니었던 그것. 내가 그것을 먹음으로써 가라앉았던 부작용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일까.
"실험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돌발 변수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이현우 네가 잘못되니 네 누나가 어찌나 난리를 피우던지. 실험 일지를 전부 폐기하겠다며 노발대발하는 걸 내가 겨우 막은 게 기억이 나는군. 그래서 너한테 그녀의 행방을 물어본 거다. 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는 그녀라면 널 혼자 둘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 조금 뜬금없는 질문인데요. 혹시 제 누나 이름 알고 계십니까? 누나 이름도 기억이 안 납니다. 있다는 것만큼은 기억하는데."
"너희 둘이 친남매가 아니라는 건 네가 직접 말해 줘서 알고 있는데, 이름까지는 모르겠군. 나름 보안이 철저했거든. 이제 연구소에 관해서 내가 아는 것은 공사에 참여했던 제 2연구소의 구조뿐이다. 실험에 관한 거나 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아는 게 없으니까."
칼카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 누나의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간혹 뜬금없는 상황에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만 했을 뿐. 그렇게 친했다고는 하는데, 기억은 전혀 나지 않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건 대부분 말했다고 했다.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서 우리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칼카타, 혹시 내일 다시 와 주실수 있겠습니까? 저희들끼리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끝내 입을 열어 양해를 구했다.
그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기만 해서 미안했으나, 우리에게는 머리가 정보를 받아들일 시간이 절실했다.
의문이 절반 이상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아직 말해주지 못한 안개에 관련된 이야기나, 그가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던 이야기들을 마저 듣기에는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준비를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들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그러마. 내일도 아침 해가 뜨면 찾아오지. 어차피 나도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기는 했으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칼카타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런 우리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눈이 똘망똘망하고 키가 작은 게 볼 수록 귀엽군. 꼬마 수인 아가씨, 초코바는 좋아하나? 집에서 몇 개 챙겨 왔다. 먹고 싶을 때 먹어라."
칼카타는 자신을 바라보는 예린에게 간식거리가 담긴 가방을 건넸다.
"아,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주긴 하겠지만 노파심이 들어서 간단하게라도 네 상태에 대해 말해주고 가마. 지금 네 심장 속에 있는 어머니의 조각. 그것이 주는 힘에 너무 심취하지는 마라. 원래 한낱 인간이 품을 수 없는 것이니. 과하게 쓰면 쓸수록 네 몸에 무리가 갈 거다."
그 말을 남긴 채로 그는 어제처럼 와이어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