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4 - 264. 진실 혹은 거짓3 (3)
"이번에도 얌전히 돌아가네."
어제와 마찬가지로 와이어를 타고 이동하는 칼카타를 보며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그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는 듯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뭔가 편하게 가네요. 어제는 좀 힘들어 보였는데."
내 옆에 딱 붙어 서서 멀어지는 칼카타를 보고 있는 한세아.
그녀의 말처럼 이번에는 좀 더 편하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와이어에 걸린 도르래에 추가로 연결한 줄을 당겨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밑에 설치된 발판을 밟아 중심을 잡으면서 말이다.
거구가 중심을 제대로 잡아가며 이동하는 모습은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현우씨, 아까 저 남자 말 대로라면 푸른 불 쓰면 안 되는 거 아니예요?"
한세아가 어느새것리가 상당히 벌어진 칼카타에게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안 쓸 수가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위험하다고는 해도 살려면 써야죠."
"그렇긴 하지만···."
"무리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실제로 요 근래에는 그다지 무리한 적도 없고요. 과하게 쓰지 말라는 이야기겠죠."
나는 고개를 흔들며 얼버무렸다.
"현우씨가 그렇다고 한다면야···. 그런데 저 사람 진짜 외계인일까요? 현우씨 생각은 어때요? 솔직히 둘이 찍은 사진을 직접 보긴 했지만 뭔가 아직 믿기지 않는 느낌이라서···."
"나도 동감이야. 아니, 그렇잖아? 갑자기 외계인이라니. 진짜 외계인이면 사진 조작은 쉬운 편 아니겠어? 쓰읍! 예린아. 그거 일단 내려놔. 이상이 없는지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지수와 한세아는 칼카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가 진짜 외계에서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지수는 예린이 칼카타가 주고 간 간식 가방에 손을 대려고 하자 급하게 말렸다.
어떻게 몰래 하나 빼 가려던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고양이 귀가 가방을 향해 기울어진 모습은 예린이 가방에 관심이 아주 크다는 걸 알려주었다.
"글쎄요. 적어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목이 타는 느낌에 생수 한 병을 까서 마셨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러 노을빛으로 변한 풍경이 보였다. 하얀 안개는 주홍으로 물들어 있었다.
외벽이 내려앉은 건물들 사이를 비추는 노을과 그 아래에 일렁거리는 안개의 조합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 2연구소.'
사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한 연구소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증폭기, 지하 연구소, 세계수, 자연을 다루는 신, 신성한 힘, 검은 힘, 오염, 어머니의 조각, 안식, 다시 증폭기.
단어만 모아 놓고 보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현실과 동 떨어져 있는 용어들이었다. 현실이 아니라 폭발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나오는 게 어울렸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칼카타가 진실을 말했다는 가정하에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럼 그 사람은 화성에서 온 걸까요? 그, 졸린사가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세아 언니, 그건 아닐 것 같아요. 여기 지구에서도 화성이 어떤지 볼 수 있었잖아요. 카메라에 찍힌 화성은 그냥 황무지였던 걸요. 남산에 있는 거대한 나무 같은 건 찍히지도 않았고요. 게다가 자연을 마음대로 다룬다고 했는데 화성이 그런 모습일 리가······ 없지 않을까요? 아닌가? 오히려 그래서 그런 모습이어도 말이 되나?"
지수는 자기 생각을 이어서 말하다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표정이기도 했다.
"아, 모르겠다. 머리 아파. 자칭 신이든, 타칭 신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없애버릴건데. 제 2연구소만 가면 어느 정도 세상을 안전하게 바꿀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당장은 그것만 생각할래."
그녀는 팔다리를 쭉쭉 늘려 기지개를 쭉 켰다.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었으니 몸이 찌뿌둥해진 모양이다.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한세아도 얼추 혼자 결론을 내린 듯했다. 허나, 아직 이야기할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바로 내 상태에 관한 것.
"그리고 아저씨,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그때 아저씨 환자복 입고 있었잖아. 혹시 그 옷이 연구소 실험복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이 아저씨가 실험을 당했- 아니, 자원해서 했다고 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저씨 심장에 있는 것도 알아보던데."
간식을 향한 예린의 간절한 눈빛을 참다못한 지수가 가방을 검사하면서 물었다. 그녀는 가방을 탈탈 털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 냈다. 황금빛 포장지가 노을을 반사시켜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래,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칼카타는 내 심장에 조각이 들어 있는 걸 눈치챈 상태였어.'
그가 어머니의 조각이라고 말했던 것.
의왕시 캠프에서 만났던 엘트라도 동일하게 말했던 것.
아마 내 심장에 있는 조각은 3개로 나뉘었다던 어머니의 씨앗 중 하나이리라.
정확히는 누나가 내게 준 알약이 씨앗의 일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 누나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내게 그걸 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누나는 푸른 입자에 대한 적합성이 높았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지수가 말한 실험복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다. 그동안은 병원 근처에서 깨어났으니 그 병원 환자복인 줄 알고 있었건만. 지금 떠올려 봐도 생각나는 건 없었다.
단지 옷에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런 칼카타도 세계수가 왜 오염 됐는지는 몰랐고.'
세상이 이렇게 변하게 된 근복적인 이유, 대수림화를 시키고 있는 세계수가 폭주한 이유에는 칼카타도 모른다고 했다.
'내 누나가 어떻게 됐는지도 몰랐지.'
결국 제대로 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연구소로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칼카타가 외계에서 왔다고 해도, 남산에 뿌리를 내린 것이 지구의 사물이 아니라고 해도, 연구소가 지하에 있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우리의 발길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멈춰 있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우리 밥 먹어요! 배고파요!"
초코바 하나를 입에 물고 웅얼거리는 예린. 아이의 입가에는 녹은 초콜렛이 살짝 묻어 있었다.
"그래그래,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프긴 하겠네."
아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수, 한세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먹은 거라고는 아침에 먹은 캔 하나뿐이니 다들 배고플 만도 했다. 나도 그렇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나란히 앉아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다음에 보유한 장비를 간단하게 보수했다.
도끼에 묻은 체액을 닦고, 한세아의 총기를 분해해 부품 하나하나 닦고, 마지막으로 칫솔로 우리의 이도 닦았다. 치과도, 의사도 없는 상황에서 양치질은 중대 사항이었다.
할 일을 하나하나 마친 후, 마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때.
후-우웅
타워의 눈을 뜨게 만들었던 기묘한 파장이 우리 몸과 함께 잠든 도시를 훑고 지나갔다. 파장은 여전히 북쪽에서 펴졌지만, 전과 달리 도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잠식한 구역을 피해간 느낌이었다.
파장이 지나가자 잠시 경계 상태에 접어들었던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시간이 오래 지나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자 몸에 힘을 풀었다.
"이 파장이 뭔지 물어볼 걸 그랬어요···. 저 위에서부터 시작된 건 확실한데. 그리고 안개 때문에 그런지 전기 도는 소리가 안 들리네요. 여전히 괴물들 반응도 없구요."
"내일 같이 물어보면 됩니다. 어차피 다시 오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단은 마음 편히 쉬십쇼. 그동안 정신없이 움직였으니 쉴 때는 쉬는 게 좋습니다."
"······그걸 현우씨가 말해요? 현우씨나 푹 쉬어요. 어제 잠도 안 잤으면서. 오늘은 저랑 지수씨가 불침번 교대로 설 테니 현우씨는 그냥 쭉 자기만 하면 돼요."
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세아. 그녀는 이내 내 위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러면서 일어나지 못하게 손으로 상체를 지그시 눌렀다.
"맞아, 아저씨. 아저씨 덕분에 나는 제대로 쉬었으니까 오늘은 아저씨 차례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깨워줄게. 언제나 그랬듯이."
지수는 대자로 누워 자는 예린이 걷어찬 담요를 도로 덮어 주며 말했다.
아이는 무언가가 자기 몸을 덮자 발로 차 밀어냈다. 배를 긁적이는 걸 보아하니 조금 더운 모양이다.
어젯밤과 달리 오늘은 바람도 그다지 불지 않았다. 비가 온 뒤라 습도가 높다는 것만 빼면 자기에는 딱 좋은 기온이었다.
기껏 올려 준 담요가 무색할 정도로 바닥을 무참히 나뒹구는 광경에 순간 주먹을 꽉 쥔 지수. 그러나 이내 힘을 풀어 담요를 다시 덮어 주었다. 이번에는 아예 돌돌 말아버렸다.
아이는 답답한지 발버둥 치다가 포기했는지 축 늘어졌다. 대신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래. 고마워, 지수야. 세아씨, 그럼 먼저 자겠습니다."
나는 그런 지수와 예린을 보며 속으로 킥킥 웃었다. 그래도 그동안 쌓이기만 했던 의문이 조금은 풀린 덕분일까.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으나 속은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쿵 ···쿵 ···쿵
나는 내 심장 속 조각이 박동하는 걸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어젯밤을 지새운 탓에 수마는 순식간에 찾아왔다.
기묘한 파장이 훑고 지나가자 조각이 반응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내가 잠에 드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의식은 완전히 침잠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
[연구를 계속 진행하시오.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