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65화 (266/497)

Chapter 265 - 265. 누락된 기록 74번, 79번, 83번

누락된 기록 제 74번.

"연구를 계속 진행하시오, 박사."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직 그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모르잖습니까."

"상관없다네. 이계의 발견은, 정확히는 인간외종족의 발견은 콜롬버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업적이니. 이미 정부와 합의된 이야기일세. 하여튼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치들이라니까. 아무튼 자네는 그냥 그것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입자 기술을 뽑아 내기만 하면 돼."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 앞에 서 있는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가 어떤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정장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그들을 바라보니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로 보였다.

'······?'

머리를 웅웅 울리는 소리에 지수와 한세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줄 알았건만. 눈을 뜨니 정작 보이는 건 내가 처음 보는 장소에서 처음 보는 인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중 흰색 가운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누군지는 알 것 같다. 아니, 확실하게 알고 있다.

'···아저씨?'

그는 남은 가족이 다 죽고 혼자 남은 나를 거둬준 사람이었으니까. 허나 그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여전히 내가 무슨 상태인지 모르겠고, 아저씨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산소가 모자란 것처럼 가슴 가득 답답함이 느껴졌다.

시야도 고정된 것처럼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간혹 몸이 흔들릴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꼭 물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듯 귀에 먹먹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정신을 쉽사리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일단 보고서에는 그것들이 협조적으로 나온다고 써있는데, 맞나?"

"네, 적대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외 특이사항으로 지하에 새로이 내린 뿌리가 만든 '문'을 통해 신규 유입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난쟁이들이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의 손짓에 따르면 그들은 손재주가 좋다고 하는 것 같더군요."

손재주가 좋다는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린 정장 남자. 그의 웃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웃음 사이사이에는 그것들이 손재주가 좋아봤자 얼마냐 좋겠냐며 난쟁이들을 무시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저씨가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하고 나서야 웃음이 진정된 그는 중간에 끊긴 대화를 이어나갔다.

"흠. 언어가 다르니 말은 통하지 않겠고···. 다행히 협조적이라고는 하니, 한시라도 빨리 대화를 나눌 수준까지 언어 수준을 키우는 게 급선무겠어."

"생김새만 다를 뿐, 지능은 저희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제 팀원들이 그들을 케어 중이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들에게 우리의 언어를 알려주는 것만이 아닌 실제로 저희가 그들에게 역으로 배울 점도 분명 있습니다. 그들의 문화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돈이 되느냐, 다. 게다가 그것들 세상은 이미 망했다고 하지 않았나. 망해서 지구로 온 주제에 문화는 무슨. 인간도 아닌 것들이. 후우, 자네들은 그냥 세계수인가 하는 나무만 잘 키우면 된다네. 지금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만, 곧 목돈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건 그냥 돈다발이야. ···고작 탐사선이 이렇게 큰 행운으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혀를 차며 비웃는 정장 남성. 그는 이전 보고서들이 놓인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보고서에는 인간외종족들이 인간과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수필로 쓰인 그것은 작성자가 매우 흥분했는지 많이 흔들린 글씨체였다.

"······."

"아무튼 알았으니까 이제 나가 봐. 아, 지금 대화는 기록 하지 말게. 다른 이들과 그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도 나누지 마. 확실하게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자, 누나의 아버지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상자를 들어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그건 확실했다. 보여지는 시점이 내 눈이 아닌 그가 든 상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이건.'

내 심장 속 조각. 3개로 나눠진 어머니의 씨앗 중 하나가 품고 있는 기억이었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세 개가 아닌 두 개만 들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지하에 뿌리를 내린 나무로 발아했을 것이리라. 그런 직감이 들었다.

「날 풀어줘. 답답해. 숨 막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어. 나가고 싶어. 꺼내줘. 너무 늦기 전에 내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이 별로 올 생각은 없었어···. 중간에 금속 배가 문을 통과하지만 않았더라면···.」

혼란에서 벗어나 귀를 기울이니 조각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것의 목소리는 어린 것 같기도 했고, 늙은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건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속삭임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현재는 악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는 것일까.

「지하에 있는 건 성장시키면 안 되는데···. 그건 이미 오염 됐단 말이야···.」

씨앗이 말을 이을수록 그것의 중얼거림에는 절망감이 점점 깃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급류에 휩쓸리는 것처럼 물살을 타고 흐르기만 할 수 있을 뿐.

그리고 이건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뭘 한다고 해도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겠지.

결국, 나는 움직여지지도 않는 시야를 통해 재생되는 영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가득 찬 혼란을 어찌할 바 모르는 채.

***

누락된 기록 제 79번.

눈을 깜빡이니 장소는 전혀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각종 실험 장비가 즐비한 걸 보니 연구소 내부인 듯했다.

'······어?'

나는 시야에 들어온 장면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실제로 눈이 떠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게, 이번에는 내가 보였으니까.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상자 안에 담겨 있던 씨앗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왜 그렇게 행동했니? ···현우야."

"어···, 모르겠어요. ······내가 왜 그랬지?"

특수 제작된 유리 벽 안에 격리된 것처럼 나와 누나의 아버지. 그들은 내가 보지 못한 어떤 실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그런 행동을 하면 너는 물론이고, 너를 도와주려던 내 팀원도 크게 다쳤을 거란다. 네가 자원해서 실험에 동참시키기는 했지만, 이렇게 돌발 행동을 한다면 내 딸이 널 많이 걱정할 거다. 아니, 이미 한차례 난동 피우는 걸 간신히 말렸지. 때마침 근처에 있던 칼카타가 아니었으면 중요한 일지가 모조리 사라질 뻔했어. 그게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너도 알고 있잖니."

"죄송해요."

"푸른 입자와 검은 입자가 서로 충돌하고 있을 때, 거기에 왜 손을 집어넣으려고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불안함을 느끼는 듯 손가락 사이에 끼운 볼펜을 계속해서 딸깍거렸다. 그러다가 메모장에 무언가를 마구 휘갈기기도 했다.

「어차피 죽지 않으니까. 죽어도 상관없고.」

"어차피 죽지 않으니까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여전히 멍한 얼굴인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툭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달라진 목소리가 격리실 내부를 울린다.

누나의 아버지는 내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움직여 내 손에 들린 씨앗과 분리시켰다.

"···아저씨,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눈이 멍한 상태에서 점차 초점이 잡히기 시작한 나는 두통이 이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물었다.

"이제 그만 쉬는 게 좋겠구나. 마침 내 딸도 퇴근할 시간이니 둘이 같이 가면 되겠어. 자, 어서 가렴."

아저씨는 씨앗을 다시 상자 안에 보관한 다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 물음에 답해주지 않고서.

그는 내가 격리된 방 밖으로 얌전히 나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항상 품에 넣고 다니던 녹음기를 꺼냈다.

-딸깍

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동시에 그는 메모장에 쓰인 내용들을 소리내어 읽었다. 메모장 안에는 여러 정보가 담긴 글이 마구잡이로 써져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정보를 기록한 흔적이었다.

- 기록 제 79번: ···상황 판단 능력 결여, 미묘한 행동, 어긋난 사고. 허나, 그것들은 대체로 적합자가 생각하기에 선의인 쪽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도덕적 선을 넘는 행위에는 심각한 거부감을 보인다.

극단적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올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지 그 행위가 그 순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선인지 아닌지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처럼.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누군가가 다치는 일이 있어도 조금 빙 돌아가는 방법을 택한다면 자신이 다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콜록!

이계인들이 신성한 힘이라고 부르는 푸른 입자. 그것은 사람의 머리.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직접적으로 말이다. 꼭 바이러스가 숙주에 기생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입자는 그런 것으로 정의될 수 없어.

감각 강화, 정신력 향상, 육체 기능 개선. 푸른 입자가 인간에게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검은 입자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 방향성이 인간이 원하는 방향이 아닐 따름이지. 검은 입자에 노출된 생물들은 하나 같이 기괴하게 변했지만, 푸른 입자가 주는 강화 효과와 동일한 효과가 적용되는 것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래, 단지 외형만 다를 뿐이야. 콜록!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 부분은 지워야겠어.

또한 푸른 입자 보유자들끼리는 서로에게서 뿜어지는 파장을 공유한다. 그렇게 파장을 공유하면 서로의 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게 확실하다. 그건 이미 이계인들에 의해 검증된 사실이고, 일관적으로 그런 양상이지만, 아직 수집된 자료가 모자라다. 적합자의 샘플이 너무 적은 탓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씨앗과 동기화를 시도했던 내 딸과 현우가 서로 이끌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까. 아니, 이건 아니야. 이 부분도 나중에 잘라 내야겠군. 큭. 콜록!

잔뜩 탁해진 목소리로 간신히 기록을 이어 나가던 그는 잠시 녹음을 중단하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시 녹음을 시작했다.

79번 기록에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 선에 가깝게 행동한다는 건 얼핏 좋게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물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을 이어나가게 만든다. 생을 향한 욕구에는 마찬가지로 이기심이 기저에 깔려 있다. 배려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남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마냥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어찌 되었든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만들어지면서 비틀리고, 어긋나게 된다는 말이니까.

아무튼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과 동시에 신체 구조를 변형시키는 입자들은 취급을 좀 더 조심히 접근해야 할 듯싶다.

그래도 검은 입자는···. 콜록! 콜록! 조금 더 살펴봐야겠다. 그건 특히나 샘플이 더 적으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누가 더 죽겠지만, 나를 이해해 줄 거다. 이건 지구를 위한 일이니까.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못해···. 콜록! ······기록 종료.

딸깍-

격리실에서 홀로 남은 채 사색에 잠긴 누나의 아버지.

<···푸른 입자로 신체 강화··· 그에 따른 부작용··· 일정 이상의 강화는 감각 차단과 어지러움증을 유발··· 동기화 시도시 겪는 환각과 환청···실험체 기억 오류 발생···동식물과 검은 입자의 결합 23차 시도 실패···원인 미상의 오류로 의한 증폭기 제작 대폭 지연···담당 현장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요구······>

그는 책상 한 켠에 놓인 보고서를 하나씩 정리하면서 읽어 내렸다.

그리고 씨앗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콜록! 콜록!"

격한 기침을 토해내고 있는 그를,

아무 말 없이,

묘한 시선으로.

***

누락된 기록 제 83번.

"갑작스럽겠지만 연구를 중단하시오. 이건 이미 위에서 최종 결정된 사안이야."

연구 중단.

그건 다름이 아닌 실험의 폐기를 뜻했다.

그리고 실험의 폐기란, 그와 관련된 것들을 지운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졸린사에서는 그렇게 정해진 용어였다.

「······뭐?」

"뭐라고요?!"

"내가 아니,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 저것은 너무 위험해. 인간외종족들은 우리가 어찌 통제할 수 있었지만, 현재 기술력으로 해명할 수 없는 미지의 에너지는 너무 위험하다. 통제 불가능이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면 폐기하는 것이 옳아. 시체도 그만 치우고 싶고."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니 바뀐 장면. 이번에는 첫 장면과 비슷한 구도였으나 그 양상은 정반대였다.

처음에 연구를 강행하라던 정장 남성은 이제 연구를 멈추라는 말을 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박사가 연구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할 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책상을 탕 치며 반발하는 누나의 아버지. 그는 기침을 막기 위함인 듯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자네도 보지 않았나? 검은 입자가 그걸 연구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푸른 입자는 그나마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래도 안 돼. 이 이상 연구를 지속하면 은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말 거다.

정부 쪽 압박도 심해졌고, 무엇보다 미국이 냄새를 맡았어. 그쪽에서 큰 관심을 보이더군. 어차피 일개 기업이 다루기에는 너무 큰 사안이기도 했으니, 이참에 넘기기로 했다.

"

"이제 와서요? 이미 전국에 이계의 나무가 심어졌습니다. 그건 다 어떻게 할 겁니까? 게다가 이계인들이 신이라 부르는 존재는? 그것이 진노하면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건 유령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라고요. 적합도가 높은 인물만 더 찾는다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요!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그것과 직접 소통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 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고작 나무를 보며 신이라 칭송하는 것도 어이가 없군. 아무래도 외계인들과 지내다 보니 그것들에게 단단히 물든 모양이야. 지식을 알려주는 것도 적당히, 친분도 적당히, 다 적당한 수준으로만 유지하라는 내 말이 그렇게 어려웠나?"

정장 남성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또 적합자가 어디에 있고, 누구인 줄 알고? 전 세계에 광고라도 때릴 셈인가? 그리고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본데, 몇 달 전에 자네가 연구소 출입 허가를 내준 사람.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아서 그 청년에 대해서 좀 알아봤지.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잃은 아이를 데려가 키운 모양이로군."

정장 남성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는 눈이 붉게 충혈된 상태인 누나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딱한 아이입니다."

무언가를 꾹 억누르며 간신히 답하는 아저씨는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집에는 언제 들어간 건지 모를 정도로 탁한 금발 머리에는 기름이 잔뜩 떡이 진 상태였다. 흰색 가운도 황색으로 바뀌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아이를 자네가 이용하고 있고 말일세."

"이용이 아니예요! 이건 엄밀히 따지면 진화라고요! 그 아이는 이기적인 인간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날 겁니다! 어찌 보면 진화의 발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본인 스스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한가? 우리 목적이 언제부터 신인류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유였지? 우리 회사는 그냥 더러워진 지구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좋은 이미지 좀 챙기고, 그 과정에서 나는 돈을 좀 벌고. 그렇게만 하면 충분해. 뭐, 이제는 다 물 건너간 이야기지만."

"······."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로 기억을 잃었어도 말인가? 공식적인 실험이 딱 한 번뿐인건 나도 알아. 그 뒤로 자네가 개인적으로 그 청년과 따로 시간을 수차례 가졌다는 것도 알지. 그래, 이번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기억을 잃었다고 하던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가 있기는 하던가? 응? 사실 그 아이가 부모를 잃게 된 것도━"

"그만!!"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화를 참고 있던 아저씨가 소리쳤다. 대화가 이루어진 지는 고작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그는 매우 피곤한 얼굴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가 진전될 것 같진 않으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제 2연구소에서 검사 하나 받고 가게. 아무래도 검은 입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또 시체 치우기는 싫거든."

미쳤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정장 남자.

"······특이성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허, 그럼 지금까지 내뱉은 말들이 전부 제정신인 상태에서 내뱉은 거라니 그것도 참 웃기는군. 자넨 미쳤어.

그런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걸세. 날이 지나는 00시 이후부터 모든 실험은 중단될 것이고,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거야.

이미 우리 손에서 벗어난 일이다. 명심해라. 그리고 이제 집에 좀 들어가. 가서 제발 좀! 씻고, 잠 좀 자게. 명색이 박사라는 자가 꼴이 그게 무언가? 이미지! 내가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누누이 말했건만.

"

정장 남성은 아저씨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는 어서 나가라는 손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가 보겠습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누나의 아버지는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섰다.

쾅!

문 주변에 놓인 물건들이 떨릴 정도로 강하게 닫힌 문은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대신 알려주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힘이 강한 것 같기도 했다.

"쯧. 사람 성질머리 하고는. 아쉬워도 어쩌겠나. 이미 위에서 결정된 사안인데. 그래도 미국이 기술을 사기로 했으니 돈 하나는 두둑이 받겠군."

정장 남성은 책상 한 켠에 끈으로 묶인 보고서 뭉치를 집어 들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도 연구가 중단되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곧 받을 돈 생각에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청년의 상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책임 전가용. 중요한 건 수중에 들어올 돈다발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만 여럿이다. 돌이키기에도 늦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 하나 더 잘못 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처리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사실이 귀찮기만 했을 뿐.

기이잉- 촤자자작-

그는 이내 보고서를 파쇄기에 하나씩 넣어 처리하기 시작했다.

촤자자작-

보고서들이 허무하게 갈려나간다.

그는 이제는 필요 없어진 종이 뭉치들을 처리하면서 무심코 지하에 있는 그것들을 떠올렸다.

마치 지금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종이들이 곧 그것들에게 닥칠 미래 같은 느낌이 들었던 까닭이다.

촤자자작-!

허나, 그러한 느낌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파쇄기에 넣는 종이의 양을 늘려나갈뿐.

「그럼 내 아이들은···? 내 세계는? 우리의 별은···? ······안 돼. 약속했잖아. 살아갈 터전을 나눠주기로···. 하다못해 황무지 별로 다시 되돌려 보내준다고 했었잖아···. 역시 너희들은···.」

누나의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상자 속 씨앗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분리된 씨앗 중 하나가 지구에 뿌리를 내린 이상 그것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본디 하나였던 그것은 3개로 분리된 상태였어도 여전히 서로 이어져 공명하는 중이었으니까. 검은 입자에 오염된 자기 분신체마저도 말이다.

여태까지는 멀쩡한 나머지 2개의 조각으로 하나를 억누르고 있었으나, 성장하지 못한 씨앗과 이미 나무로 발아한 씨앗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

이미 제어권을 절반 이상 빼앗긴 상황이기도 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결국 오염된 분신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폭주하고 말겠지.

그건 지구의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무를 신으로 모시는 이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연구소에 갇혀 바깥으로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뒤로 영상은 더 이상 재생되지 않았다.

언제나 과거를 지켜보던 씨앗이 눈을 돌려 나를 바라봤던 까닭이다.

내 혼을 꿰뚫는 듯한 시선,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너. 배신자. 나를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만 아니었다면. 고작 힘 조금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내 기억을, 나를 함부로 엿보지 마. 인간 주제에. 다 죽어 버려! 이 별은 이제 내 거야···!」

뚝뚝 끊기는 속삭임에 악의가 가득 담기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바깥으로 튕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시야가 길게 늘어나는 모습은 비디오 테이프 끈이 억지로 늘려져 망가진 영상이 재생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뒤로 확 밀려나다가,

"허억···!"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으레 그렇듯이 나는 급격하게 추락하는 감각을 받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몸을 급하게 일으키는 건 덤이었다.

"현우씨! 괜찮아요? 세상에, 무슨 땀을 이렇게···."

그리고 수건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있던 한세아가 보였다.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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