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7 - 267. 안개 (2)
"나 왔다."
아침 해가 뜬 후, 찾아온 칼카타가 나, 지수, 예린, 한세아를 보며 한 말이었다. 그의 등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방 하나가 매여 있었다.
"······꼭 퇴근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말하시네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고작 몇 번 보았을 뿐인데 연달아서 봤기 때문일까. 이제 그의 얼굴은 친숙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근육만큼은 여전히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퇴근보다는 출근이지. 이현우, 잠은 잘 잤나?"
"어···, 예. 잘 잤죠."
"그래, 어제보다는 얼굴이 확실히 나아 보이는군.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어제는 그냥 비루먹은 망아지였어."
"······."
그렇게까지 심했나 하는 생각에 순간 내 말문이 막혔다.
칼카타가 너스레를 떨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오늘의 해가 떴으니 오늘의 이야기도 해 줘야겠지. 이거야 원, 아침부터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니 벌써 숨이 턱턱 막히는구만."
"그 전에 먼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후우, 어제 칼카타가 떠난 후에 저희들끼리 생각을 좀 해봤는데, 하나 못 들은 게 있더라고요."
"뭔가?"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가 세계수라는 나무가 폭주했기 때문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칼카타, 당신은 왜 지구에 왔습니까? 뿌리를 타고 왔다고 말했었잖아요. 또 수는 얼마나 되고요?"
나는 어제 일행과 나누었던 대화를 머릿속으로 상기하며 물었다.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자의인가, 타의인가하는 이런 질문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허나,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도 그럴게, 칼카타가 보여 주었던 사진에는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생사 유무를 모른다 하더라도 사진에 찍힌 수만 어림잡아도 스무 명은 가뿐하게 넘었었다. 그 작은 사진에만 해도 그 정도이건만. 실제 인원 수는 더 많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흠, 어차피 오늘 말해 줄 이야기에 포함된 내용이니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다만 나도 아는 게 많이 없다는 건 알아 둬라. 내가 아는 사실은 진실과 다를 수도 있어."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일단 아는 거라도 말해주십쇼."
칼카타가 하는 말을 당연히 전부 믿지는 않는다. 정확히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가 더 옳은 표현이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필터를 한차례 거쳐 듣고 있는 참이었다.
"···우리가 이 지구라는 별에 온 건 자의이기도하고, 타의이기도 하다."
칼카타는 표정을 진중하게 바꾸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는 한세아. 애매한 말에 얼굴이 구겨진 건 나와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고향이 사악에 의해 멸망했고, 겨우 살아남은 소수의 동족만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를 타고 올 수 있었지. 여기까지는 자의. 하지만 원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어."
"지구가 목적지가 아니었다니···."
"우리가 처음 이동하기 전에 정한 규칙 중 첫 번째. 새로운 고향으로 만들 별에 그 어떤 문명도 존재하지 않을 것. 규칙을 더 말할 것도 없이 지구는 첫 번째 규칙부터 위배되지 않은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이곳에 온 건 우리 의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타의다."
"······."
"게다가 이주할 별을 관측했을 때만 해도 이런 푸른 별이 아니라 황무지만 존재하던 별이었다. 그곳의 환경은 열악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어머니 나무가 먼저 환경을 조성해 놓을 테니까. 헌데 도착하고 보니 여기더군. 참 당황스러운 일이었지."
"황무지면···. 설마."
팔짱을 낀 지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한 모양이다.
화성.
칼카타는 지금 화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확실했다.
애초에 지구의 졸린사가 외부에서 온 칼카타와의 연결고리라고 한다면 그 중간 지점인 화성밖에 답이 없지 않나. 더 나아가면 화성보다는 거길 들렀던 탐사선이겠지.
뜬금없이 운석을 타고 내려온 것도 아니니 말이다.
바로 그때.
"저기··· 아저씨? 음···, 외계인님?"
어느 정도 잠에서 깬 예린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는 호기심이 깃든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냥 칼카타 라고 불러라. 꼬마 수인 아가씨."
"네, 칼카타! 저도 그냥 예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근데 뿌리를 타고 왔다고 했었잖아요. 그거 어떻게 탔어요? 나도 타보고 싶은데···!"
"그건 어제 스치듯 말했던 순환과 관련된 이야기지. 아래로 뻗는 세계수의 뿌리, 위로 뻗는 세계수의 가지.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뿌리와 가지는 서로 출입구 역할을 하는 통로라고 보면 된다. 일정 수준의 성장을 마친 세계수는 다른 별에 있는 세계수와 교감을 할 수 있고."
그는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뿌리는 더 이상 기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뿌리를 탈 수 없다는 칼카타의 말에 흥미가 팍 식은 얼굴이 된 예린이었다. 아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잠깐만요! 그럼 지금은 칼카타 고향하고 연결된 게 아니란 건가요? 아니, 당신은 이미 넘어왔잖아요?"
한세아가 심통이 난 예린에게 사탕 하나 물려주며 재차 물었다.
"그래,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그래서 시간이 없고, 큰일이라는 거다. 현재는 무슨 이유인지 성장을 멈춘 상태지만 여기서 더 성장하게 되면 우리의 고향에 다시 연결될 테니. 내 고향을 망하게 한 주범인 검은 힘이 뿌리를 타고 넘어오게 되면 돌이킬 수 없다. 이 지구도 완전히 끝장이란 말이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정도가 아니야."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심각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듣게 되니 꽉 막혀 있던 의문은 점차 해결되는 중이었으나, 이미 의문이 의문을 품고 가지를 멀리 뻗친 상황이었다.
하나의 의문을 해결하면 연이어 관련된 의문이 떠오르는 까닭에 속이 답답했다.
더불어 지구가, 정확히는 지구의 인간이 회생 가능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막막함을 느끼게 하는데 한몫 단단히 차지하고 있었다.
"······."
"······."
어느새 우리가 있는 건물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다들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진 듯했다.
'하, 언제나 이런 식이지. 언제나 상황이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어.'
속으로 원망하는 소리를 내뱉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원망을 내뱉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괜히 에너지만 낭비하는 셈이다.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칼카타 덕분에 얼추 돌아가는 상황은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다고 했으니 지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낫겠네요. 지수야, 세아씨, 예린아. 짐 챙겨. 가자."
나는 그녀들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수, 예린, 한세아는 곧장 일어나 새벽에 대강 정리해 놓았던 짐들을 마저 챙기기 시작했다. 새벽에 미리 이야기가 된 사안이기에 그녀들은 망설이지 않고 내 말에 따랐다.
"···응? 어딜 간다는 건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칼카타가 다짜고짜 벌어진 일에 눈을 끔뻑끔뻑 떴다.
"평생 여기서 살 것도 아닌데 이제 가야죠. 칼카타가 아직 해주지 못한 이야기는 가면서 들을 게요. 그리고 아내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서요? 그것도 겸사겸사 도와줄 겸 움직이려고요."
"그러면 고맙긴 하다만······. 지금 바로 가는 건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큰 체구에 답지 않게 순박한 눈이었다.
"네. 지금 바로요."
"어쩐지 오늘 점괘가 좋더라니. 지금 출발하면 여유 있게 도착하겠어. 아내도 좋아하겠고. 오늘인 걸 알았다면 미리 말해 두고 왔을 텐데. 그게 좀 아쉽군."
현재 시각은 대략 정오를 막 벗어났을 쯤일 듯했다. 해가 하늘에서 가장 높게 떠 있으니 얼추 맞겠지.
그가 머무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끝나기에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으니.
"그런데 이동은 어떻게 할 건가? 따로 생각해 둔 방법이 있나?"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칼카타가 물었다.
"그게 문젭니다. 이제 안개를 지나가는 게 문제예요. 칼카타, 이 안개 정확히 뭐 때문에 위험한 겁니까? 푸른 입자를 못 쓰게 만드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나는 임시로 설치한 바람막이를 해체하며 짙은 안개가 깔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소독차가 뿌리는 연막 같은 안개가 온갖 사물을 가리고 있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잠을 자게 만든다."
"예?"
"잠을 자게 만든다고 했다. 그것이 신성한 힘이든, 움직이는 괴물이든, 전부 말이다. 한번 잠이 들면 다시는 깨지 못해. 내가 위험하다고 한 건 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괴물들 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각 안의 입자가 비활성화 되었던 건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넝쿨도 크게 자라지 못한 것이 이해가 갔다.
성장을 방해하는 수준이 아닌 아예 발아를 하지 못하게 막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동은···.'
본래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한세아가 펼친 날개로 활강하며 옆 건물로 이동하는 것이 계획.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그녀가 날개를 펴보려고 한순간부터 계획은 폐지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날개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거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한세아 본인도 불안 하다고 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강행할 수 없는 노릇. 가다가 중간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정말로 답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안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하얀 가루다. 내 예상이 맞다면 꽃가루일 것이다. 최근 들어 그것이 뭔지 짐작 가기 시작했거든. 너와 네 여자들은 그 영향에서 잠시간은 버틸 수 있겠으나, 그것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군."
"추측은 가면서 말해주시고, 일단 그 하얀 가루를 들이키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까?"
안개를 만든 것이 습기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서 지냈던 이틀간 우리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었으니까.
"몸에 닿는 것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칠 거다. 다만, 그 효과는 상대적으로 미약하긴 하지."
이어지는 칼카타의 말에 확신이 굳어졌다.
"세아씨, 예비군 훈련장에서 가져온 방독면 있죠?"
"네, 넉넉해요."
"임시방편으로 방독면 쓰고 갑시다. 정화통이 조금이라도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완전히 막진 못하겠지만, 최대한 호흡기를 보호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산소통이 있는 것도 아니니, 현재로서 최선의 방법은 방독면을 쓰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몸이 회복된 지금은 안개가 주는 영향으로부터 좀 더 버틸 수 있으리라.
푸른 입자를 이능 사용이 아닌 몸을 보호하는 쪽으로 사용하면 그 시각은 더 늘어나겠지.
저번에 푸른 입자가 빠르게 소모된 것은 한세아의 날개를 억지로 유지시키려고 그랬던 까닭이 제일 컸다.
바로 그때.
"칼카타, 그쪽이 타고 온 와이어 같은 구조물 또 없어요? 그거 설치한 것처럼 반대로 방향만 바꾸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안개를 영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보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길게 늘어진 짚라인 와이어와 건너편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당장 나부터 편하게 이용하고 있었겠지. 와이어가 단순하게 보여도 나름 부식 방지를 위한 특수 처리된 물건이라 지금은 만들 수가 없다. 구할 수도 없고. 게다가 와이어가 있다고 해도 그걸 고정시킬 수 있는 장비 또한 없어."
그렇긴 하다. 결국 밀폐된 공간이 아닌 이상 외부에 놓인 물건들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검은 입자에 의해 부식되기 마련이니.
마찬가지로 그의 말처럼 단순히 못만 박아 넣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도 했다.
"칫. 쉽게 풀리는 일이 없네."
결국 비교적 안전하고 편하게 가는 방법은 없다는 말에 아쉬운 듯 혀를 차는 지수. 그녀는 마저 짐을 챙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나도 지수와 같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칼카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 명씩 와이어를 타고 역으로 올라갈 생각도 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라는 판단이 섰다.
지상과 거리가 그리 가깝지도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대처하기가 쉽지 않지 않은가. 까딱 잘못하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질 위험도 있었다.
그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우리 손에 들린 것이 너무 많았다.
"칼카타도 방독면 드릴게요. 같이 써요."
한세아는 가방에서 꺼낸 방독면 세트를 그에게 건넸다. 우리 모두가 쓰고 남을 정도로 수량이 넉넉한 방독면. 누군 쓰고 누군 쓰지 못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대전사는 그런 것 따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와이어를 타는 대신 안개를 헤쳐 나갈 모양인데, 내가 앞장 설 테니 천천히 따라와라. 여기서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할 거야."
짐짓 엄숙하게 말하는 칼카타. 그는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한세아가 건넨 방독면을 밀어낸 채.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있겠나. 우리라도 써야지.
쓸 수 있는 물건이 있는데 쓰지 않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후욱···."
우리는 각자 방독면을 착용한 후에 제대로 씌워졌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다행히 하자 있는 제품이 아닌 듯 렌즈에 서렸던 김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착!
머리끈도 제대로 조여 빈틈을 없앴다. 고무 마스크가 잡아당겨지며 압박감이 느껴진다.
저벅- 저벅-
준비가 끝나는 대로 한 명씩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일행. 계단 곳곳이 무너진 터라 한 명씩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
안개가 깔린 구역으로 발을 집어넣는 그녀들을 보며 뒤늦게 엘트라 이야기를 칼카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연구소를 알고 있던 걸 보니 분명 서로 어떠한 연결 고리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정신이 없어지는 이야기만 하도 듣다 보니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지금은 이동하는 게 우선이야. 이야기는 시간 날 때 해주면 되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내게 얼른 오라며 손짓을 하는 지수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훅
안개로 위장해 있는 미세한 하얀 가루가 다리를 타고 스멀스멀 지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
안개로 뒤덮인 구역.
폐허로 변한 아파트 7층에서 한층 내려간 6층.
"콜록콜록콜록!"
"···자, 여기요. 고집 부리지 말고 방독면이나 써요, 칼카타."
나는 기침을 참지 못하는 칼카타에게 여분의 방독면을 건넸다. 지수, 예린, 한세아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칼카타는 말없이 방독면을 머리에 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