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8 - 268. 안개 (3)
"······."
"······."
나, 지수, 예린, 한세아와 칼카타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기침을 하도 하던 칼카타가 방독면을 쓴 뒤부터 이러했다.
처음에는 방독면이 필요 없다고 말한 칼카타. 나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가 무슨 방도가 있겠거니 해서 더 권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보니 그냥 단순한 고집이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상당히 흘러 멀리 이동한 거면 많이 힘든가 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 근데 고작 원래 있던 층인 7층에서 한층 내려온 6층에서부터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그저 코웃음만 나왔다.
'외계인이라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더니.'
다르기는커녕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허점이 많은 사람이다. 칼카타 본인은 외계에서 왔다고는 하나, 내가 보기에는 영락없는 사람이었다.
우리 말을 할 줄 알며, 서로 대화가 통하고, 지성과 배려가 있었으니까.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인간성이 있었다. 분노, 살의, 식욕만 남아 있는 괴물들과 달리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건 생김새뿐이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대전사는 무슨."
용케 어금니를 포함한 얼굴 전체를 방독면으로 가린 칼카타를 보며 웃음을 구태여 참지 않은 지수. 그녀가 킥킥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은 방독면에 막혀 둔탁하게 들렸으나,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크흠! 요즘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자, 어서 가지. 갈 길이 멀다. 아니, 멀진 않지만 아무튼 이제 가자. 내가 앞장서겠다."
칼카타는 괜스레 헛기침을 내뱉었다. 지금 상황이 많이 민망한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어금니를 긁적거리려던 그는 손이 방독면에 막히자 이내 근육을 꿈틀거리며 계단을 한 칸씩 조심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보고 웃는 건 이제 그만해야 할 듯싶었다. 그도 그럴게, 칼카타는 굳이 우리를 따라 안개 속을 이동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에게 길 안내를 해주기 위해 기꺼이 안개로 들어온 것이 아니던가.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신중하게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지막으로 잠깐 웃다가 뒤따라 움직였다.
현재 우리가 있는 층은 6층. 계단이 있는 비상구 한쪽 벽면에 절반 이상 벗겨진 페인트칠이 숫자를 간신히 알려주고 있었다.
금이 쩍쩍 갈라진 계단, 하얀 분진으로 범벅된 철제 난간, 안개가 가득 찬 내부, 눈처럼 소복이 하얀 가루가 쌓인 계단참,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밀려나는 안개.
아파트 계단은 좋은 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가뜩이나 시야가 방독면의 렌즈로 제한되어 있건만. 건물 내부까지 침식한 안개로 인해 움직임이 더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보유한 푸른 입자의 양이 충분하고, 호흡기를 방독면으로 보호한 덕분에 아직까진 여유롭다는 것일까.
저벅- 저벅-
천천히 한 발을 아래로 내려 디딤바닥에 발을 올리는 일행들. 그들의 표정은 방독면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바싹 굳어 있는 몸이 그들이 매우 신중한 표정일 것이라는 걸 대신 알려주었다.
탁-
내딛는 발에 눈이 밀려나는 것처럼 훅 밀려나 자리를 비키는 하얀 가루가 보인다. 제일 선두인 칼카타의 신발 모양으로 밀려난 그것은 이내 뒤따라 움직이는 지수, 예린, 한세아, 나 순으로 모양을 이리저리 바꿔 댔다.
"칼카타, 여기서 얼마나 지냈던 겁니까?"
나는 정화통 주위에 내려앉은 가루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너무 조용해서 귀에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던 까닭이다. 적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말하면서 가야 정신을 놓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고작 계단만 내려가고 있을 뿐인데, 하얀 가루들이 전신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것들도 털어내고 싶었으나 털자 마자 바로 다시 달라붙었기 때문에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아직 건물도 빠져나가지 못했으니 에너지를 아껴야 하기도 하고.
"글쎄. 이제 5개월쯤 되었을 거다."
"···5개월? 그 정도면 거의 처음부터 있었다는 말 아니예요?"
"거의 그렇지."
"그럼 그때도 이런 안개가 있었나요?"
숨을 천천히 내쉬고만 있던 한세아가 불쑥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지수도 고개를 들어 칼카타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지도 모르겠군. 내가 연구소에서 나와 동료들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고 있을 때 안개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칼카타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리도 아니었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 흔들리는 지축, 막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퍼지는 안개. 그것들이 만드는 혼란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
우리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가 덤덤하게 이어 나가는 이야기의 내용 탓도 있지만, 스치듯 지나간 그의 동료들 이야기가 입을 꾹 다물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여기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 나와 내 아내를 제외한다면.'
예전에 칼카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방금 칼카타가 말한 그의 동료는 현재 살아 있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연구소에서 왜 나왔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여태까지 들은 내용은 연구소가 중요하다는 거였잖아요. 그럼 거길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예요?"
한숨을 작게 쉬며 묻는 지수. 그녀의 꼬리는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외부로 유출된 어머니의 조각. 지금 이현우 네 심장 속에 있는 조각을 찾기 위함이었지. 그게 없으면 오염된 세계수를 억제할 방법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동료가 하나 둘씩 쓰러지고, 일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연구소는 봉쇄되어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나는 이현우 너와 네 누나가 봉쇄 절차를 밟은 줄 알았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지. 내가 찾던 조각이 어째서 이현우에게 있는지 모른다. 기억을 잃었으니 너도 모를 것이고. 연구소는 누가 봉쇄했는지도 모르지. 아마 네 누나일 가능성이 크다. ···허나, 그것도 결국엔 추측일 뿐."
"어···, 죄송합니다."
듣기만 해도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었다는 생각에 무심코 사과를 내뱉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트라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껄끄러웠다. 원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고 했었는데.
"왜 네가 사과를 하나. 너도 피해자일 뿐이거늘. 사과는 오히려 내가 해야지. ······우리 탓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조각을 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지만, 나는 눈앞의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최선을 다 했으나 결과는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아직도 내가, 우리가 구하지 못해 덧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의 비명이 생생하게 들린다. 기껏 구한 사람들도 안개에 잡아 먹히기까지 했지. 나는 결국 아무도 구할 수 없었어.
"
무거운 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에 비상구는 다시 한번 어색한 분위기가 점령했다.
칼카타가 여길 떠나지 않은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미련이겠지.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주박은 미련말고는 흔치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여기 남았다. 여기 남아서 안개를 만들어 내는 걸 찾아다녔다. 그걸 없애지 않는다면 내 동료들도,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편하게 잠들지 못할 테니까. 안개가 행하는 건 안식이 아니야. 고통이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내 생각은 더 굳어졌다.
"칼카타 고향에서도 이런 안개는 없었어요?"
"그래, 이런 건 내 고향에서도 본 적이 없어. 덕분에 진원지를 추정하는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지. 하지만 이제 곧이다. 멀지 않은 안개 속 어딘가에 이 가루를 흩뿌리는 꽃이 있다는 걸 알아냈거든. 내 관찰과 점괘로 말이야."
"···그 점괘, 믿을 만한 거 맞아요?"
솔직히 칼카타가 점괘라는 단어를 꺼낼 때마다 그것이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 진담으로 하는 말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방독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특히 더욱 그러했다.
"그 점괘로 너희들이 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않았나. 아니면 지금 내 점괘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요···."
나는 말꼬리를 늘려 답했다. 저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자칭 대전사란 사람이 뭔가 좀 쪼잔하게 들리는 점괘를 운운하니 어색하지 않은가.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기 까지 하니 그 괴리감은 한층 더 크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자, 다들 잡담은 이제 그만 해요. 밑에 다 내려왔어요."
한세아가 철제 난간을 톡톡 두드리며 이목을 끌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뻥 뚫린 공동 현관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흡사 겨울이 온 것처럼 하얀 세상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이윽고.
"서로 놓치지 않게 조심해라. 천천히 이동하긴 할 터이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방독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까딱 잘못하면 바로 잠이 들고 말 테니."
칼카타의 염려 섞인 말을 끝으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각자 손을 붙잡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빠드득- 빠각-
그렇게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들을 밟으며 우리는 드디어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6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은 실제로 그다지 길지 않았으나, 체감상 상당히 길게 느껴졌던 까닭에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탁!
바깥으로 나오니, 눈에 보이는 건 한 치 앞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오직, 안개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