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9 - 269. 안개 (4)
"···이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려와서 보니까 뭔가 막막하네. 꼭 정신 병동에 온 것 같아. 그리고 가시거리가 1m도 안 되는데···. 칼카타, 이런 시야에서 길 찾을 수 있어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연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괜히 가루가 휘날리지 않게 꼬리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눈이 아니라 하얀 분말일 뿐인데, 꼬리는 눈으로 인식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여기서 얼마나 지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만큼 여기 지리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다. 그러니 나만 따라와라. 이쪽이다."
칼카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비록 방독면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어금니 쪽 방독면이 움직인 것으로 그렇게 추정한 것이다.
그는 다행히 이 안개 구역에서 지냈던 것이 영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닌 듯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단지 괜한 고집으로 인한 추태를 보인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약간 신뢰도가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칼카타가 여기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건 모두 이견이 없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렌즈를 가리는 가루를 털어내며 천천히 걷고 있는 칼카타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훅···, 후욱···."
방독면이 내는 숨소리가 좀 더 커졌다. 주변이 전부 분말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가루가 정화통에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방진 전용 필터가 아니라 그런 것 같았다.
심지어 완전히 막지 못한 미세 가루가 흡입될 때마다 몸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잠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럴 때는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여기서 눈을 감으면 연구소고 뭐고 전부 끝장이다. 지금 당장은 정신을 바싹 차리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경계를 멈추지 않은 채 눈을 굴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얗게 변한 폐건물, 콘크리트 조각, 홀로 검은 틈을 드러내는 아스팔트 도로, 크리스마스 트리의 LED처럼 늘어진 전선줄, 소복이 내려앉은 가루들.
화산재가 하얗다면 이런 느낌일까. 눈처럼 층층이 쌓인 하얀 분말이 눈에 닿는 모든 것들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도시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한때 꽤 멋들어진 외관을 가졌을 건물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간신히 예전에는 그랬겠지 하는 상상만 할 수 있었을 뿐.
그리고 격전이 일어났었다는 걸 대신 알려주고 있는 길거리의 풍경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방치된 차량들의 차체가 마구잡이로 뒤틀려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간혹 무언가에 짓밟히기라도 한 듯 찌그러진 전차가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어떤 전차는 뚜껑이 통채로 날아가 있기도 했다.
'···괴물들의 흔적은 없지만.'
시체 청소부인 넝쿨이 자라지 못한 만큼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엎드려 있거나 벽에 기대 있는 모양새의 시체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넝쿨이 잡아 먹지 못한 탓에 방치된 거겠지.
죽은 것들이라는 건 확실했다.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고, 애초에 뼈만 남아 있었으니까.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시체들은 하나 같이 전부 백골로 변해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 백골로 변한 시체들, 도시에 내려앉은 적막감이 주는 분위기가 섬뜩하다. 하나만 해도 긴장감을 차오르게 하는데, 여럿이 뒤섞이니 긴장감이 배가 되었다.
"······소름 돋네요."
한세아가 내 손을 잡아 오며 중얼거렸다. 두개골의 텅 빈 동공과 마주친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에 식은땀이 진득하게 배어 나온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라. 과도한 긴장은 몸을 피곤하게 하니까. 적어도 안개 내에서 돌아다니는 괴물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정신은 똑바로 차려야 하지만 말이다."
칼카타가 방독면 위에 쌓인 가루를 털어냈다. 그는 몸이 굳어 움직임이 어색한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서울에서 아니, 서울은 저 건너편이고. 아무튼 여기 광명시에서 크게 전쟁이 벌어졌다는 건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자세한 이야기 부탁해도 될까요?"
"흠, 저기 보이나? 옆에 폭삭 주저앉은 건물 말이다."
한세아의 부탁에 그는 [다이소] 간판이 겨우 남아 있는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옆에 있는 덕분에 우리는 건물이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무언가가 크게 터진 것처럼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은 1층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유리도, 각종 물건들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저긴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졌다. 그 탓에 저 안에서 먹을 걸 구하거나 도구를 얻으려던 사람들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 폭발이 크게 일어났으니 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었을 거야."
"······."
칼카타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다이소 건물로 향했다.
다이소는 온갖 물건들이 있는 만큼 생존에 유용한 도구가 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각종 먹을거리도 상당히 들여 놓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스윽-
속으로 한숨을 작게 내쉰 나는 허리를 굽혀 도로에 떨어진 표지판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자 하얀 분말이 밀려나면서 거기에 쓰인 내용을 볼 수 있었다.
(17)소하IC SohaIC (07)강남순환로
파란 배경에 하얀 글씨. 표지판이었다. 현재 위치한 곳이 정확하게는 광명시라고는 하나, 서울이나 다름없는 위치였다.
그도 그럴게, 여기는 서울 끝자락이나 다름없는 장소였으니까. 여기서 주소상 서울까지의 거리는 200m가 채 되지 않을 터다.
"이번에는 저곳을 바라봐라. 저긴 하늘을 날아다니던 전투기가 추락했지. 조종사는 탈출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안타까운 일이야."
내가 잠시 표지판을 바라보는 사이에도 칼카타의 설명은 이어졌다. 안개를 밀어낸 그가 이번에 가리킨 곳에는 어색하게 툭 튀어나온 삼각형의 날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날개 하단부에는 아직 터지지 않은 미사일이 달려 있었다. 건들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터질 일은 없으리라. 그리 믿고 싶었다.
"다음은 저 전차들. 저것들은 도로 바닥에서 솟은 나무뿌리를 맞고 날아갔다. 뒤집어 지기도 했고. 그러면서 오발탄을 사방으로 날려 댔었지. 그러다가 연료탱크에 맞았는지 불길이 치솟았어. 당연히 다 죽었다."
신촌 사거리 한복판에 잔뜩 검은 녹이 쓸어 있는 전차와 그 전차들의 장갑에 포탄이 때려 박힌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안으로 파고 들어간 자국과 내부에서 외부로 폭발이 분출된 자국도 같이.
부스스······
전차 안을 채우고 있던 하얀 분말이 세로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꼭 화장한 후에 남은 뼛가루를 허공에 뿌리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장갑 겉면에 늘어 붙은 무언가가 일행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바싹 굳은 고개를 억지로 돌려 검게 탄 무언가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떼어 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느낌만큼은 망막에 남아 아른거렸다.
꿀꺽-
잠시 칼카타의 말이 끊긴 와중에 들리는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뚜렷하다. 적막감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한에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괜스레 팔을 쓸어내렸다. 지금까지 끔찍한 것들을 직접 봐오기는 했으나, 어쩔 때는 눈으로 보는 현실보다 머리로 만드는 상상이 더 끔찍한 법이다.
사람의 상상력은 때로 현실보다 기괴한 것,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할 이야기는 많다. 허나, 굳이 다 할 필요는 없지. 그저 비극이 일어났다고만 이해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 왔거든."
"예? 벌써요?"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며 되물었다. 현재까지 걸어온 거리는 체감상 대략 300m 남짓. 1km도 되지 않았건만, 그의 집에 벌써 도착했다는 말인가.
칼카타가 그리 멀지 않고, 가깝다고 하긴 했어도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
고개를 돌려 지수, 예린, 한세아를 바라보니 그녀들도 당황한 눈치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멀지 않다고. 따라와라, 이쪽이다. 내가 머무는 건물에는 계단이 없으니 따로 만들어둔 장치를 타고 올라가야 해."
"계단이 없다고요?"
"그래, 내가 다 부쉈다. 아파트 구조상 일반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는 승강기나 비상구뿐. 그 중 승강기는 더 작동하지 않으니, 단순하게 계단만 부수면 외부의 침입 위협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말이지 않은가."
건물 계단을 일일이 부쉈다는 말에 조금 놀랐지만, 그가 그렇다고 하니 우리는 칼카타를 얌전히 뒤따를 뿐이었다.
이윽고.
철컥-
어느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 칼카타는 금속 상자 앞에 섰다. 공사장에서 흔히 쓰이는, 사방에 촘촘한 구멍이 뚫린 임시 승강기였다.
그것도 바닥과 아파트 건물 벽면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설치된 철근 구조물에 들어 있는 승강기 말이다.
"인원이 인원인지라 올라가는 건 좀 힘들더라도, 한 번에 올라가는 게 낫겠지. 자, 한 명씩 안으로 들어가라."
"넵."
칼카타,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총 5명의 인원이 작은 승강기에 들어가자 내부는 꽉 차고 말았다.
"이현우. 너는 나랑 이 레버를 돌리면 된다. 이걸 돌리면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칼카타는 승강기 중앙에 설치된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전기도 없고, 계단도 사라진 상황에서 어떻게 올라가나 싶었는데, 도르래를 이용해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승강기 원래 여기 있던 게 아니죠? 위치 보니까 이런 승강기가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내 아내가 손재주가 좀 좋거든. 나와 내 형제들이 구해 온 재료들로 만들어 준 거다. 당연히 이것도 아내 솜씨고.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마. 지금은 이걸 돌리는 게 우선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일단 위로 올라가 안개 구역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행히 그가 머무는 집이 멀지 않았기에 아직은 안개의 영향으로부터 버틸만 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점점 더 몸이 둔해지고 있는 게 느껴지기도 하니 서두르는 게 좋을 듯했다.
드르륵- 드르륵-
나와 칼카타는 노를 젓는 것처럼 도르래 손잡이를 돌렸다. 확실히 혼자였다면 꽤 힘들었을 정도로 손잡이를 돌리는데 힘이 꽤나 들었다. 인원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덜컹!
"으아···!"
상승을 시작하면서 한차례 흔들리는 승강기에 기겁을 하는 지수. 그녀의 꼬리는 어느새 다리 사이로 말려 들어가 있었다.
"···이거 중간에 떨어지거나 하진 않겠죠······?"
"걱정하지 마라. 만일을 대비한 브레이크 기능도 있으니."
"······."
칼카타의 호언장담에도 여전히 불안한 표정인 그녀는 그냥 시선을 위로 올렸다. 멀어지는 지상을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다고 해도 어차피 아래는 하얀 안개만 보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온통 하얀색만 보이게 된 것이다.
드르륵- 드르륵- 끼기긱-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울릴수록 승강기는 천천히 위로 상승한다. 그러나 보이는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안개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참 손잡이를 돌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끼이익-
쿵!
승강기에 설치된 도르래가 단단하게 고정되는 소리를 냈다.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안개도 더 이상 우리를 잡아 두지 못하게 되었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실외기가 7개 정도였으니 칼카타는 대략 7층이나 8층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끼긱-!
"다 왔군. 우선 안으로 들어와라. 승강기는 내버려 둬도 돼. 어차피 고정되어서 안 떨어진다."
칼카타는 망설임 없이 승강기 철문을 열고, 코앞에 있는 베란다 안쪽으로 넘어갔다. 거실 베란다 창틀과 승강기와의 거리가 가까워서 예린도 쉽게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이제는 어색한 인사말에 말끝을 이상하게 늘리며 나는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옷에 달라붙은 하얀 가루들을 최대한 털어내면서 간단하게 집 내부를 살펴보았다.
바닥에 깔린 장판, 거실 한 켠에 놓여 있는 방석들, 베란다 근처에 세워진 빗자루와 쓰레받기, 눈에 보이는 모든 창틀에 설치된 와이어, 굳게 닫힌 방문들.
창틀에 추가로 설치된 장치들만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탁- 타탁-
내가 먼저 들어간 후, 지수, 예린, 한세아도 차례대로 집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혹시 저 아래로 떨어질까 두려운 마음에 서로 손을 꽉 잡은 채로.
바로 그때.
"여보!"
어떤 여성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외쳤다. 작은 뿔이 머리의 좌우에 나 있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칼카타에게 곧장 안겼다.
그리고.
"······배가 불러 있···네?"
지수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칼카타에게 안긴 그녀는 임산부였으니까.
그것도 만삭인 임산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