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0 - 270. 상태 (1)
"아니, 왜 아내분이 임산부라고 말 안 해줬어요!"
화들짝 놀란 내가 정신을 차리며 외친 말이었다. 칼카타에게는 간단하게 아내만 있다고 들었지 출산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는 임산부일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야 말할 기회가 없기도 했고, 한창 너희들이 나를 경계하고 있을 때 말해 준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 같았으니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칼카타는 그의 아내를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몸에 묻은 하얀 가루를 마저 털어냈다.
"······."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그의 지적에 입을 슬그머니 다물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오히려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한다며 한층 더 경계했을 수도 있었겠지.
어찌 되었든 지금 눈으로 직접 보게 된 칼카타의 아내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머리에 뿔이 나 있기는 해도 지구의 인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그의 아내도 피부가 녹색인 외계인일 거라며 예상하고 있었는데.
다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표정들을 보니 나처럼 그렇게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진짜 임신?"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고, 믿지 못해서 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현재 상황이 놀라워서 무심코 내뱉은 말에 불과했다.
"그럼 가짜 임신도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웃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킬킬 웃는 칼카타. 그는 아내에게 하얀 분말을 마저 털어낼 때까지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며 말했다. 꼭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는 듯한 행동이었다.
칼카타의 아내는 우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방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의 태도와 임산부를 보니 조금 남아 있던 경계심마저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칼카타를 안개 구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던 것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아내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게, 임산부가 안개를 헤치고 이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의 아내는 푸른 입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 것도 그러한 추측하게 만드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당장 나, 지수, 예린, 한세아조차 안개에서 버티는 게 쉽지 않았건만. 일반인은 더욱 그렇겠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차이였다.
게다가 이 안개 속에서는 바깥과 달리 괴물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외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하기도 했으니 여기에 머물고 있었던 거겠지.
이곳에 괴물들이 들어오지 않는 만큼 안개 근처 경계선에는 나무 인간이나 변종들이 잔뜩 몰려 있긴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곳이 그나마 안전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다만 언제까지고 여기서 살 수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몸에 묻은 가루나 털어내라. 가루를 털고, 그 가루를 치워야 너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않겠나."
칼카타가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 물에 적신 천을 가져오며 말했다.
"아, 네!"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혼자서 털지 못한 부위들을 서로 털어 주었다. 옷 구석구석에 들어간 하얀 가루들이 어찌나 많은지. 옷을 터는 과정은 한동안 이어졌다.
부스스······
그렇게 바닥을 장식하게 된 가루는 칼카타가 가져온 빗자루로 한차례 쓸고, 남은 잔여물은 꼼꼼한 걸레질로 말끔하게 지워냈다.
그나마 머리카락은 살짝 떡이 져 있기는 해도 멀쩡했다. 방독면 세트에 딸린 보호 두건으로 가루의 침입을 막은 덕분이었다.
"일단 보이는 가루는 털어냈다. 허나, 아직 남은 것이 있을 거다. 갈아입을 옷은 있나?"
"있어요."
한세아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물품을 속으로 가늠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방에 가서 갈아입고 오도록. 이야기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잠자코 칼카타의 지시에 따랐다. 그가 가리킨 방까지 이동하는 와중에도 우리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그가 무섭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지금 같은 공간에 몸을 조심히 해야 하는 임산부가 있는 까닭이었다. 특히 가루는 몸에 해로우니 우리 스스로 더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칵-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이는 건 각종 물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 광경이었다.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도구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여실히 닿은 흔적이었다.
"······맛있겠다."
예린이 침을 꼴깍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의 눈을 가득 채운 건 산처럼 쌓인 초코바 상자. 오늘 아침에도 지수의 몫을 뺏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먹고 싶어진 모양이다.
"···손대면 안 된다? 우리 거 아니니까."
나는 예린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혹시 몰라 당부하는 말을 내뱉었다.
아이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 넘치는 눈은 덤이었다.
"자자,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구요. 벗은 옷은 일단 이 비닐에 담아요. 갈아입을 옷 받으시구."
"전 잠깐 나가 있겠습니다. 다 갈아입으시면 신호 주십쇼."
"알았어요. 금방 갈아입을게요. 오래 안 걸려요."
한세아가 지수와 예린에게 옷을 건네는 모습을 끝으로 나는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루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온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거실로 돌아왔다.
"왔나?"
"어서 오세요, 현우씨. 당신들도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방석 위에 앉아 있는 칼카타와 그의 아내가 그런 우리를 반겼다.
"그,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예전에 저랑 알고 지냈다거나 한 건 아니죠···? 초면 맞죠?"
"네, 초면 맞아요. 현우씨 이름은 그이에게 하도 들어서 알고 있는 것뿐이예요. 그리고 제 이름은 최미소구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살포시 웃는 여성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
그녀가 자기 이름을 밝히고 나서야 나는 우리 일행의 이름을 칼카타에게 말해주지도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서로 할 말만 하느라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저는 예린이예요! 최예린!"
"예린이는 나랑 성이 같구나. 귀여워라. 초코바 먹을래?"
당차게 답하는 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최미소는 주머니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냈다. 칼카타도 예린을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부부라 그런가 보다. 임신해서 더 그럴 수도 있겠고.
"네···!"
사양을 모르는 아이는 초코바를 냉큼 받아 품에 숨겼다. 푸른 가루가 담겨 있는 유리병이 들어 있는 곳과 동일한 위치였다. 예린은 그 두 개를 동급으로 취급하는 듯했다.
"한세아예요."
"김지수요. 그냥 지수라고 불러 주세요."
이어서 한세아와 지수도 소개를 간단하게 마쳤다. 자기 취미는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맞선 자리가 아니니까.
"네, 다들 반가워요. 온전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최미소는 새로운 사람과 대화해서 마냥 좋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잔뜩 신이 나서 가끔 손을 흔드는 모습은 솔직히 좀 귀여웠다.
이름처럼 순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우리와 비슷한 나잇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직 아이를 낳지는 않았으나 벌써부터 엄마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다.
"혹시 바깥에서 어떻게 지내다 왔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저는 여기서 나가 본 적이 없거든요."
최미소는 안개 구역 바깥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칼카타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기도 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이야기해줄 차례였다.
마침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이기도 했고, 지금 만큼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의 환경은 없으리라.
나는 지수, 예린, 한세아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하나씩 내가 겪고,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지수에게 해줬던 이야기들부터, 한세아와 함께 지수와 합류한 이야기들까지.
의왕시 캠프에서 있었던 이야기들부터, G타워에서 마주쳤던 거미 둥지의 이야기들까지.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칼카타와 최미소는 침음을 흘리기도 했고, 감탄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수리산에 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마쳤을 때가 반응이 가장 컸다. 최미소가 순간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안타까워한 것이다.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이었다.
***
긴 이야기가 끝나고 저녁을 먹기 전,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크흠! 솔직히 그,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긴 한데, 이런 거 뒤에서 괜히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한세아가 가만히 앉아 쉬고 있는 최미소의 옆에 다가가 자연스럽게 옮겨 앉았다. 그녀는 괜히 헛기침하며 이목을 끌었다.
"당연하죠, 세아 언니. 이런 건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게 나아요. 그리고 마침 당사자가 근처에 있네요."
조금 피곤해 보이는 지수 또한 피식 웃으며 한세아를 따라 한쪽을 점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앞자리뿐이었다.
"···맞아요! 엄마가 아빠랑 둘이서만 놀 때 들리는 소리는 다른 사람에게 비밀이라고 했지만, 둘이 있을 때 물어보는 건 괜찮다고 했어요···!"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예린. 아이는 마지막 남은 퇴로를 막았다.
"······아."
최미소는 자신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녀들을 보며 깔깔 웃었다. 지수, 예린, 한세아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다행히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 최미소를 보며 그녀들은 말없이 눈을 반짝였다. 기대감이 찬 눈빛이었다.
솔직히 지구 바깥에서 온 칼카타와 지구에서 자란 인간이 결실을 맺기까지 했는데, 이걸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터다. 나도 티는 내지 않았으나 궁금하기는 했다.
이윽고, 예린이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두 손을 깍지 껴 코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면서 어디선가 들어 본 말투를 흉내 내며 작은 입을 벌렸다.
"시작···하시죠."
아이는 지금 눈치없이 살랑거리는 꼬리까지 잡아둘 정도로 조금 아니, 매우 진지했다.